향단.
생각해보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서울 후미진 곳의 32평 아파트가 3억2000만원은 가볍게 넘기는 판이니, 어쩌다 밤늦게 거실 소파에 누워 ‘해외 축구’라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저 한 뼘짜리 화장실이 3000만원은 되고, 뭐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도 어려운 뒷베란다가 2500만원쯤은 되고, 이제 중학교에 갈 큰애의 방도 침대 모서리와 책상 귀퉁이가 맞붙은 ‘미니멀’한 공간이지만 그마저도 5000만원쯤은 되는, 기막힌 ‘집’의 사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의 32평을 이렇게 분해하여 계산하면 아마 안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도 2000만원쯤은 될 것이다. 그렇게 ‘집’을 분해하여 살피고 나면, 정말 이 32평이 3억2000만원을 훨씬 넘어야 한단 말인가,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바람과 미묘한 빛 머무는 곳, 아파트 세대에겐 낯선 곳
물론 이런 경우라고 해서 사람 사는 곳이 못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스팔트 킨트’ 세대를 대표하는 최인호는, 그가 한창 문재를 드날리던 1970년대 초반에 단편 ‘타인의 방’을 발표하여, 술 취한 사내가 남의 집을 자기 집으로 착각해 문을 두드리며 소란을 피우는 광경을 쓴 바 있는데, 그 ‘집’은 아파트라는 ‘타인의 방’이었다. 그렇게 싸늘한 이미지의 아파트이지만, 사람 사는 곳에 소박한 정경이 피어나지 못할 리는 없는 것이다. 시인 김기택은 봄날에서 이런 정경을 묘사한다.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시인이 기특하게도 이 콘크리트 도시의 한 정경을 섬세한 스냅 사진으로 포착하였으나, 그렇기는 해도 역시 ‘한가로운 햇볕’은 도심의 것이 아니라 경향 각지의 소읍에서나 만끽할 수 있는 몫이다. 손택수의 시 放心의 정경은 바로 그런 시공간이 선물한 것이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한옥의 처마는 한 폭의 그림이다.
그래서 나는 경주에서 포항 사이, 양동마을로 스며들어가 고택들 사이의 길들이며 그 집들의 대청마루를 스치는 일렁거리는 바람과 미묘한 빛들을 이 순간이 아니면 또 언제 느끼랴 하는 심정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동서양의 건축에 관하여, 특히 그 건축들이 저마다 어떻게 빛과 바람을 이해하였는가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긴 이화여대 임석재 교수(건축가)에 따르면 우리 옛 건축, 이름하여 ‘한옥’은 ‘빛’을 받아들이고 반응해낸 결실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23.5°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북반구의 해는 여름에 높고 겨울에 낮다. 여름에는 햇빛이 저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고 겨울에는 그 빛이 마치 구릉을 타고 넘듯 낮은 각도로 흘러간다. 임석재 교수는 “한옥은 햇빛을 다스리기 위해 여름과 겨울의 햇빛이 처마와 만나 이루는 각도의 중간 지점에 창을 낸다. 여름에 귀찮은 햇빛을 물리치고 겨울에는 고마운 햇빛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라고 쓴다. 그래서 한옥의 처마는 적당한 높이로 돌출된다.
손택수 시인이 제비의 낯선 방문을 맞이했던 대청마루도 임석재 교수에 따르면 빛과의 교감을 이룬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겨울 햇빛은 아침 10시쯤 대청의 마당 쪽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해 오후 4시쯤이면 대청의 안쪽 끝에 정확히 닿는다. 이렇게 하여 햇빛이 귀한 겨울에도 무려 6시간이나 햇빛은 대청마루에 머물게 된다. 한옥의 대문과 대청과 방의 앞뒤 문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그것이 바람길이 되어 통풍과 환기 작용을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양동마을의 장독대.
나는 그런 이치를 양동마을 언덕 위의 보물 제412호 ‘향단’에서 만끽한다. 이 고택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1540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회재 이언적은 주자학을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으로 계승한 사람으로 그의 유허는 양동마을 인근의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99칸짜리 향단은 화마를 입어 지금은 51칸 단층 기와집으로 남아 있으나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가 서로의 조밀한 세계를 유지하면서도 2개의 마당과 작은 공간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소통하여 그 작은 세계 속으로 하루 종일 햇볕이 스며든다.
윤대녕의 소설 빛의 걸음걸이는, 비록 양동마을의 유서 깊은 한옥은 아니지만, 오늘의 중년 세대가 1970~80년대에 거처했던 도심의 작은 집들을 애틋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는 간신히 한 생애를 건사해 나가는 가족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그리고 소설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것은 ‘빛’이다. 그 빛의 걸음걸이에 따라 가족의 사연들이 이어진다.
“가끔 집에 내려와 새로 들인 방에 누워 있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그 누런 사진 속에 맨발로 서 있는 꿈을 꾸곤 했다. 그 방은 아침볕이 그중 먼저 찾아드는 열대 온실 같아서 해바라기 꿈을 꾸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때 내 발등을 모로 밟고 종종 지나가던 병아리의 간지러운 발자국 몇 점. 아 그리고 네 붉은 입술!
집도 별수 없이 나이를 먹는지 블록에다 슬레이트를 얹어놓은 허술한 건물은 세월이 갈수록 눈에 띄게 허물어져 갔다. 무엇이든 고장나거나 부서진 것은 못 봐 넘기는 성격의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집수리를 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리고 그동안 아마 다섯 번쯤? 페인트 통을 들고 올라가 지붕의 색을 바꿔 칠했다. 하늘색, 감색, 노란색, 주황색, 엷은 쑥색의 차례로.”
그렇게 끝없이 고쳐가면서 우리 시대의 ‘집’은,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어렵사리 건사되었고, 햇볕이 하루 종일 스며들던 작은 집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지만 그 기억만큼은 태생의 유전자처럼 점점이 박혀 있을 것이다. 나는 양동마을의 유서 깊은 고택의 대청마루에 앉아서, 그 작은 공간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보며 손택수 시인의 비 새는 집-1979을 다시 생각했다.
비가 새면 누이들과 함께 나는
세숫대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아
못물을 만들었다.
녹슨 빗방울 파고들던 방이
맑은 못이 될 때까지
망치질 소리를 견디고 있었다.
얘야, 지붕에 오를 땐 못자국을 밟거라.
못이 없는 자리는 십중팔구가 허방
못 박힌 곳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