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리복 그랑프리육상대회 남자 100m에서 9초72로 세계신기록을 세운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
남자 100m 세계기록은 1968년 짐 하인스(미국)가 9초95로 10초 벽을 깬 뒤 꾸준히 단축돼왔다. 미국 육상영웅 칼 루이스가 91년 9초86으로 9초9 선을 무너뜨렸고, 모리스 그린(미국)은 99년 9초79로 9초8의 벽을 깼다. 이제 9초6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육상 남자 100m는 어떨까. 서말구 한국 육상대표팀 총감독이 1979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멕시코유니버시아드에서 세운 10초34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무려 29년째 철옹성이다. 퍼시 윌리엄스(캐나다)가 1930년에 기록한 세계기록이 10초30이니, 한국은 세계 수준으로 보면 78년 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멕시코시티가 해발 2240m 고지라 공기 저항이 적어 서 총감독이 좋은 기록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다. 1985년 5월 심덕섭이 10초39를 기록했고, 그해 9월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이 10초35를 세우며 기록 경신 가능성을 높였지만 무위에 그쳤다. 94년 진선국이 10초37을 기록한 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10초3대에 진입한 선수가 없다. ‘단거리 유망주’로 떠오른 임희남(광주시청)이 지난해 7월 10초42를 뛴 게 최고 기록이다.
남자 100m 서말구가 세운 10초34 여전
한국 남자육상 200m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장재근.
미국 출신 캐런 콘라이트 한국 육상대표팀 단거리 코치는 5월 열린 제37회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선수들이 뛸 대회가 너무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시즌 때는 지역별로 주말 대회가 열려 선수들이 자주 출전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다. 특히 단거리나 도약 종목 선수들은 되도록 많은 대회에 출전하면서 경험을 쌓아야 기록 경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캐런 코치의 분석이다.
단거리의 경우 경기 당일 컨디션과 주변 환경에 따라 기록이 크게 달라진다. 컨디션이 좋아도 바람과 기온, 그리고 함께 달리는 선수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대회에 출전해 어떤 변수에라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노하우를 쌓는 게 중요하다. 한마디로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단거리 육상도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육상선수들은 뛸 대회가 너무 없다. 가까운 일본도 주말마다 대회가 열리는데, 한국은 시즌 때도 한 달이나 두세 달에 한 번꼴로 대회가 열리는 게 고작이다. 그러다 보니 컨디션을 잘 유지하다가도 대회 때 망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6월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제62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10초66으로 10초65를 기록한 전덕형(대전시체육회)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임희남은 “일주일 전에만 경기를 했어도 (기록이) 달랐을 것이다. 지난주엔 컨디션이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록 경신도 가물에 콩 나는 수준이다. 52개 종목(46개 정식 종목 외에 육성 종목 포함) 가운데 10년 이상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 남자 100m와 여자 100m(11초49·1994년·이영숙)를 포함해 21개다. 남자 200m 한국 기록 20초41은 장재근이 1985년에 세운 것이다.
한국 남자육상 100m 기록을 30년째 보유하고 있는 서말구 육상대표팀 총감독의 선수시절 모습.
하지만 대표팀이 아닌 선수들에게도 가능한 한 많은 국내 대회에 출전해 기록을 단축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국 육상이 발전할 수 있다. 일부 팀을 제외하고 실업팀 선수들도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된다. 특히 초·중·고·대학 선수들의 경우 팀 재정이 열악해 아예 국제대회 출전은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이 밖에도 기록 단축이 안 되는 이유는 많다. 서 총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려 하고 편한 것만 찾는다는 얘기다.
요즘 젊은 선수들의 성향일 수 있지만, 육상이 비인기 종목이라는 점도 선수들의 해이한 정신력 문제를 부추기는 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인기 있는 프로 종목과 달리 ‘스타플레이어’가 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선수들은 육상을 외면한다. 육상을 하더라도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삼성전자)를 제외하곤 성공적인 역할 모델이 없어 땀을 흘릴 목표의식을 찾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2011년 대구육상대회 들러리 전락 우려
또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가 ‘홍보’를 목적으로 선수들을 키우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선수들의 기본적인 ‘밥’ 문제는 해결됐지만, 지자체가 기록보다 순위에만 목을 매는 탓에 기록 단축에 대한 선수들의 애착이 현저히 떨어진 측면도 있다. 남자 100m뿐 아니라 육상 종목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기록 단축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대구 유치가 확정된 한국은 ‘2011 드림팀’을 구성하는 등 유망주를 키워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가대표급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물론 안방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망신당하지 않고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빅 이벤트’를 기회로 한국 육상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정책도 필요하다. 세계선수권은 일회성이지만 한국 육상은 영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