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외빈들에게 계영배를 선물했다. 받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잔의 뜻이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오랫동안 나와 인연을 맺어온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에게도 주한 미국대사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계영배를 선물했다. 당시 그는 계영배를 보고 무릎을 치면서 “와우!” 하고 감탄했다.
- 박근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중에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채 태어난 아테나. 그는 ‘아버지의 딸’로 불리며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늘 곁에서 보필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닮은꼴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초대하거나 만나는 내외빈에게 어김없이 계영배를 선물한다. 그의 면모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절제의 마술사다. 함부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쏟아낸 감정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세 도중 괴한에게 피격당한 와중에도 ‘연설을 끝마쳐야 할 텐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얼음공주’라고 불릴까.
그리스 신화에도 두 명의 얼음공주가 있다. 제우스의 딸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다. 이들은 모두 서릿발처럼 차가운 처녀신이다. 아테나는 한 번도 남신과 사랑을 나눈 적이 없다. 그는 지혜의 여신답게 가슴보다는 머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아르테미스는 이보다 한술 더 뜬다. 그는 자신의 목욕 장면을 본 사냥꾼 악타이온을 가차없이 사슴으로 바꿔버린다. 결국 악타이온(사슴)은 자기 사냥개에 물려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악타이온이 고의로 본 것도 아닌데 아르테미스는 인정사정없다.
아르테미스는 조직을 싫어한다. 무공해 자유 청정지역 숲 속을 좋아한다. 그는 요정들을 데리고 숲 속을 거닐면서 사냥을 즐긴다. 달의 여신답게 달빛이 눈부시게 흐르는 밤을 좋아한다. 달 중에서도 그의 이미지에 맞는 것은 초승달이다.
반면 아테나는 조직을 선호한다. 그는 제우스가 대변하는 가부장제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조직에 뛰어들어 남성들과 당당히 경쟁한다.
가부장제 현실 인정하고 남성들과 당당히 경쟁
박 전 대표는 두 여신 중 아테나를 닮았다. 그는 2000년 여성에게 할당된 지명직 부총재를 거부하고 과감하게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냥 주어지는 자리는 싫다는 것이다. 같은 부총재라도 남자들과 당당히 겨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여성을 배려한다는 그 자리가 오히려 여성에게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는 최병렬 후보에 이어 2위로 당선됐다.
아테나는 탄생부터가 남다르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첫째 아내로 삼는다. 신혼 초 제우스에게 끔찍한 신탁이 내려온다. 첫째 아이는 딸이지만 둘째는 아들이 태어나 자신의 권력을 찬탈한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화근은 싹부터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아내 메티스를 조그맣게 만들어서 삼켜버렸다. 몇 달이 지나자 제우스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치게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쪼개진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을 한 아테나가 태어났다.
6월2일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 의원들의 복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63시티에 들어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날 의원들은 ‘행동 통일’ 원칙을 정하고 박 전 대표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박 전 대표도 대학생이 되자마자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해외순방을 시작했다. 1974년 육 여사가 타계한 뒤로는 본격적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떠맡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두 살.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전쟁의 신이 둘 나온다. 아레스와 아테나 여신이다. 하지만 두 신이 맡고 있는 분야가 다르다. 아레스는 전쟁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면을 담당했고, 아테나는 전술과 전략을 맡았다. 아테나는 아레스처럼 공격적이 아니라 방어적이었다. 무기도 아레스처럼 창이 아니라 방패였다.
박 전 대표도 아테나처럼 방어적이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후보 경선 방식을 놓고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세 번이나 양보”했고, 경선에 패배하자 깨끗이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하지만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당당하고 공격적인 방어’다. 아테나가 들고 다니는 방패의 한가운데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박혀 있다. 메두사는 하도 흉측한 괴물이라 그걸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해버린다. 아테나의 방패는 그냥 방패가 아니라 독침이 숨어 있는 방패인 것이다.
전쟁 시에는 전략 짰지만 평화 시에는 생활 위한 기술 익혀
방패를 잡고 있는 아테나. 아테나의 방패는 ‘방어용’이 아니라 독침이 숨어 있는 무기였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시마네현의 한 기자가 박 전 대표에게 물었다. “한일 간에 다케시마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 문제는 전혀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독도는 한국땅이니, 일본이 그걸 인정하면 됩니다.”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영웅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페르세우스, 벨레로폰 등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준다.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영웅은 없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10년 동안 방랑한 끝에 마침내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도 아테나 여신 덕분이다.
박 전 대표 주변에는 왜 사람들이 자꾸 모이는 걸까? 지난 총선 때 왜 후보들이 이름도 생소한 ‘친박연대’를 결성했을까? 그건 박 전 대표가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닐까? 당리당략이 아니라 아테나처럼 이성에 입각한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기 때문 아닐까? 시마네현의 기자에게 한 대답처럼 솔직담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정치인으로서 생각하는 원칙은 뭘까? 그건 거대한 이념도 이상도 아니다. 그건 바로 그의 말대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가 ‘수첩공주’로 불릴 만큼 모든 일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도 이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그는 결국 한나라당 대표로 있는 동안 ‘대국민약속실천백서’를 펴낸다. 국민과의 약속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100% 실천할 때까지 반성의 거울로 삼기 위해서다. ‘수첩공주’ 박근혜는 트로이전쟁의 아테나를 연상시킨다. 그리스군은 아테나의 치밀한 전략이 없었다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한국의 퍼스트레이디 중 아직까지 존경받는 분은 육영수 여사뿐일 것이다. 육 여사는 검소하고, 무엇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청와대로 이사할 때도 공관에 연탄과 쌀은 남겨둘 정도였다. 아이들을 승용차로 등교시키지도 않았다. 또 육 여사는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 만큼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자주 했다. 항상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놓고 여론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박 전 대표는 외모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머니를 닮았다. 그도 어머니가 자기의 “이상적인 여성”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테나가 메티스의 화신인 것처럼 박 전 대표도 육 여사의 화신이 아닐까?
아테나는 공예의 여신이기도 했다. 아테나는 전쟁 때는 전략을 짰지만 평화 때는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술을 관장했다. 그는 가끔 한 손에 그릇이나 물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테나는 수예·재단사·조선 등을 관장했고, 쟁기·갈퀴·멍에 등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생활에 꼭 필요한 올리브나무를 아테네 시민에게 준 것도 아테나였다. 박 전 대표가 전공을 문과에서 이과로 바꾸며 서강대 공대에 진학한 것도 공예의 여신 아테나를 떠올리게 한다.
박 전 대표는 1974년 파리 유학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서 헤어날 틈도 없이 1979년에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청와대에서 쫓기듯 나와 졸지에 동생 둘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됐다. 친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후 그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숨죽여 살았다. ‘얼음공주’의 이미지는 그런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절망을 견뎌낸 사람은 결코 냉랭하지 않다. 겉으론 말이 없어 차갑게 보이지만 속은 부드럽다. 박 전 대표도 어쩌면 ‘속이 따뜻한 얼음공주’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