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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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청와대·국정원으로 웹서핑”

임동원 전 국정원장, 회고록 통해 햇볕정책 포함한 대북 관련 비화 공개

  • 신석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08-06-16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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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청와대·국정원으로 웹서핑”

    2005년 6월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임 전 원장의 회고록(아래 작은 사진).

    내가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사진)을 처음 만난 때는 2003년 11월이다. 임 전 원장은 경남대 북한대학원(현 북한대학원대)과 극동문제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라는 주제로 두 차례(11월15일, 29일) 특강을 했다. 나는 당시 이 학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고, 2002년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 등 북한의 2000년대 경제개혁에 대해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강의를 놓치지 않았다.

    강의를 하는 동안 임 전 원장의 표정은 담담하고 때로는 비감했다. 2003년 한 해 내내 여론을 가르며 첨예한 남남갈등을 야기했던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별검사 수사가 끝난 뒤였다. 2002년 10월부터 시작된 제2차 북한 핵 위기도 심화되고 있었다. 제1차 정상회담의 산파격인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그해 8월 자살한 뒤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도 기로에 서 있었다. 임 전 원장은 그러나 전문가답게 김대중 정부 5년간의 대북 화해 협력정책(이른바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의가 끝나자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2002년 4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방북했을 때 북한의 경제개혁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이 사전에 언급한 것이 있나?”(기자)

    “북한이 핵을 가지면 남북한 협상력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는 것 아닌가? 리더십의 변화 없이 북한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햇볕정책에 반대해온 학생)

    김일성·정일 부자와의 사적 대화기록도 많이 담겨



    “북한의 살길을 찾아주려는 국제적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2002년 경제개혁 이후 북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나?”(햇볕정책에 찬성해온 학생)

    당황하지 않고 모든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하는 그를 보면서 햇볕정책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부를 떠나 남북관계의 최전선에 있었던 ‘장수’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질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의 과정 및 결과,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보고 들은 김일성·정일 부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임 전 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왜 서울 답방을 하지 않았나?” “곁에서 본 김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더냐?”는 질문에 일련의 사실들을 공개했지만,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리라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기억 때문에 올해 6월5일 출간된 그의 회고록을 받아본 소감은 각별했다. 746쪽 분량의 ‘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을 통해 그는 “하나도 숨김없이 기록해온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임 전 원장은 책 출간 사실을 알고 관심을 표명해온 기자 여섯 명에게만 사전에 책을 배포했는데, 기자들의 관심은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의 막전막후, 그리고 김일성·정일 부자와의 사적인 대화기록에 모아졌다.

    김일성 전 주석 “김우중 같은 사람 北에 다섯만 있어도…”

    회고록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01년 봄 서울을 답방하려 했지만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자 마음을 바꿨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러시아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임 전 원장은 2002년 4월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항인 서울 답방 문제를 꺼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사실 작년 봄에 서울을 방문하려 했다. (중략) 그런데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 북한을 적대시하는 부시의 당선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은 부시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수행하는, 미군이 있는 위험한 곳”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대신 제3국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의 만남을 제의하면서 “필요하다면 러시아 대통령과 3국 정상회담을 통해 시베리아 철도 연결 문제도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김 전 대통령이 “서울이 아니면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대안을 제시했고, 북한이 불응함으로써 답방이 무산됐다는 것이다.

    그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또 2002년 4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여러 차례 만나면서 들은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했다. 대표적인 일화는 김 위원장이 1992년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는 발언을 미국에 전했다는 것이다. 2000년 6월14일 오후 평양 백화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제가 대통령께 비밀사항을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군 주둔 문제입니다만, 1992년 초 미국 공화당 정부 시기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남과 북이 싸움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군이 계속 남아 남과 북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실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랬습니다.”

    “김정일, 청와대·국정원으로 웹서핑”

    지난해 3월28일 개성공업지구를 방문한 임동원, 박재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공단 내 신발제조업체에서 신발끈을 묶는 작업을 해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임 전 원장에게 인터넷을 즐기며 한국 영화와 방송에 조예가 깊다고도 밝혔다. 그는 2002년 4월 “나는 인터넷을 통해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 사이트를 자주 들어간다”면서 “청와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가 잘 정리돼 있고 통일부의 ‘북한 올바로 알기’ 사이트도 아주 좋은 착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부대를 방문할 때 지방에 묵으면서도 밤에는 인터넷을 통해 남쪽 TV 뉴스를 볼 수 있어 참 좋다”고도 했다. 그뿐 아니라 ‘공동경비구역(JSA)’ ‘여인천하’ ‘태조 왕건’ ‘명성왕후’ 등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감상도 늘어놓았다고 회고록은 전한다.

    김일성 전 주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 전 주석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후속 협의와 관련해 북한을 방문한 임 전 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지런함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우중 회장은 자본가인데도 노동자보다 더 많이 일하며 1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열심히 뛴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 회장 부인의 말이 재미있어요. 남편을 볼 수 없어 골프를 배웠다는데, 남편 머리통을 치는 기분으로 골프공을 친다더군요. 그렇게 가정도 돌보지 못한 채 기업 발전을 위해 쉴새없이 뛰고 있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는 할 수 없겠어요. 자본가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남쪽 기업들이 발전하는 거지요. 김우중 회장 같은 사람이 다섯 사람만 있으면, 같은 민족인 우리도 곧 남쪽을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

    물론 임 전 원장이 아무런 메시지 없이 단순한 기억과 일화만 나열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남북관계 현장에서 체득한 20년의 경험은 남북관계가 북미관계 및 핵 문제와 얽혀 있으며,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증진은 ‘병행’돼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임 전 원장은 이번 회고록에서, 북미관계 및 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 또는 남북관계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핫라인 개설하고 고비 때마다 활용”

    예를 들어, 미국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인사들이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 의혹을 공식화하기 전 한국 정부에 이를 알리고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의 중단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 막아냈다는 대목이 있다. 또 1999년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만든 ‘대북정책 구상’ 속의 ‘대북 포괄적 접근 방안’은 98년 대통령외교안보수석 재직 당시 자신이 만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전략’에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남북은 양 정상 간 ‘핫라인(비상연락망)’을 개설했으며 이를 남북관계의 고비 때마다 활용했다는 회고도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국민 전반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햇볕정책의 비극’과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대북정책에 너무 깊이 개입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잉태되는 과정도 읽을 수 있다. 임 전 원장은 곳곳에서 햇볕정책 또는 북한에 대한 ‘일부 언론’들의 잘못된 보도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또 국정원장인 자신이 김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북정책 실행에 깊이 개입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햇볕에 너무 노출된 탓에 ‘후배’ 국정원장 김만복 씨는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의 막전막후에 과도하게 개입했고, 이로 인해 불명예 퇴진을 하지 않았던가.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6월11일 서울대에서 자신의 기억을 자세히 털어놓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의 회고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이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에게서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듣고 김 전 대통령에게 직보했더니, 임 전 원장이 “그러한 중대한 사안이 있으면 국정원장인 나에게 말해야지 어떻게 대통령께 직보할 수 있는가”라며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회고하면서, 정상회담이 자신의 ‘작품’임을 은근히 강조했다. 한편 임 전 원장은 2000년 6월 당시 평양 숙소에서 박 전 장관이 “제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정상회담을 성공시킨 주인공은 바로 임 원장입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일등공신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작품’에 ‘특검’이라는 칼을 들이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계승하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바를 더 자세히 기억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옳았음을 확인하려는 회고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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