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어도 해피엔딩’에서 열연한 예지원.
예지원(31)의 신작 ‘죽어도 해피엔딩’은 사실 촬영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1999년 국내에도 개봉된 프랑스 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한국판 리메이크작인 이 영화는 기자시사회 이후 입소문을 타고 일반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중심에 예지원이 있다. 예지원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여배우가 20대도 아닌 30대 중반에 비로소 주목받는 경우는 드물다.
지금처럼 활짝 피어난 적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그는 무명배우는 아니다. 예지원의 데뷔 연도는 쉽게 기억할 수 있다. 데뷔작이 ‘1996 뽕’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연기생활 12년째. 데뷔작 때문에 한때 에로배우로만 여기는 시선도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나도향 선생님의 ‘뽕’은 국어책에도 나오잖아요.”
맞는 말이다. ‘뽕’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더 이상하다. ‘뽕’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에는 이미숙도 출연했다. 그러나 ‘뽕’이 히트하자 뒤에 만들어진 ‘뽕’ 시리즈는 토속적 에로물의 장점을 흥행에만 이용했다. 그래서 대중의 머릿속에는 ‘뽕’이 에로물의 대명사처럼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제목이 주는 영향도 크다.
출연 분량이 많진 않았지만 ‘아나키스트’(1997년)에서 예지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예지원은 클럽 가수로 등장한다. 그가 조명을 받으면서 등장해 흐느적거리며 샹송을 부르는 모습은 ‘아나키스트’에서 가장 볼만한 장면이다. 최근 ‘무릎팍 도사’에 나와 샹송 ‘빠로레 빠로레’를 불러 장안의 화제가 된 그의 노래 솜씨는 이미 전부터 드러났다. 예지원이 작품 속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그뿐 아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2002년)에서는 춘천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로 나온다. 처음 만난 김상경 앞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한국무용, 현대무용, 살사 등 다양한 춤을 추며 춤 실력을 자랑한다. 정말 4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진 이 캐릭터를 예지원은 천연덕스럽게 잘 표현했다. 그러다가 홍상수 영화에 절대 빠지지 않는 술집과 여관 장면이 이어지는데, 술집에서 그는 샹송을 부른다. 노래가 끝난 뒤 침묵이 흐르자 “분위기 어색한데 우리 뽀뽀나 한번 할까요?”라고 말한다. 술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상경은 몸을 일으켜 술상 위로 고개를 내밀고 그와 키스한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다가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더 하자”고 말하는 김상경에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우리 지금부터 서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길 건너 모텔로 들어간다.
‘죽어도 해피엔딩’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배우 예지원으로 나온다(예지원의 본명은 이유정이다). 영화 속에서 예지원은 ‘캔느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칸이 아니라 캔느다.
“‘칸 영화제’라는 이름만 쓰는 것도 저작권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캔느로 바꿨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작품과 더 잘 맞는 것 같다.”
그렇다. ‘죽어도 해피엔딩’에서 세계 유명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눈앞에 둔 예지원은 자신을 사랑하는 네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딱히 살인이라 부르기도 뭣할 정도로 그의 우연한 실수를 통해 남자들이 차례로 죽어간다.
어쩌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수 있을까, 예지원이 아니면 누가 저 역을 맡았을까, 연기가 아니라 실제 예지원이 저렇지 않을까?
독특한 캐릭터 완벽 소화 30대 중반에 ‘인기 상한가’
“그렇다. 영화 속에서 내가 맡은 캐릭터는 실제의 나와 거의 흡사하다. 우아한 척, 지적인 척하는 것만 빼면 딱 나다.”
마니아층이라면 프랑스 원작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빠른 속도감과 개성 있고 참신한 연출이 더 그립겠지만, 한국판 리메이크작 ‘죽어도 해피엔딩’은 엽기적인 면을 줄인 대신, 된장을 많이 풀어 대중성을 강화했기 때문에 한국 일반 관객들에게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예지원을 사랑하는 네 남자, 즉 조직폭력배 두목 최 사장(조희봉 분)과 속물 대학교수 유 교수(정경호 분), 영어를 쓰는 교포 출신의 데니스(리처드 김 분), 예지원을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소심한 영화감독(박노식 분)은 캔느 영화제 수상식 참가를 위해 출국하기 전날 밤, 그를 각각 방문해 동시에 프러포즈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꽁꽁 언 동태에 찔려 죽거나 미끄러져 뒤통수가 깨져 죽고, 약을 잘못 먹고 죽는다. 기상천외하고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을 덮으려다 더 큰 사건을 만들어내는 예지원은 이 요란법석의 한가운데 있다.
“예전에 조금 놀았고, 지적인 척하지만 지적이지는 않은 캐릭터다. 매니저로 출연하는 임원희 씨 등 다른 출연자들과 호흡이 척척 맞아 즐겁게 찍은 작품이다.”
기자시사회에서 예지원은 정말 여배우다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유일한 여배우로 다른 남자배우들과 무대에 오른 그는 검은색 정장 일색의 남자배우들과 달리 선홍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어깨에 가느다란 끈이 달린 핏빛 드레스의 밑단은 가는 올들이 풀어져 흔들거렸다. 의상과 짝을 맞춘 같은 색 구두와 귀고리도 빛났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예지원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예지원의 4차원성은 우선 외모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른바 자연미인이다. 데뷔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가 그 흔한 성형수술도 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그의 굵은 팔뚝이 드러난다. ‘귀여워’(2004년)에서는 여배우들이 기피하는 ‘생얼’로 촬영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6년)에서는 귀엽게 튀어나온 똥배를 자랑한다.
“‘죽어도 해피엔딩’을 찍기 위해 몸무게를 7kg이나 뺐다. 그러니까 이제 주변에서 ‘여자’로 봐준다. 요즘은 외출할 때 아이라인도 그린다.”
“꾸미지 않은 솔직한 성격 … 이젠 편안한 역 맡고 싶어”
예지원이 지금까지 맡은 영화 속 캐릭터는 모두 범상치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는 사창가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동료 직업여성들의 열성적인 선거운동으로 당선되는 역을 맡았다. ‘귀여워’에서는 장선우 감독이 연기한 박수무당 출신의 아버지와 그의 배다른 세 아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순이를 연기한다. 순진한 듯, 헤픈 듯 네 남자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순이는 4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진 캐릭터다. 감독들 모두 실제 예지원의 성격을 알고 그를 캐스팅했던 것은 아닐까? 이미 영화판에서는 꾸미지 않은 솔직한 성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TV 토크쇼 등을 통해 예지원의 진짜 모습이 알려진 요즘, 대중은 다시금 새롭게 그를 발견하고 있다.
“다음 출연작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거의 결정 단계다. 지금까지 독특한 캐릭터만 연기해서 조금은 편한 역을 하고 싶다. 내성적인 캐릭터도 좋고 가슴 아픈 로맨스의 주인공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