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축구가 시작됐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07~2008 시즌. 수많은 화제와 격렬한 장면을 태풍처럼 몰고 다니며 전 세계 팬들의 잠을 설치게 하는 10개월의 대하드라마가 시작됐다. 20개 팀이 저마다의 전설을 쓰기 위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쏟아부은 돈은 3억5000만 파운드(약 6600억원).그렇다면 이 대하드라마의 주역은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치열한 백병전에서 살아남아 축구장의 전설을 쓰게 될 감독은 과연 누구인가. - 편집자 -
페르난도 토레스, 카를로스 테베스, 플로랑 말루다(왼쪽부터).
‘엘니뇨’가 북상했다.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종횡무진했던 토레스가 4000만 유로(약 498억원) 이적료라는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항구도시 리버풀에 정박했다. 클럽 역사상 최고 금액. 11세 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유소년 팀에 입단, 2000년 프로에 데뷔했으며 212경기에 출전해 82골을 기록한 골잡이. 이 가운데 75골은 1부리그에서 뽑아낸 것. 그런데 아직도 20대 중반인 1984년생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토레스는 ‘엘니뇨’라는 별명에 어울릴 만큼 예측 불가능한 위치에서 강력한 펀치력을 자랑하며 자신의 이름이 세계 축구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의 이적 소식이 들리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항의시위까지 벌였다. 동시에 리버풀에서는 새로운 노래가 들려왔다. 엘니뇨 토레스를 환영하는 응원가가 벌써부터 만들어져 울려퍼지는 것이다. “신이 떠난 후에 우리는 그를 위해 새 노래를 만들었어/ 그리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는 맨유를 엿 먹이겠지/ 엘니뇨 토레스, 너는 알고 있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카를로스 테베스
리버풀의 팬들이 토레스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맨유를 엿 먹이자’고 외칠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팬들은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그러나 전설은 당연히 신화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선수를 주목한다. 바로 테베스다. 나이가 토레스와 같은 싱싱한 기관차.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남미의 명문 클럽인 자국의 보카 후니오르스와 브라질의 SC코린티아스를 거쳐 지난해 프리미어리그의 웨스트햄으로 왔고, 올해 맨유의 퍼거슨 감독에게서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테베스의 임무는 다양하면서도 막중하다. 지난 시즌 우승에 이어 2연패를 하려는 이 클럽은 그러나 새 시즌을 비극의 전조로 시작했다. 웨인 루니는 포츠머스와의 개막 경기에서 발등 부상을 입었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박치기” 사건으로 징계 위기에 처했다. ‘제2의 호날두’로 불리며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나니는 아직 팀 전체의 밸런스에 유기적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박지성은 내년이 돼야 그라운드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악재가 겹치자 퍼거슨 경은 예상보다 일찍 테베스 카드를 꺼냈고, 현재 그는 시동이 걸리면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달려가는 전투적인 자세로 뛰고 있다.
플로랑 말루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대한 금액으로 특급 선수를 사들여 럭셔리 구단으로 만드는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이번 시즌에는 돈을 풀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글쎄…. 2003년 ‘단돈’ 1080억원으로 첼시를 인수한 뒤 무려 8061억원을 쓰며 스타 선수를 영입한 아브라모비치. 최근 아내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재산의 절반가량인 9조5000억원을 떼어주게 돼 ‘궁핍’해졌단 말인가.
물론 럭셔리 코트의 사나이 호세 무링요 감독은 좀더 확실한 투자를 바란다. 영입이 확실했던 스페인 세비야의 수비수 다니에우 아우베스가 레알 마드리드의 고액 베팅으로 뜸을 들이게 되자, 무링요 감독은 올림피코 리옹에서 도버해협을 건너온 말루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의 올해 선수상을 받은 말루다는 자신이 몸담았던 리옹이 지난 4시즌 동안 4연패 우승을 차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무링요 감독은 지난 시즌 리그 우승을 놓친 결정적 원인이 특급 스타들의 부조화에 있다고 보고 말루다 영입에 애를 썼다. 말루다는 프랑스 리그에서 공격수 드로그바와 호흡을 맞춘 바 있고(앙나방 갱강), 미드필더 에시엔과도 우승(올림피코 리옹)을 이끌었다.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뛰는 말루다는 첼시 부흥을 외치는 무링요 감독의 첫 번째 선택이다.
스벤 예란 에릭손
스벤 예란 에릭손(왼쪽), 로이 킨.
맨체스터의 양대 감독은 사이가 좋지 않다. 맨체스터 시티의 에릭손 감독은 2001년부터 6년 동안 잉글랜드 대표팀을 이끌면서 자주 맨유의 퍼거슨 감독과 부딪쳤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베컴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자 퍼거슨 감독은 “성적을 위해 선수를 돌보지 않는 삼류”라고 에릭손 감독을 비난했다. 이에 에릭손 감독은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맨유 경기 때 다친 루니를 “끝까지 월드컵에 데려가겠다”고 밝혀 퍼거슨 감독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이번 시즌의 첫 대결이 펼쳐졌다. 초반의 악재에도 전체 전력에서 맨유가 앞서지만 결과는 에릭손의 승리. 에릭손 감독은 특급 스타 없이 시즌 초반 3전 전승을 거두며 스타트를 끊었고, 퍼거슨 감독은 2무 뒤의 1패로 난조에 빠졌다.
로이 킨
끝으로, 여기 ‘진정한 사나이’가 있다. 명장들의 각축전에 뛰어든 37세의 젊은 감독 로이 킨. 그는 선수 시절 맨유의 전설이었고 아일랜드의 신화였다. 또한 미드필드의 화신이었으며 거친 축구의 대명사였다. 그는 자신에게 태클을 건 뒤 야유한 선수에게 반드시 경기장 안에서 ‘보복’을 했으나 보복한 뒤에는 심의 결정과 상관없이 곧장 그라운드를 나와버렸다. 그는 축구라는 행성이 반드시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관철했다.
그는 아직 선수이면서도 감독이 해야 할 말을 진지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선수 시절이던 2005년 퍼거슨 감독과 상의 없이 ‘맨유TV’ 인터뷰에서 대런 플래처, 리오 퍼디낸드, 존 오셔, 키어런 리처드슨, 앨런 스미스 5명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강철 같은 대선배의 비판이 있은 뒤 이들은 더욱 성장했다. 하지만 맨유에서 감독의 자리는 단 하나. 퍼거슨 감독은 그를 내쳤다.
이 같은 일화 때문에 로이 킨을 다혈질의 ‘성질남’이라고 봐선 곤란하다. 지난 시즌 부진의 늪에 빠진 2부리그 선더랜드를 맡은 로이 킨은 “목표는 1부리그 승격”이라고 공언하면서 허풍쟁이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연전연승 끝에 1부리그로 승격하자 선더랜드 지방 정부와 팬들이 카퍼레이드를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 킨은 정중히 사양했다. “카퍼레이드는 우승컵을 들고 하자”는 것이 그의 뜻. 진실로 강한 남자가 프리미어리그에 감독으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