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정상회담 발표 이후 이재정(사진) 통일부 장관의 ‘입’이 만들고 있는 분란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일 듯하다. 8월10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영토 개념이 아니라 군사적 충돌을 막는 안보적 개념에서 설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8월16일엔 “(서해교전은) 우리가 어떻게 안보를 지켜내느냐 하는 방법론에서 한 번 반성해봐야 할 과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대한 반박은 즉각적이었고, 더욱이 정부 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았다. 8월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실효적 지배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NLL은 영토주권과 관련 있다”며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8월21일 국회 국방위에서 “(이재정 장관의) 서해교전 발언은 저로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못박은 김장수 국방부 장관의 말은 더욱 직접적이다. 한 사안을 두고 이렇듯 관련 부처 수장들의 발언이 명확하게 엇갈리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청와대는 즉각 진화에 나섰지만, 부처 실무자들의 분위기는 이와 거리가 멀다. 정상회담이라는 ‘빅 이벤트’를 준비하는 핵심 당국자들 사이에 분명한 인식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임명 직후부터 정상회담 발언으로 구설
의문은 한 가지로 모인다. 이 장관은 왜 정부 안에서까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일까. 정치인 출신이라는 배경이나 “행정 조율 경험이 부족하다”는 촌평만으로는 미흡한 듯한 해답은, 발언 맥락과 정부 부처 내부의 ‘주도권 싸움’ 흐름을 꼼꼼히 짚어보면 의외로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답의 키워드는 ‘근본 문제’와 ‘반걸음’이고, 좀더 직접적인 주제는 ‘NLL’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 구체적으로 ‘안보정책 운용의 주도권’에 대한 이 장관의 의욕은 그 뿌리가 깊다. 지난해 12월 장관 임명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주도권 부여’를 다짐받으려 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정부 일각에서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을 비롯한 외교통상부 인사들이 안보 현안의 ‘판’을 장악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공연히 토로하던 무렵이었다. 새로 무대에 오르는 이 장관이 “외교부 독주를 견제하는 카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면담 일정은 사전에 ‘누설’됐고, 결국 그 자리에 송 당시 안보실장이 동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장관의 담판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음은 불문가지. 이후 송 전 실장이 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학자 출신 백종천 신임실장이 ‘초기 장악력’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6자회담 속도가 빨라지면서 송 장관과 외교부 ‘원톱’ 분위기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반면 임명 직후 이 장관은 ‘정상회담’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다. 정상회담에 대해 청와대가 유보적 입장을 거듭 밝히던 당시 “정상회담 정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의 발언은 야당 등의 반발을 샀고, 이후 정상회담 문제는 정치쟁점화돼 도리어 발목을 잡는 형국이 연출됐다.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이 장관의 당시 언급에 대해 “뜬금없다”는 촌평을 날린 이유다.
2월 들어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정부 안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2005년 6월 공식 제의 이후 정상회담은 국정원 대북전략국 중심의 ‘공식라인’이 추진하고, 통일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 진행 상황이 보고되는 시스템이었다. 정동영-이종석 장관을 거치는 동안 줄곧 유지돼온 보고체계였다. 그러나 통일부 장관이 겸임하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이 안보실장에게 넘어가면서 정상회담 보고 책임은 김 원장에게 넘어갔다. 이 무렵 청와대는 두 차례에 걸쳐 이 장관에게 정상회담 발언과 관련한 ‘경고성 만류’를 전했다는 것이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이다.
대북정책 영향력이 더욱 위축될 것을 염려한 통일부 관계자들의 실망은 2·13합의가 나온 후 대북 쌀 지원 문제로 옮겨간다. 북핵 문제의 돌파구가 마련됐으니 지난해 미사일 발사 직후 중단된 쌀 지원을 재개해 통일부의 영향력을 복원하고 남북관계도 해빙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외교부의 입장은 달랐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2·13합의의 1단계 조치가 이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미국과의 정책공조 차원에서 쌀 지원 재개 여부를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청와대 역시 외교부의 손을 들어줬다. 5월 말 열린 남북 장관급 회담 당시 이 장관은 회담 중간에 급히 노 대통령을 면담하고 쌀 지원 재개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대통령의 대답은 끝내 “No”였다. BDA가 해결된 후에도 이 장관의 ‘외로움’은 이어졌다. 6월 말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문 사실을 이 장관이 당일 아침에야 외교부로부터 전달받았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이러한 그림의 밑바탕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안보정책 운용에서의 기조 차이가 깔려 있다. 외교부가 ‘북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풀어야 하고, 남북관계 진전은 반걸음 뒤따라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통일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진전이 병행돼야 하고 북미관계가 교착할 경우에는 남북관계 진전이 이를 견인해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것.
이런 차이는 사실 단순한 부처 간의 주도권 싸움이 아니라 북핵 문제 해법을 두고 관련 전문가, 언론, 정부 내부를 막론하고 형성된 거대한 ‘생각의 차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마디로 북핵 문제를 푸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 그러나 출범 이래 노무현 정부의 인식은 전자에 가까웠고, 이는 지난해 핵실험 이후 좀더 극명해졌다. 이 무렵 송 장관으로 대표되는 외교부 라인이 안보정책 운용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7월 들어 상황이 급물살을 타면서 남북관계 진전을 애타게 기다리던 통일부의 시선은 이른바 ‘근본 문제’로 향했다. 북한이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 진전은 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거듭 밝혀온 국가보안법과 NLL 문제가 그것이다. 어떻게든 근본 문제에 손을 대야 한다는 주장이 통일부 주변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부 부처 팀플레이 붕괴 노출한 셈
결정적인 계기는 7월 말 장성급 회담에서 만들어졌다. 회담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7월19일 열린 청와대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이 장관과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이 ‘NLL 논의 가능성’을 거론하자, 김 국방장관이 이에 강하게 반발한 것. 7월 말 열린 장성급 회담이 첫날부터 NLL 문제를 두고 맞대결 양상을 보이자, 통일부 당국자들이 국방부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청와대와 통일부 일각에서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이 NLL과 관련해 비교적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국방부가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뒷말이 흘러나왔고, 장관 교체가 거론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후 8월 초 김 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돌아왔지만, 이 장관은 깊이 관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관 처지에서는 더욱더 속이 타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정상회담을 발판 삼아 통일부가 남북관계 진전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정상회담 준비기획단장을 맡아 공식 대외책임을 맡은 이 장관이 NLL 문제나 을지포커스렌즈(UFL) 훈련 등 타 부처 관할 업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나선 데는 이러한 ‘갑갑함’이 숨어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장관의 돌출 발언을 오로지 정책 방향 차이로만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부처 간의 견해 차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처럼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 장관 발언에서 그 행간을 읽어보면, 그가 발언의 청자(聽者)로 평양을 상정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장관 인사청문회 당시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질문에 “여기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즉답을 피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관계 진전의 주무 책임을 맡고 있는 통일부장관 내정자가 굳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통일부 관계자들은 “이종석 전임장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 전 장관이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쌀 지원을 중단하는 등 비교적 강도 높은 대응을 가해 평양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이 때문에 대북 업무 수행에 차질을 빚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해석이다.
이후 이 장관은 국방부와 군, 보수층의 ‘과도한 안보논리’를 막기로 자임한 듯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5월 “국민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성할 일”이라는 언급, 최근의 NLL 발언과 서해교전 발언은 모두 이런 일관된 흐름 위에 있다. 이 장관과 개인적인 인연이 깊은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이 장관의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주요 ‘전선’이 평양과 서울 사이가 아닌 남한 내부에 놓여 있다는 뜻이 된다. 남남 갈등이 먼저 해결돼야 남북 갈등도 해결 가능하다는 판단은 통일부나 진보적 시각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그의 발언을 통해 이 전선이 ‘정부 부처 사이에’ 그어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팀플레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나 군 처지에서 보면 NLL이나 서해교전은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이다. 내부적으로는 격론을 벌일 수도 있지만, 일단 외부로 드러나면 반박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조심성 없이 건드리는 이 장관의 최근 행보는 도리어 정부 내부의 논의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한 팀이라는 인식’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백 번 양보해 원칙적으로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문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장관 행보 盧心에 따른 것인가
이 장관이 정상회담의 실무준비 책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향후 상황은 더욱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NLL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것인지를 놓고 국방부와 통일부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수위는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 국방부 관계자들은 이 장관의 이런 움직임이 노 대통령과의 교감에 따른 것인지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NLL 문제를 논의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 장관에게 ‘총대’를 메게 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다. “NLL은 정상회담이 아니라 장관급 회담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8월21일 김 국방장관의 발언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 장관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킨 후에도 통일부는 “NLL이 조금이라도 변경될 경우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국정브리핑’에 이 글을 기고한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장관의 핵심 측근이었고, 기고 자체도 장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과연 노 대통령은 이 장관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 리트머스 시험지는 ‘정상회담에서의 NLL 논의’ 여부가 될 것이고, 이제 시간은 한 달 남짓 남았다.
그의 말에 대한 반박은 즉각적이었고, 더욱이 정부 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았다. 8월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실효적 지배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NLL은 영토주권과 관련 있다”며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8월21일 국회 국방위에서 “(이재정 장관의) 서해교전 발언은 저로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못박은 김장수 국방부 장관의 말은 더욱 직접적이다. 한 사안을 두고 이렇듯 관련 부처 수장들의 발언이 명확하게 엇갈리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청와대는 즉각 진화에 나섰지만, 부처 실무자들의 분위기는 이와 거리가 멀다. 정상회담이라는 ‘빅 이벤트’를 준비하는 핵심 당국자들 사이에 분명한 인식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임명 직후부터 정상회담 발언으로 구설
의문은 한 가지로 모인다. 이 장관은 왜 정부 안에서까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일까. 정치인 출신이라는 배경이나 “행정 조율 경험이 부족하다”는 촌평만으로는 미흡한 듯한 해답은, 발언 맥락과 정부 부처 내부의 ‘주도권 싸움’ 흐름을 꼼꼼히 짚어보면 의외로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답의 키워드는 ‘근본 문제’와 ‘반걸음’이고, 좀더 직접적인 주제는 ‘NLL’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 구체적으로 ‘안보정책 운용의 주도권’에 대한 이 장관의 의욕은 그 뿌리가 깊다. 지난해 12월 장관 임명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주도권 부여’를 다짐받으려 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정부 일각에서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을 비롯한 외교통상부 인사들이 안보 현안의 ‘판’을 장악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공연히 토로하던 무렵이었다. 새로 무대에 오르는 이 장관이 “외교부 독주를 견제하는 카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면담 일정은 사전에 ‘누설’됐고, 결국 그 자리에 송 당시 안보실장이 동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장관의 담판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음은 불문가지. 이후 송 전 실장이 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학자 출신 백종천 신임실장이 ‘초기 장악력’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6자회담 속도가 빨라지면서 송 장관과 외교부 ‘원톱’ 분위기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반면 임명 직후 이 장관은 ‘정상회담’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다. 정상회담에 대해 청와대가 유보적 입장을 거듭 밝히던 당시 “정상회담 정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의 발언은 야당 등의 반발을 샀고, 이후 정상회담 문제는 정치쟁점화돼 도리어 발목을 잡는 형국이 연출됐다.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이 장관의 당시 언급에 대해 “뜬금없다”는 촌평을 날린 이유다.
2월 들어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정부 안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2005년 6월 공식 제의 이후 정상회담은 국정원 대북전략국 중심의 ‘공식라인’이 추진하고, 통일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 진행 상황이 보고되는 시스템이었다. 정동영-이종석 장관을 거치는 동안 줄곧 유지돼온 보고체계였다. 그러나 통일부 장관이 겸임하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이 안보실장에게 넘어가면서 정상회담 보고 책임은 김 원장에게 넘어갔다. 이 무렵 청와대는 두 차례에 걸쳐 이 장관에게 정상회담 발언과 관련한 ‘경고성 만류’를 전했다는 것이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이다.
대북정책 영향력이 더욱 위축될 것을 염려한 통일부 관계자들의 실망은 2·13합의가 나온 후 대북 쌀 지원 문제로 옮겨간다. 북핵 문제의 돌파구가 마련됐으니 지난해 미사일 발사 직후 중단된 쌀 지원을 재개해 통일부의 영향력을 복원하고 남북관계도 해빙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0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NLL(북방한계선)의 의제 포함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br> 8월21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이재정 장관의) 서해교전 발언은 저로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그림의 밑바탕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안보정책 운용에서의 기조 차이가 깔려 있다. 외교부가 ‘북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풀어야 하고, 남북관계 진전은 반걸음 뒤따라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통일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진전이 병행돼야 하고 북미관계가 교착할 경우에는 남북관계 진전이 이를 견인해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것.
이런 차이는 사실 단순한 부처 간의 주도권 싸움이 아니라 북핵 문제 해법을 두고 관련 전문가, 언론, 정부 내부를 막론하고 형성된 거대한 ‘생각의 차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마디로 북핵 문제를 푸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 그러나 출범 이래 노무현 정부의 인식은 전자에 가까웠고, 이는 지난해 핵실험 이후 좀더 극명해졌다. 이 무렵 송 장관으로 대표되는 외교부 라인이 안보정책 운용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7월 들어 상황이 급물살을 타면서 남북관계 진전을 애타게 기다리던 통일부의 시선은 이른바 ‘근본 문제’로 향했다. 북한이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 진전은 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거듭 밝혀온 국가보안법과 NLL 문제가 그것이다. 어떻게든 근본 문제에 손을 대야 한다는 주장이 통일부 주변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부 부처 팀플레이 붕괴 노출한 셈
결정적인 계기는 7월 말 장성급 회담에서 만들어졌다. 회담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7월19일 열린 청와대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이 장관과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이 ‘NLL 논의 가능성’을 거론하자, 김 국방장관이 이에 강하게 반발한 것. 7월 말 열린 장성급 회담이 첫날부터 NLL 문제를 두고 맞대결 양상을 보이자, 통일부 당국자들이 국방부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청와대와 통일부 일각에서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이 NLL과 관련해 비교적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국방부가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뒷말이 흘러나왔고, 장관 교체가 거론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후 8월 초 김 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돌아왔지만, 이 장관은 깊이 관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관 처지에서는 더욱더 속이 타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정상회담을 발판 삼아 통일부가 남북관계 진전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정상회담 준비기획단장을 맡아 공식 대외책임을 맡은 이 장관이 NLL 문제나 을지포커스렌즈(UFL) 훈련 등 타 부처 관할 업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나선 데는 이러한 ‘갑갑함’이 숨어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장관의 돌출 발언을 오로지 정책 방향 차이로만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부처 간의 견해 차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처럼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 장관 발언에서 그 행간을 읽어보면, 그가 발언의 청자(聽者)로 평양을 상정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장관 인사청문회 당시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질문에 “여기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즉답을 피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관계 진전의 주무 책임을 맡고 있는 통일부장관 내정자가 굳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통일부 관계자들은 “이종석 전임장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 전 장관이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쌀 지원을 중단하는 등 비교적 강도 높은 대응을 가해 평양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이 때문에 대북 업무 수행에 차질을 빚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해석이다.
이후 이 장관은 국방부와 군, 보수층의 ‘과도한 안보논리’를 막기로 자임한 듯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5월 “국민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성할 일”이라는 언급, 최근의 NLL 발언과 서해교전 발언은 모두 이런 일관된 흐름 위에 있다. 이 장관과 개인적인 인연이 깊은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이 장관의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주요 ‘전선’이 평양과 서울 사이가 아닌 남한 내부에 놓여 있다는 뜻이 된다. 남남 갈등이 먼저 해결돼야 남북 갈등도 해결 가능하다는 판단은 통일부나 진보적 시각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그의 발언을 통해 이 전선이 ‘정부 부처 사이에’ 그어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팀플레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나 군 처지에서 보면 NLL이나 서해교전은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이다. 내부적으로는 격론을 벌일 수도 있지만, 일단 외부로 드러나면 반박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조심성 없이 건드리는 이 장관의 최근 행보는 도리어 정부 내부의 논의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한 팀이라는 인식’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백 번 양보해 원칙적으로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문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장관 행보 盧心에 따른 것인가
이 장관이 정상회담의 실무준비 책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향후 상황은 더욱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NLL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것인지를 놓고 국방부와 통일부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수위는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 국방부 관계자들은 이 장관의 이런 움직임이 노 대통령과의 교감에 따른 것인지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NLL 문제를 논의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이 장관에게 ‘총대’를 메게 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다. “NLL은 정상회담이 아니라 장관급 회담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8월21일 김 국방장관의 발언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 장관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킨 후에도 통일부는 “NLL이 조금이라도 변경될 경우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국정브리핑’에 이 글을 기고한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장관의 핵심 측근이었고, 기고 자체도 장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과연 노 대통령은 이 장관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 리트머스 시험지는 ‘정상회담에서의 NLL 논의’ 여부가 될 것이고, 이제 시간은 한 달 남짓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