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동성애 축제인 프라이드의 퍼레이드 행사에 나선 사람들.
“글쎄, 만날 수 있을까?”
전화를 건 쪽은 나였지만, 후배의 제안에 대답이 영 신통치 않았다. 캐나다 최대의 동성애 축제인 프라이드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퍼레이드가 오후 2시에 시작되는데 그때 만나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지, 나도 참…. “볼 수 있으면 보자”는 누나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나는 시내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교통이 통제된 토론토 다운타운의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퍼레이드는 동성애자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처치 스트리트(Church St.)에서 출발해 북미 최장으로 알려진 영 스트리트(Young St.)의 토론토 다운타운 구간까지 두어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퍼레이드는 사흘 동안 열리는 프라이드 행사의 백미로, 각 나라를 대표하는 동성애자를 포함해 100만여 명의 인원이 참가하는 대형 이벤트다. 6월25일 개막된 제25회 행사에도 어김없이 그만큼의 사람들이 모였다.
북새통에 일행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사진 찍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니기를 한 시간, 저 멀리서 노랗고 빨갛고 파란 일렁임이 아주 느린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올해 퍼레이드에 참가한 단체는 총 147개, 참가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고 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동성애자일 리 없다. 선글라스를 투시경 삼아 진짜 게이, 진짜 레즈비언을 찾아내보려 했지만 감지되는 것은 그저 하루를 기발하게 연출하려는 ‘필부필부(匹夫匹婦)’들뿐. 편견으로 걸러질 차별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토론토의 프라이드 행사는 1978년부터 시작된 호주의 ‘게이·레즈비언 마디그라스’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나 규모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성적 소수자들의 퍼레이드는 일탈적이라는 특성에도 사회적인 비판을 넘어 그야말로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토론토 하버 풍경(왼쪽)과 도어스 오픈 행사 때 방문한 법원 건물의 내부 모습.
적잖이 바쁘고 다소 개인적이어서 적당히 무심한 토론토리안(Torontorian)들은 가족 단위로 흥겨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Just married’라고 쓴 피켓을 든 ‘신혼남남’의 행복한 키스에 휘슬 소리가 높아지고, 당당하게 소방관·경찰관 제복을 착용한 게이 커플에게 응원이 쏟아진다. 퍼레이드 대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토론토 시장 데이비드 밀러와 시의원들에게 쏟아지는 환영의 박수, 탱탱한 두 가슴을 드러내놓은 백설공주를 향한 환호성으로 토론토의 다운타운은 들썩였다. 캐나다 주요 기업들이 후원사로 참여하는 이 퍼레이드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광고판의 행렬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이 있다면 어디든 파고드는 자본주의의 덕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동성애 커플들도 좋고 이성애 관광객들도 좋은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건축물 공개하는 ‘도어스 오픈’과 방송국 CBC도 볼 만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에 머물렀던 지난 3개월 동안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가장 고대했던 행사였다. 기대했던 대로 볼거리가 많았으며, 도어스 오픈(Doors Open)은 특히 인상 깊었다.
도어스 오픈은 ‘예기치 않게 발견한 보석’이었다. 프라이드 퍼레이드보다 한 달 앞선 5월27~28일에 열린 제7회 도어스 오픈은 토론토에 있는 144개 주요 건축물을 공개하는 연례행사다. 역사적 명소뿐만 아니라 종교 시설, 친환경적인 ‘그린 빌딩’과 실험적인 디자인의 건축물까지 총망라하며 해마다 그 수를 늘려가고 있다. 행사 내용은 다분히 역사적이며 건축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지만 각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진행, 교육적인 행사 취지가 인상적이었다.
이 행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그날, 가방에 바나나 한 개와 생수통 하나를 넣고 토요일 오전의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 맞은편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걸까? 호기심에 그들에게 다가갔다가 도어스 오픈에 푹 빠져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도어스 오픈의 참가 과정은 온통 갈등의 연속이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은데 개방시간이 오전 10시에서 오후 4~5시로 제한돼 있었고, 또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이리저리 동선을 짜도 하루 3~4곳을 방문하는 것도 빠듯했다. 예약도 티켓도 없고, 그저 선착순으로 입장을 허용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을 피할 길이 없었다. 올해 행사에는 20만여 명이 참가해 역대 기록을 경신했다.
이 행사가 가져오는 관광 효과도 만만치 않다. 평소에는 입장료를 내야 하거나, 돈이 있어도 출입할 수 없는 곳들이 문을 활짝 열었으니 관광객들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환대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나의 캐나다 친구가 추천한 필수 방문지는 CBC(Canadian Broadcasting Centre)였다. 캐나다 최대 방송국인 CBC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스튜디오 일부와 녹음실 등을 개방하고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가이드 투어는 도어스 오픈 행사의 빛나는 부분이다. 각 기업체 혹은 관련 단체에 소속된 직원들이 직접 안내하기 때문에 궁금증을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 10~20분 정도의 짧은 투어지만 소수 인원만 입장시키기 때문에 혼잡하지 않다. 주말을 반납한 채 인파에 시달리며 자신이 근무하는 곳에 대해 설명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표정에서는 자부심이 배어 나온다. 사람들은 신대륙의 보잘것없는 짧은 역사를 쉬이 조롱하지만 그 역사를 보듬는 정성은 참으로 갸륵했다.
도어스 오픈 행사 이틀 동안 CBC 이외에도 노예해방을 비롯한 시민운동의 터전이었던 세인트 로렌스 홀(St, Lawrence Hall), 지금은 호텔로 쓰이는 원 킹 웨스트(1 King West) 옛 도미니언 은행(Dominion Bank) 건물, 1899년 세워져 현재 법원으로 사용 중인 옛 시청사, 토론토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자리 잡은 신 시청사 등을 둘러보았다. 이 중에는 이미 방문해본 곳도 있었지만, 나 혼자 보는 것과 식견 있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보는 것이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는지 새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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