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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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은 내 포승줄을 받으시오

사흘 머물며 임무 완수한 강림 이승 귀환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형벌로 과양상이 응징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4-05-13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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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라대왕은 내 포승줄을 받으시오

    무시무시한 열 시왕(十王) 중의 한 명인 제2 소간왕으로 추측된다. 머리가 다섯에 뱀 꼬리가 있으며,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있다. 조선시대 무신도첩 당사주책(唐四柱冊)의 한 부분.

    이승과 저승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삶의 문제가 죽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삶의 문제는 이인칭이나 삼인칭의 문제가 아니라 일인칭인 ‘나’의 문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삶’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신화는 우리에게 ‘저승 이야기’를 통해서 어릴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가르친다.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안다는 것은 사는 법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늘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삶은 축복이 아닐까, 환희가 아닐까?

    우리 신화의 강림은 이승과 저승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강림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늘 이판사판으로 사는 자의 ‘호탕함’과 ‘연연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 강림이 어떻게 염라대왕을 잡아오는지 구경해보자.



    그 힘 그 배짱 쓸 만하구나

    강림이 저승문 앞에 적배지를 붙여놓고, 연주문 기둥에 망건을 벗어 머리에 베고 누운 채 배짱 좋게 염라대왕 나오기를 기다린다.

    저승문 앞에서 꼬박 이틀을 기다리자 천둥 번개 치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승문이 열리더니 앞에는 영기, 뒤에는 기류를 세우고 삼만관숙 육방하인이 길을 비키라고 외치면서 연주문을 나온다. 첫 번째 가마가 넘어가더니 두 번째 세 번째 가마가 넘어가고, 네 번째 가마가 넘어가더니 열두 사자를 앞세운 다섯 번째 가마가 멈칫 서면서 무섭게 호령한다.

    “연주문에 붙인 적배지가 어떤 적배지냐?”

    이원사자가 큰 소리로 말하자,

    “이승 강림이가 저승 염라대왕을 잡으러 온 적배지입니다.”

    그때 강림이 염라대왕이 타고 있는 가마 앞으로 내달려가 붕어 눈을 부릅뜨고 배에 잔뜩 힘을 실어 소리친다.

    “염라대왕은 포승을 받으시오.”

    “감히 어떤 놈이 길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난데없는 방해꾼에 염라대왕이 노하여 천둥 번개를 부르니, 세상이 캄캄해지고 천지가 요동을 한다. 강림이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쿵더쿵 겁이 덜컥 솟는다. 하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 죽을 힘을 다해 열두 사자를 메다꽂은 뒤 세 신선이 준 홍사줄로 염라대왕이 탄 가마를 휘휘 묶는다.

    “저승에 관장(官長)이 있으면 이승에도 관장이 있는 법. 아무리 저승 관장이라 해도 이승 관장 명령도 들어야 합니다.”

    염라대왕, 그 배짱이 쓸 만한지라. 그도 그럴 것이 산 자가 저승의 열두 사자를 메다꽂으니 그 힘이 쓸 만하고,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염라대왕 앞에서 큰소리를 쳐대니 그 배짱 한번 쓸 만하다.

    “넌 누구냐?”

    “이승에서 온 강림이오.”

    “용맹이 있어서 좋다마는 지금은 심복장자네 집 아기씨가 큰 병 들어 시왕맞이굿을 하며 나를 청하는 중이니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자.”

    “그것도 좋습니다.”

    굿판에 들어서니 시왕맞이하던 신녀가 염라대왕을 청해 음식과 술을 바친다. 염라대왕 말하기를,

    “내가 받은 술 한잔 하시게나.”

    강림이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는 술에 만족하여 잔칫상에 쓰러져 잠자다 깨어보니 염라대왕 온데간데없구나. 강림이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없던 나무기둥이 보이는지라 강림이 이를 눈치채고 묻기를,

    “이 집은 누가 지었느냐? ”

    “강태공 서목수가 지었습니다.”

    “불러오시오.”

    강림 앞에 불려온 강태공 서목수에게 강림이 기둥을 몇 개 세웠느냐고 물으니,

    “여든여덟 개를 세웠습니다. 이 기둥, 이 기둥은 내가 세웠습니다마는 저 기둥은 내가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톱 소톱 가져와 그 기둥을 자르시오.”

    실금실작 설컹설컹 톱질을 하니 혼비백산한 염라대왕이 부엉이로 변신하여 큰 대 위를 날아오른다. 이에 질세라 매로 변신한 강림이 날아올라 날개로 덮치니 염라대왕이 이번에는 쉬파리가 되어 집구석으로 피했겠다. 거미로 변신한 강림이 거미줄을 쳐서 파리 다리를 옭아매니 염라대왕이 꼼짝없이 붙들린다.

    우리 고전소설 ‘전우치전’에 나오는 강림은 모든 거지들을 모아 저잣거리를 다니며 양식을 빌어먹고 세상을 주유한다. 그 강림이 ‘손을 들어 한번 구름을 가리키니 구름 문이 절로 열리는’ 신기한 도술, 전우치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뛰어난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전우치가 “소생이 눈은 있으나 망울이 없어 선생을 몰라뵈었다”고 사죄하고 누군지 알려달라고 물으니, “나는 강림도령이되, 세상을 희롱코저 두루 다니노라” 하였다. 세상을 희롱코저 다닌다는 강림의 술법이고 보니, 염라대왕조차도 한 수 아래로 접어둘밖에!

    염라대왕은 내 포승줄을 받으시오

    염라대왕이 죽은 이의 사전 행적을 적어두는 장부인 ‘염마장’을 두 손에 들고 호랑이를 타고 있는 남자. 조선시대 조각이다.

    염라대왕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동안 너를 시험해본 것이니라. 그만하면 네 청을 들어줄 만하구나. 먼저 가 있으면 모레 사오시에 내가 원으로 찾아가마.”

    “그러면 징표라도 써주시오.”

    강림을 돌려앉힌 뒤 염라대왕이 강림이 등에 임금 왕(王) 자를 새겨준다.

    저런 졸부가 날 불렀느냐?

    염라대왕에게 약속을 받은 강림이 이승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길을 알 수가 없다.

    “올 때는 내 마음대로 왔으나 갈 때는 내 마음대로 갈 수가 없으니 저승길을 알려주시오.”

    염라대왕은 앞발이 없는 흰 강아지 한 마리를 내주며 “이 강아지가 가는 대로 따라가면 알 도리가 있을 것”이라 한다.

    앞서 걷던 흰 강아지가 헹기못에 당도하니 갑자기 달려들어 강림의 목을 물고는 헹기못으로 풍덩 빠진다. 살아 있는 사람 꿈꾸다 깨듯이 강림이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이승이로다.

    이때 흰 강아지가 강림의 목 앞쪽을 물었기 때문에 남자는 목 앞에 뼈가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강림이 이승을 오고 보니 어느 마을이 어느 마을인지 구별이 안 되는구나. 갈 길을 몰라 북방을 바라보니 불빛이 보인다. 강림이 불빛을 쫓아 찾아간 곳이 강림의 큰부인 집이라.

    강림의 큰부인은 강림이 저승 가서 삼년상 첫 제사가 돌아오니 문 앞에 섰구나.

    “설운 낭군님, 살았으면 하루바삐 돌아오고 죽었으면 길일 제사 많이 받아가시구려.”

    그때 강림이 대문 밖에서,

    “먼길을 넘어가는 사람인데 하룻밤 묵어갑시다.”

    “오늘 밤은 묵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인 일로 그렇습니까?”

    “우리 집 낭군이 저승 가 삼년상 첫 제사가 되는 날입니다.”

    “내가 바로 강림이오.”

    “우리 낭군 강림이가 살아 있을 리 없습니다. 뒷집 김서방이거든 다음날 다시 오시오.”

    “아니, 내가 강림이란 말이오. 날 못 알아보시겠소.?”

    “그러면 관대 섶 한쪽을 내보이십시오. 그러면 알 도리가 있습니다.”

    강림이 관대 섶 한쪽을 내보이니 본메본짱으로 저승 갈 때 귀 없는 바늘 한 쌈을 꼽은 게 삭아 오도독 부러진다.

    염라대왕은 내 포승줄을 받으시오

    피바다를 건너 저승으로 가는 혼들과 죄 많은 혼들을 징치하는 저승의 시왕 가운데 하나를 그린 그림. 조선시대 무신도첩 당사주책의 한 부분

    “낭군님이 확실하구나.”

    문을 열어 강림이를 맞이하여 방으로 들어가니 제사상이 차려져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낭군님, 저승 가 삼년상 첫 시제가 됩니다.”

    “나는 저승에서 사흘을 살았는데 이승은 삼년이 지났구려.”

    ‘저승의 하루가 이승의 1년’이라는 것이 바로 저승의 시간법칙이다. 얼마나 오묘하고 재미있는 법칙인지 잘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를 1년에 한 번 지낸다. 그러면 우리는 1년에 한 번 부모님을 추억하고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저승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은 매일매일 자식들을 만난다. 이승의 1년은 저승의 하루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1년마다 만나뵙지만 저승에 계신 부모님은 매일매일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화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법칙이며 이승과 저승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공간의 오묘한 사이클이다.

    그날 밤 강림이가 사랑을 풀고 큰부인하고 누었더니, 강림의 큰부인 삼년상 첫 시제만 지나면 영영 살아보자 하던 뒷집 김서방이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 망근 벗어 걸려 있고 관대 벗어 걸려 있으니까 원님에게 달려가,

    “강림이 저승 가 염라대왕 잡아오겠다고 하고서는 낮에는 병풍 뒤에 숨어서 살림하고 밤에는 병풍 밖에서 부부간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원님이 날래게 박파도를 불러세워,

    “당장 가서 강림이를 잡아오라.”

    박파도가 강림이를 잡아서 관헌으로 끌고 오니 원님이 말하되,

    “어느 것이 염라대왕이냐?”

    “내일 사오 시에 염라대왕이 오실 것입니다.”

    “좋다. 그때까지 강림이를 하옥하라.”

    강림이 옥 안에 가두어두고, 다음날 사오시가 돼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김치원이 강림이를 끌어내라고 호통을 치는 순간 천지가 요동을 하며 깜깜해지더니 바람이 크게 불어 잠긴 문들이 저절로 열리면서 좁은 목에 벼락치듯 염라대왕이 관헌 마당에 들어서 호령한다.

    “누가 나를 불렀느냐?”

    겁이 난 김치원은 기둥 뒤로 숨어 벌벌 떨며 나오지 못한다.

    “저런 졸부가 나를 불렀느냐. 강림이는 어디 갔느냐?”

    강림이 불려나와 사정 이야기를 하니 염라대왕은 과양상이를 불러오도록 한다.

    “애기 낳으면서 공이 들었느냐?”

    “이를 말씀입니까?”

    “애기 죽으니 어떻더냐?”

    “애가 아픕디다.”

    “아이들은 어디 묻었느냐?”

    “큰놈은 앞밭에 묻고 샛 놈은 뒷밭, 작은놈은 옆밭에 묻었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아들들 뼈라도 있느냐 없느냐. 가서 생빈눌을 파보자. 아무도 손대지 말고 과양상이 네 손으로 무덤을 헤쳐보아라.”

    아니나 다를까. 과양상이가 세 밭의 묘를 다 파헤쳤는데도 시체는 없고 칠성판만 있구나.

    “괘씸한 년! 범을황제의 아들 삼형제 돈을 털어먹고 죽이지 아니하였느냐? 그게 네 아들로 아느냐? 범을황제 아들로서 너한테 공 갚으러 온 거다.”

    염라대왕이 사람들을 까치못에 데려간다. 염라대왕이 금풍채로 까치못을 삼세번 후리니 까치못이 바짝 말라서 물기가 없는 마른 먼지가 나온다. 범을황제의 죽은 아들 시체는 뼈만 살그랑이 남아 있었다. 흩어진 뼈들을 모아 염라대왕이 금풍채로 삼세번 후리니 삼형제가,

    “아이고, 봄 잠이라 늦게 잤습니다.”

    벌떡 일어나니 염라대왕 과양상이를 불러다,

    “저기 보이는 아이들이 너희 아들 삼형제냐?”

    “예. 우리 아들 삼형제랑 똑같습니다.”

    범을황제 아들 삼형제가 칼 받으라, 활 받으라 죽일 판으로 들어가니 염라대왕이 말하되,

    “원수는 내가 갚아주마. 부모님을 어서 찾아가라.”

    그때서야 과양상이가 죄를 실토하니 염라대왕이 호령하며,

    “네 아들 죽는 것은 애가 아프고 남의 아들 죽이는 것은 즐겁더냐?”

    염라대왕은 아홉 마리의 소와 일곱 명의 장정을 불러서 과양상이의 몸을 묶고 아홉 가닥으로 찢어 죽이도록 했다.

    저승법은 맑다고 하였다. 과양상이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 과양상이는 이승법 아래서는 떵떵거리며 잘살았다. 그러나 기어코 자신의 욕심을 잊지 못해 저승의 관장을 불러내고야 만다. 이승을 대표하는 관장이 김치원이라면, 저승을 대표하는 관장은 염라대왕이다. 세 형제를 토막 살인한 과양상이는 결국 아홉 가닥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의 그 법으로.

    이때 보복의 정당성은 힘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저승법이 맑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힘없는 자들을 위한 보호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즉, 힘있는 자들의 폭력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없고 똑같은 수준의 폭력을 되돌려받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힘있는 가해자가 다시 복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양상이로 대표되는 현실의 강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저승법의 본래 의미가 있었다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고대의 ‘저승법’은 오늘날 신화로서 여전히 살아 있다. 정의의 첫 출발점으로서 말이다.

    자, 과양상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저승 본풀이 두 줄기 중 한 줄기인 강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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