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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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뛰어넘은 ‘전방위 울트라맨’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막강 영향력 과시 … 기성문화에 대한 ‘전복’의 에너지 발산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입력2004-10-20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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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음악 뛰어넘은 ‘전방위 울트라맨’
    구미에서는 비틀즈가 활약한 1960년대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물론 비틀즈를 추앙한 젊은이들이었다.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 전쟁 반대를 선언했고 음악과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무조건의 사랑과 평화를 역설했다. 이들의 주장은 곧바로 당시 젊은이들의 행동강령이 되었고, 비틀즈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60년대적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가수들이 있다. 40년간 국민의 심금을 울려온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작은 거인’ 조용필, 그리고 90년대의 서태지와 2000년대의 god까지…. 이 이름들 중에서 서태지가 특별한 건 ‘문화 대통령’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그가 ‘뛰어난 가수’를 넘어 한 시대의 상징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음악적으로 볼 때 가요계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모든 것이 바뀌었다. “80년대 초에 나온 조용필이 그때까지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계를 팝으로 전환시킨 것처럼, 90년대 초 서태지는 랩으로 신세대 음악패션을 주도하기 시작했다.”(팝 칼럼니스트 이효영)

    서태지는 당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장르라고 여겨졌던 랩뮤직을 한국적으로 소화하는 데 성공, 이후 각종 음악 관련 차트에 트로트 가수가 발을 못 붙이게 했음은 물론, 발라드와 트로트가 지배하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댄스뮤직을 주류로 끌어올렸다.

    그가 처음 선보인 랩과 힙합 댄스는 신세대들의 새로운 감성과 욕망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그때까지 수동적인 음악 청취층이던 10대를 능동적인 음반 구매층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10대가 음반시장의 주력으로 자리잡은 것을 비롯해 신세대가 모든 문화와 소비행태의 주도권을 쥐면서 사회 전반이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의 신세대론은 서태지 데뷔 이듬해인 93년부터 홍수를 이루게 되는데, 이와 함께 이들을 상대로 한 마케팅 또한 지금껏 식을 줄 모르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서태지의 음악과 춤 그리고 패션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서태지는 음악뿐 아니라 패션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힙합패션·치마바지·스노보드룩·빨간머리 염색 등으로 바뀌어간 그의 스타일은 신세대들이 가장 모방하고 싶어하는 유행 형식의 원본에 해당되었다. 심지어는 은퇴 선언 후 5년 만에 돌아온 서태지가 입었던, 검은 바탕에 흰색 Y자 무늬가 새겨진 구치 스웨터가 동대문표 ‘짜가’까지 만들어내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는 서태지에 대해 “하나의 대중음악인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전방위 파워맨”이라고 평가한다. 서태지는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가 동시에 가장 강력한 파급력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투사이자 아티스트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시대가 ‘재미’와 ‘사상’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는 대중문화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저항적 대중음악으로서의 ‘록’을 대중화했고,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손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확실한 수요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사람이 바로 서태지였다.

    서태지의 이런 음악적 경향은 이제 TV 가요의 주류 경향으로까지 자리잡았다. 잠적과 깜짝 컴백, 견고한 컨셉트의 뮤직비디오 제작, 신비주의 전략 등 서태지가 시작한 마케팅 방식 또한 업계의 규범으로 정착된 지 오래다. 그러나 주류적 상업주의와 저항적 록 정신을 동시에 견지하고자 했던 서태지가 사라진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그가 남겨놓은 두 개의 화두 가운데 앞의 것만이 활개치는 아수라판으로 달려갔다.

    “서태지 은퇴 이후 한국 가요계는 철저한 기획 위주의 10대 아이들(Idol) 스타의 난립으로 점철되었다. 신세대의 실험성과 참신함은 서태지의 은퇴와 함께 날개를 접었다.”(음악평론가 강헌)

    90년대 서태지로 상징되는 신세대 문화는 그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동시에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성문화에 대한 ‘전복’의 에너지는 결국 기성사회가 만들어놓은 소비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평론가 변정수씨는 “90년대는 없다”고까지 진단한다.

    “신세대 스타일을 통한 저항과 그 저항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서태지가 90년대 대중문화의 한 상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엔 ‘저항성’과 ‘상업주의’라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런 이중성은 2000년대 대중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옛것은 갔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서태지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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