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1

2008.11.18

모던보이와 신여성의 비극적 스캔들

왕상한의 ‘왕성한 책읽기’

  • 왕상한 서강대 법학부 교수·‘TV 책을 말하다’ 진행자 shwang@sogang.ac.kr

    입력2008-11-13 17: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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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던보이와 신여성의 비극적 스캔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이철 지음/ 다산초당 펴냄/332쪽/1만3000원

    영화 ‘모던보이’를 봤다. 컴퓨터그래픽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한 1930년대 경성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양’ 땅 위로 들어선 신문물의 풍경, 동양과 서양이 어우러진 영화 속 ‘경성’은 묘한 낭만을 불러일으켰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자칭 ‘낭만의 화신’인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 분)은 이러한 경성 분위기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조선인이 독립운동가로 살았을 것 같은, 아니 살아야만 했을 것 같은 당시에 오직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었던 모던보이. 그러나 결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해명의 복장과 취미, 애정행각은 영화 상영 내내 나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그의 생활을 더 파헤치고,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해명의 모던보이로서의 삶을 짧게 묘사하는 데 그쳤다. 못내 아쉬웠다.

    영화를 본 뒤 곧장 서점을 찾았다. 올 초 ‘경성’을 소재로 한 책이 잇따라 출간된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이 책 저 책 둘러본 끝에 한 권을 손에 넣었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이라는 책이었다.

    책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신여성)의 치명적 사랑을 파헤치며 1920~30년대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연애사를 통해 역사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작업임이 틀림없다.

    저자는 당시 경성이 연애의 시대였다고 밝힌다. 지금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어가 됐지만 사실 ‘낭만’ ‘연애’ ‘사랑’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한반도 땅에서 쓰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가 돼서 우국충정 개념을 벗어난 개인 간의 우정이 나타났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늘 꿈꾸며, 바라 마지않는 ‘낭만적 연애’는 개화기 최대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급진적 개화는 부작용 또한 가져왔다. 잇따른 정사(情死) 사건과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비참한 최후가 뒤따른 것이다. 이 책에서 집중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부작용적 연애’다.



    책은 유명한 가요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이자, 연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을 비롯해 전통적 여성의 정조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조관념을 주장한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 카페 여급 김봉자와 의사 노병운의 동반자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살해한 절세미녀 김정필, 철도로 뛰어든 경성의 동성연애자, 조국의 독립과 혁명운동 속에서 피어난 비극적 사랑 등 11개의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스캔들의 중심에 선 주인공들이 당시 사회를 이끈 문화예술인과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역사서와 기타 도서에서 예술작품과 업적으로 만난 이들의 이면을 보는 재미는 생각보다 크다. 또 개화와 함께 들어온 일본 문화 ‘연인 동반자살(정사)’의 유행으로 당시 한강 다리는 동반자살을 꿈꾸는 연인들로 가득했다고 하니, 그들이야 심각했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웃음이 피식 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눈길을 끈 것은 저자의 글 중간 중간, 그 애정사건을 다룬 신문과 잡지 기사가 풍부하게 인용된 점이다. 특히 이런 사건을 다룬 매체가 당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교과서에서 듣던 주요 문예지와 잡지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매체들은 모던보이와 신여성의 애정행각과 정사를 집중 보도했고 문예지들은 정조관념과 애정 편지를 담은 글을 실었다. 이런 모습에서 당시 사회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연애의 시대’였던 것이다.

    1920~30년대 경성은 우리가 생각하듯 우울한 식민지를 살아가는 초라한 청춘들의 도시가 아니다. 일제 침략과 대항이라는 역사적 대의만이 청년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그 속에 사랑이 있었다. 인간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낭만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을 넘나들며 공부하고, 고민하며, 꿈꾸는 세계인이었다. 새로운 문물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향해 발언하고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평등한’ 연애의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유독 비극의 주인공은 여성이었고, 사람들은 여성에게만 비판의 칼을 세워댔다. 자유연애를 갈망하던 여인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질타를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초라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연애를 갈망했지만 아직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개화기’ 사회 탓이었을 것이다. 한편 당시나 지금이나 같은 점이 있다. 이들의 연애를 비극에 이르게 한 것이 갖가지 소문과 이를 실어나른 황색언론이었다는 점이다.

    미래의 어느 날, 2000년대 사회가 보여준 사랑의 풍속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과연 어떤 ‘연애사건’을 취합하게 될까, 또 어떻게 묘사될까. 책을 덮으며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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