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7

2008.10.21

기획 제작 ‘축제’는 공허할 뿐이다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8-10-15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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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제작 ‘축제’는 공허할 뿐이다

    영화 ‘흑인 오르페’(왼쪽), ‘축제’의 한 장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 사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마르셀 카뮈 감독의 영화 ‘흑인 오르페’. 195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가 신화의 비극성을 잘 살릴 수 있었던 데는 광란의 축제를 배경으로 삼았던 것이 한 이유가 됐다. 바로 리오 카니발이다. 리오 카니발을 구경하러 온 전차운전사 오르페와 사랑에 빠진 에우리디케에게 닥친 죽음은 영화 내내 계속되는 격렬한 음악과 춤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리오 카니발은 지상 최대의 축제로 불리는 ‘축제의 왕’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당시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사람들의 사순절 축제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음악과 춤이 합쳐져서 생겨난 삼바는 리오 카니발을 통해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

    지금 한국에는 리오 카니발과 리오 카니발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바로 지역 축제를 개최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다.

    ‘한국에는 축제가 없다’고 한 것은 이제 옛말이다. 지방자치제 후 자기 고장을 알리고 관광수입을 올릴 목적으로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축제를 벌이고 있다. 1년이면 전국에 1000개가 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특히 나들이하기 좋은 10월이 축제의 대목이다. 이 달에 열리는 축제가 전국적으로 3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축제의 달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양적인 증가에도 몇몇 성공사례를 제외하고는 합격점을 받을 만한 축제가 많지 않다고 한다. 지역만 다를 뿐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어서 개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체로 관청이 주도해 만든 급조품의 공통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만든 것도 아니고,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지도 않은 축제인 것이다.

    축제는 일탈과 해방이다. 일상의 긴장과 절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은 축제를 만든다. 축제 중에 사람들은 평소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카니발’의 어원에도 일상의 부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 삶과 역사, 애환 담겨야 진짜 축제

    그러나 삶의 자리에서 동떨어진 축제는 공허하다. 축제는 일상의 일탈과 전복이지만 그 전제에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 애환이 있어야 한다. 현실의 삶에서 비롯된 일탈과 전복이어야 공허하지 않다. 공무원들이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 기획 제작한 축제 상품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긴 힘들다.

    얼마 전 작고한 작가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임권택 감독의 ‘축제’는 축제 얘기가 아니다. 영화는 죽음을 다룬다. 영화에서 죽음은 일종의 축제와도 같다. 장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그려진다. 그런 만남과 대화, 성찰이 오가기에 ‘죽음은 진정 축제’라고 작가와 감독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자면 어디 죽음만이 축제일까. 굳이 축제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축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어떤 게 축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먹고 떠드는 놀자판에 흥청망청판, 그것이야말로 정말 축제답지 않은 것이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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