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전 위·오·촉의 패권다툼을 재현하듯 ‘아시아 축구 제왕’ 자리를 놓고 한국과 일본, 중국이 벌이는 쟁탈전이 월드컵 속의 월드컵으로 열기를 뿜고 있다. 근대적 개념의 축구가 아시아에 들어온 지난 한 세기 동안 한·중·일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적대적 라이벌이자, 세계 축구로의 도약을 노리는 선의의 동반자로 존재했다. 월드컵 72년사(史) 최초로 아시아 무대에서 치러진 월드컵에서 사상 첫 ‘동반 본선행’에 나선 한·중·일. 이들이 펼치는 신삼국지(新三國志)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다. 1956, 60년 아시안컵 제패, 1954년 스위스대회를 시작으로 한 월드컵 본선 아시아 최다 진출(6회) 등 지난 궤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아시아 최강자였다.
프로리그가 축구 발전 원동력
반면 일본에게 한국은 높디높은 산이었다. 사상 첫 본선 진출을 이룬 98년 프랑스 월드컵 전까지 일본은 번번이 한국의 벽에 막혀 지역예선 탈락이란 쓴 잔을 마셔야 했다. 특히 94년 미국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카타르 도하 사건’은 한국에겐 ‘기적’이었지만 일본에겐 ‘악몽’ 그 이상이었다. 중국도 마찬가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외치는 13억 중국인들에게 한국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한증(恐韓症)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한국을 만나면 지레 겁부터 먹곤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한국을 정점으로 유지되던 아시아의 판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은 오랜 경쟁과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 그리고 아낌없는 투자로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사상 첫 1승을 거두며 오랜 목마름을 해갈했다. 16강 진출도 꿈이 아닌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중국은 코스타리카, 브라질에 연패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지만 중국 축구의 미래는 밝다. 이처럼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 3국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기대주로 훌쩍 커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국가대표의 전력은 그 나라 프로리그 수준이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1983년 3국 중 가장 먼저 프로리그(K리그)를 출범시켰다. 당시 혼란한 국내 정세 속에서 ‘준비되지 못한 K리그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출범 초기 참가팀이 고작 프로 2팀, 아마추어 1팀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의 ‘인재풀’로서 K리그는 한국 축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으며 ‘32년 만의 쾌거’를 일궈낸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아마추어-프로로 이어지는 체계적 시스템 구축과 축구문화의 성숙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에 비해 일본과 중국은 철저한 준비 끝에 프로리그를 탄생시켰다. 89년 프로리그 창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일본은 4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93년 J리그를 띄운다. 중국도 장기 발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 유럽 등의 프로리그를 벤치마킹해 94년 C리그 첫 출항의 뱃고동을 울린다.
현재 K리그 참가팀은 10개. J리그와 C리그는 각각 16개, 15개 클럽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인정하는 프로리그 규모는 참가팀 12개 이상. 더욱이 J리그와 C리그의 경우 1, 2부 승격과 강등이 존재하는 디비전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어 한국 축구의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나란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국은 공통점이 있다. 대표팀 사령탑을 외국인 감독에게 맡겼다는 것.
한·중·일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인 감독이나 선진축구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 동양 특유의 ‘우리’라는 사고관과 축구계 내부의 반발이 원인. 하지만 90년대 이후 ‘공격과 수비의 통합’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압박’으로 대변되는 세계 축구 흐름 또한 아시아 축구의 환골탈태를 요구한다.
한국을 살펴보자. 68년 서독의 크라우천, 71년 잉글랜드의 애덤스 코치에게 대표팀 지도를 맡겼던 한국은 90년 독일인 크라머, 94년 우크라이나 출신의 비쇼베츠 등에게 올림픽 대표팀을 맡긴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대표팀만은 한국인 감독의 몫이었다.
68년 크라머 감독을 사령탑으로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일본은 92년 네덜란드 출신의 오프트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해 세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문물을 받아들인다.
중국도 94년 독일의 살라프네트에 이어 98년 후튼(독일), 2000년 밀루티노비치(유고) 등 세계적 명장으로 불리는 외국인 감독을 중용하며 ‘제2의 문화혁명’을 노리고 있다.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한국), 필리프 트루시에(프랑스/ 일본), 보라 밀로티노비치(유고/ 중국)는 변화하는 아시아 축구의 상징인 것이다.
외국인 감독들이 한·중·일 축구에 몰고 온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다. 이들은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재능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탈락하는 ‘녹다운식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한국의 고종수 이동국과 일본의 나카무라 순스케 등이 탈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상상력 넘치는 즐거운 축구를 강조한다. 틀에 박힌 플레이와 고정화된 전술로는 전력극대화에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승리와 결과에 대한 집착’이나 ‘강압적 주입식 지도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선진축구의 흐름을 따라잡는 것이다. 현대축구의 특징은 최전방 공격라인과 최후방 수리라인의 폭을 최대한 좁혀 미드필드 진영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하는 것이다. 이는 빠른 공수전환을 가능케 해 전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또 하나 3국의 공통점은 스위퍼 시스템의 폐기. 최종 수비수 1명이 뒤로 처지고 2명 이상의 스토퍼가 상대 스트라이커를 마크하는 수비방식 대신 ‘일(一)자 형태’를 유지한 채 지역방어와 맨마킹을 혼합하는 수비시스템으로 변화를 꾀했다. 특정 공격수가 아닌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상대를 막기 위해서는 골잡이 한두 명의 마크가 아닌 존(Zone) 개념을 통한 지역 협력수비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10여년 동안 홍명보로 대표되던 스위퍼 시스템을 버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시아 축구는 분명 변화하고 있다. 그 선두에 한국과 일본, 중국이 있다. 이들 3국은 선진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 중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난 한 세기의 경쟁. 또다시 맞이한 새 세기. 마지막에 웃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신삼국지의 후속편이 기대된다.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다. 1956, 60년 아시안컵 제패, 1954년 스위스대회를 시작으로 한 월드컵 본선 아시아 최다 진출(6회) 등 지난 궤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아시아 최강자였다.
프로리그가 축구 발전 원동력
반면 일본에게 한국은 높디높은 산이었다. 사상 첫 본선 진출을 이룬 98년 프랑스 월드컵 전까지 일본은 번번이 한국의 벽에 막혀 지역예선 탈락이란 쓴 잔을 마셔야 했다. 특히 94년 미국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카타르 도하 사건’은 한국에겐 ‘기적’이었지만 일본에겐 ‘악몽’ 그 이상이었다. 중국도 마찬가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외치는 13억 중국인들에게 한국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한증(恐韓症)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한국을 만나면 지레 겁부터 먹곤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한국을 정점으로 유지되던 아시아의 판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은 오랜 경쟁과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 그리고 아낌없는 투자로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사상 첫 1승을 거두며 오랜 목마름을 해갈했다. 16강 진출도 꿈이 아닌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중국은 코스타리카, 브라질에 연패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지만 중국 축구의 미래는 밝다. 이처럼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 3국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기대주로 훌쩍 커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국가대표의 전력은 그 나라 프로리그 수준이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1983년 3국 중 가장 먼저 프로리그(K리그)를 출범시켰다. 당시 혼란한 국내 정세 속에서 ‘준비되지 못한 K리그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출범 초기 참가팀이 고작 프로 2팀, 아마추어 1팀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의 ‘인재풀’로서 K리그는 한국 축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으며 ‘32년 만의 쾌거’를 일궈낸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아마추어-프로로 이어지는 체계적 시스템 구축과 축구문화의 성숙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에 비해 일본과 중국은 철저한 준비 끝에 프로리그를 탄생시켰다. 89년 프로리그 창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일본은 4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93년 J리그를 띄운다. 중국도 장기 발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 유럽 등의 프로리그를 벤치마킹해 94년 C리그 첫 출항의 뱃고동을 울린다.
현재 K리그 참가팀은 10개. J리그와 C리그는 각각 16개, 15개 클럽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인정하는 프로리그 규모는 참가팀 12개 이상. 더욱이 J리그와 C리그의 경우 1, 2부 승격과 강등이 존재하는 디비전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어 한국 축구의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나란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국은 공통점이 있다. 대표팀 사령탑을 외국인 감독에게 맡겼다는 것.
한·중·일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인 감독이나 선진축구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 동양 특유의 ‘우리’라는 사고관과 축구계 내부의 반발이 원인. 하지만 90년대 이후 ‘공격과 수비의 통합’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압박’으로 대변되는 세계 축구 흐름 또한 아시아 축구의 환골탈태를 요구한다.
한국을 살펴보자. 68년 서독의 크라우천, 71년 잉글랜드의 애덤스 코치에게 대표팀 지도를 맡겼던 한국은 90년 독일인 크라머, 94년 우크라이나 출신의 비쇼베츠 등에게 올림픽 대표팀을 맡긴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대표팀만은 한국인 감독의 몫이었다.
68년 크라머 감독을 사령탑으로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일본은 92년 네덜란드 출신의 오프트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해 세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문물을 받아들인다.
중국도 94년 독일의 살라프네트에 이어 98년 후튼(독일), 2000년 밀루티노비치(유고) 등 세계적 명장으로 불리는 외국인 감독을 중용하며 ‘제2의 문화혁명’을 노리고 있다.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한국), 필리프 트루시에(프랑스/ 일본), 보라 밀로티노비치(유고/ 중국)는 변화하는 아시아 축구의 상징인 것이다.
외국인 감독들이 한·중·일 축구에 몰고 온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다. 이들은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재능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탈락하는 ‘녹다운식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한국의 고종수 이동국과 일본의 나카무라 순스케 등이 탈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상상력 넘치는 즐거운 축구를 강조한다. 틀에 박힌 플레이와 고정화된 전술로는 전력극대화에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승리와 결과에 대한 집착’이나 ‘강압적 주입식 지도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선진축구의 흐름을 따라잡는 것이다. 현대축구의 특징은 최전방 공격라인과 최후방 수리라인의 폭을 최대한 좁혀 미드필드 진영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하는 것이다. 이는 빠른 공수전환을 가능케 해 전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또 하나 3국의 공통점은 스위퍼 시스템의 폐기. 최종 수비수 1명이 뒤로 처지고 2명 이상의 스토퍼가 상대 스트라이커를 마크하는 수비방식 대신 ‘일(一)자 형태’를 유지한 채 지역방어와 맨마킹을 혼합하는 수비시스템으로 변화를 꾀했다. 특정 공격수가 아닌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상대를 막기 위해서는 골잡이 한두 명의 마크가 아닌 존(Zone) 개념을 통한 지역 협력수비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10여년 동안 홍명보로 대표되던 스위퍼 시스템을 버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시아 축구는 분명 변화하고 있다. 그 선두에 한국과 일본, 중국이 있다. 이들 3국은 선진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 중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난 한 세기의 경쟁. 또다시 맞이한 새 세기. 마지막에 웃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신삼국지의 후속편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