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서 불호령을 내뿜으며 칼날 같은 카리스마로 100여명 단원을 휘어잡는 ‘총사령관’.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다. 일사불란한 앙상블과 일체감을 중시하는 구(舊)공산권 지휘자에게서 이런 이미지는 더 강하게 다가온다.
8월18일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 단원 132명과 함께 서울을 찾은 이 악단의 책임지휘자(상임지휘자격) 김병화씨(64). 그는 북한 지휘계 1세대로 국가를 대표하는 악단의 앙상블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권 지휘자상과 달리 그는 순수과학을 전공한 노학자처럼 소박한 느낌과 수줍음마저 언뜻언뜻 내비치는 음악가였다.
그는 1960년대 ‘귀국선’을 탄 이른바 ‘귀환동포’ 출신.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1960년 귀국, 평양음악무용대학 지휘과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1964년부터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를 맡았고, 1969년에는 33세 나이로 국립교향악단 책임지휘자가 돼 북한 지휘계의 정상에 올랐다.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가극과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등이 모두 그의 지휘로 초연된 작품들.
여기에 덧붙여 대외적으로는 ‘윤이상 스페셜리스트’로 통한다. 윤이상씨의 교향곡 1번,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등이 일본 카메라타 레이블로 녹음돼 전세계에 배포됐다.
활약에 상응하는 대우도 받아 1972년 공훈예술가, 1986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현재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통일음악회’ 등에서 김씨와 만난 사람들은 그가 ‘자상하고 소박하며 말수가 적은 인물’이라고 회상했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1987~1990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다니며 김씨와도 알고 지낸 지휘자 박태영(서울시청소년교향악단 단장)은 “사생활 등 필요치 않은 부분에 대해 일절 말이 없는 분이지만 세심하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김씨가 일단 지휘대에 오르면 놀랄 만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악단에 대한 지시는 간결했지만 언제나 핵심을 담고 있어 아주 효율적인 연습을 펼쳤다”고 말했다.
그의 서울 방문과 함께 그의 가족사도 화제에 올랐다. 북한의 ‘조선화보사’가 출간하는 잡지 ‘조선’ 8월호가 그와 부인 안예옥씨의 이야기를 소개했고 이 이야기가 뉴스시간 전파를 탄 것. 안예옥씨는 본명이 야스다 레이코인 일본인.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50년대 김씨를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1년 뒤 김씨가 북한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남편을 따라 귀국선을 탔다. 이름도 아예 안예옥으로 바꾸고 북한국립예술극장 성악가수로 활동했다. 김씨는 8월18일 기자회견에서 부인의 활동을 묻는 질문에 “조선말도 잘 못하는 아내가 열심히 조선노래를 부르니 고맙게도 인민들이 사랑해 주었다. 비교적 오랫동안 국립예술극장에 다녔지만 이제는 손자 손녀나 돌보고 있다”고 대답하며 미소지었다.
김씨는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북한 교향악단의 연주곡에 대해 “양악 악기에 민족악기가 자연스럽게 배합돼 서양악기 편성만으로는 맛볼 수 없는 음색을 나타내는 곡들”이라며 “남녘 인민들이 이를 통해 민족적 향취를 맛보기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조선국립교향악단 연주단은 8월20~22일 단독 콘서트 및 KBS교향악단의 합동 콘서트 등 네 차례의 연주를 마치고 23일 박권상 KBS 사장 주최 만찬에 참석한 뒤 24일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돌아갔다. 연주를 관람한 음악계 인사들과 관객들은 “정밀한 앙상블과 흥겨운 리듬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방문 교환연주가 정례화됐으면 좋겠다”고 감상을 말했다.
8월18일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 단원 132명과 함께 서울을 찾은 이 악단의 책임지휘자(상임지휘자격) 김병화씨(64). 그는 북한 지휘계 1세대로 국가를 대표하는 악단의 앙상블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권 지휘자상과 달리 그는 순수과학을 전공한 노학자처럼 소박한 느낌과 수줍음마저 언뜻언뜻 내비치는 음악가였다.
그는 1960년대 ‘귀국선’을 탄 이른바 ‘귀환동포’ 출신.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1960년 귀국, 평양음악무용대학 지휘과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1964년부터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를 맡았고, 1969년에는 33세 나이로 국립교향악단 책임지휘자가 돼 북한 지휘계의 정상에 올랐다.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가극과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등이 모두 그의 지휘로 초연된 작품들.
여기에 덧붙여 대외적으로는 ‘윤이상 스페셜리스트’로 통한다. 윤이상씨의 교향곡 1번,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등이 일본 카메라타 레이블로 녹음돼 전세계에 배포됐다.
활약에 상응하는 대우도 받아 1972년 공훈예술가, 1986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현재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통일음악회’ 등에서 김씨와 만난 사람들은 그가 ‘자상하고 소박하며 말수가 적은 인물’이라고 회상했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1987~1990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다니며 김씨와도 알고 지낸 지휘자 박태영(서울시청소년교향악단 단장)은 “사생활 등 필요치 않은 부분에 대해 일절 말이 없는 분이지만 세심하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김씨가 일단 지휘대에 오르면 놀랄 만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악단에 대한 지시는 간결했지만 언제나 핵심을 담고 있어 아주 효율적인 연습을 펼쳤다”고 말했다.
그의 서울 방문과 함께 그의 가족사도 화제에 올랐다. 북한의 ‘조선화보사’가 출간하는 잡지 ‘조선’ 8월호가 그와 부인 안예옥씨의 이야기를 소개했고 이 이야기가 뉴스시간 전파를 탄 것. 안예옥씨는 본명이 야스다 레이코인 일본인.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50년대 김씨를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1년 뒤 김씨가 북한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남편을 따라 귀국선을 탔다. 이름도 아예 안예옥으로 바꾸고 북한국립예술극장 성악가수로 활동했다. 김씨는 8월18일 기자회견에서 부인의 활동을 묻는 질문에 “조선말도 잘 못하는 아내가 열심히 조선노래를 부르니 고맙게도 인민들이 사랑해 주었다. 비교적 오랫동안 국립예술극장에 다녔지만 이제는 손자 손녀나 돌보고 있다”고 대답하며 미소지었다.
김씨는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북한 교향악단의 연주곡에 대해 “양악 악기에 민족악기가 자연스럽게 배합돼 서양악기 편성만으로는 맛볼 수 없는 음색을 나타내는 곡들”이라며 “남녘 인민들이 이를 통해 민족적 향취를 맛보기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조선국립교향악단 연주단은 8월20~22일 단독 콘서트 및 KBS교향악단의 합동 콘서트 등 네 차례의 연주를 마치고 23일 박권상 KBS 사장 주최 만찬에 참석한 뒤 24일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돌아갔다. 연주를 관람한 음악계 인사들과 관객들은 “정밀한 앙상블과 흥겨운 리듬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방문 교환연주가 정례화됐으면 좋겠다”고 감상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