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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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줘서 고맙고 꼭 다시 만나자”

이선행씨 부부의 3박4일 방북기…자식들과 ‘구순잔치’ 소박한 꿈

  • 입력2005-10-05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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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줘서 고맙고 꼭 다시 만나자”
    8·15 이산가족 상봉 기간 내내 화제를 모았던 사람은 부부가 동시에 북측의 가족과 상봉한 이선행(남·81) 이송자씨(여·82) 부부였다. 방북 기간 중 이선행씨는 북에 두고 온 아내 홍경옥씨(76)와 아들 진일(56), 진성씨(51)를, 이송자씨는 아들 박위석씨(61)를 만났다. 헤어진 북측 가족을 반세기 만에 만나고 8월18일 서울로 돌아온 이선행씨를 19일(토요일) 오후 2시, 서울 중랑구 망우동 자택에서 만났다. 이씨의 양해 아래 이씨가 구술한 내용을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50년 만의 귀향, 3박4일간의 꿈같은 만남을 모두 마치고 망우동 언덕배기 집으로 돌아오니 골목 어귀에 “남측 이산가족 이선행 이송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방북 상봉을 축하드립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제서야 ‘아!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감정과 ‘언제 또다시 이북 아내와 자식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아내는 북쪽에 두고 온 서로의 가족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둘 다 ‘자식을 버린 죄인’이라 입 밖에 말을 꺼내는 것조차 서로에게 고문 같은 형벌이란 걸 이심전심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6·15 선언이 있고 난 이틀 뒤인 6월17일, 비로소 아내와 나는 대한적십자사에 찾아가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를 냈다.

    세 차례에 걸친 방북자 선정 과정이 있었고, 그때마다 적십자사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할아버지, 뽑혔습니다”는 말에 “이송자는요?” 하는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혹시 나만 방북자로 선정된다면 아내를 두고 도저히 혼자서 이북의 가족을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내 역시 최종 방북자 명단에 들었고, 우리 부부는 “아! 기적이구나”라며 감사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아내와 나는 선물 살 궁리에 빠졌다. 나는 청바지나 러닝셔츠 등 옷가지를 살까 했는데 뜻밖에 아내가 “이북 아내한테 금반지를 사주라”며 내 손을 금은방으로 잡아끌었다. 비록 늙은 아내지만 샘이라도 낼 법한데 그게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 선물 사는 일을 마치고 우리 부부는 밤에 가방 하나씩을 앞에 놓고 각자 짐을 꾸렸다. 아들 하나만 만나게 될 아내 짐이 내 짐보다 훨씬 작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북 아내에게 줄 금반지 말고 따로 마련한 금반지와 구두 한 켤레를 꺼내 아내 가방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가방을 머리맡에 나란히 둔 채 잠자리에 들자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밀려왔다. ‘이제 죽는 날까지 군말 없이 더 잘해줘야지….’ 함경도 또순이였던 아내는 32년 전 나와 결혼해 정말 억척스레 열심히 살았다. 그동안 나 혼자 살았다면 선물 준비는커녕 구질구질한 몰골로 방북길에 올랐을 것이다.

    8월15일,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북한 상공으로 접어들자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창 밖을 내다보며 저마다 이런저런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때까지도 덤덤한 마음이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해 수십명의 젊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때에야 ‘아! 정말 이북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고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오후 3시가 넘어 평양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그 맛은 정말 옛날 맛 그대로였다.

    식사가 끝나고 첫 단체상봉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등 온갖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편으론 월남할 때 아내 뱃속에 있던 딸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름 석자만 알았더라도 상봉가족 명단에 올렸을 텐데….

    드디어 첫 상봉시간이 됐다. 상봉장으로 나를 안내하던 북한 안내원이 “가족이 저기 계시다”며 손으로 가리키는데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멀리서 보는 식구들이지만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들이 가족사진 한 장을 내 앞에 꺼내놓았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정말 내 가족인가’ 반신반의하며 이북 아내에게 연거푸 물었다. “오라버니 이름이 뭐요?” “조카 이름이 뭐요?”

    확인이 끝나고 자세히 뜯어본 아내는 헤어질 당시 스물여섯의 꽃 같은 모습은 간 데 없이, 줄어든 키에 새까맣고 찌부러진 얼굴이 영 볼품없었다. 둥그레한 참한 얼굴에 아들 3형제를 쑥쑥 낳아준 아내, 호강은 못 시켜도 고생만은 시키지 말자며 다짐했던 그 아내가 50년 만에 초라한 늙은이로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다니…. 말문이 막혀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아내와 겹쳐 미안함은 더 컸다.

    남쪽 아내와는 여행을 하든 운동을 하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니는데 이북 아내와는 10년 남짓 같이 산 세월 동안 출장을 자주 다닌 탓에 함께 지낸 날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에 그저 “이렇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북 아내는 덤덤한 표정으로 예전에 우리 부부가 함께 살 때의 이웃들 소식이며 내가 월남한 후 신세진 사람들 얘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무식쟁이가 어떻게 일일이 그런 기억을 다 하느냐, 정말 놀랍다” “무식해도 내가 아들들은 이렇게 훌륭하게 다 키웠소” 눈물 한번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맞받아치는 아내를 보며 “당신, 영웅이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50년 만의 첫 만남은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속절없이 지나갔다.

    단체상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옆방에 있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아들이 만나자마자 첫마디로 ‘엄마 나빠’라는 말을 했다”며 가슴아파했다. 일곱 살 때 헤어진 유일한 자식을 이제서야 만났으니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그런데도 아내는 “50년 만에 남편 만나서 밤에 손목도 한번 못 잡아보고 혼자 자다니… 같은 여자로 마음이 짠하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내일 다시 이북 아내를 만나면 업어주라”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날 만큼 아내가 고마웠다.

    다음날 숙소에서 개별 상봉할 때는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말로 이북 아내를 업어주었다. 떨어져 산 세월 동안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색해하는 아내를 업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돌봐주지 못해 더 보잘것없이 됐구나….’ 가슴이 미어져 아무 말 없이 방안만 빙빙 돌았다. 아내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고, 나는 ‘이 무식쟁이가 어떻게 이렇게 의연할까’ 신기할 따름이었다. 왜 이제 왔느냐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해도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었을 텐데….

    마지막 단체상봉 때 남쪽 아내의 북측 가족과 합석했다. 위석(이송자씨 아들)이가 술잔을 내밀며 “아버지, 잔 받으세요” 했다. 아내는 이북 아내에게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면 영감과 함께 사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북 아내는 “나는 아들들이 있으니까 괜찮시요. 두 분이 잘 사시라요” 했다. 나는 아내가 고맙기도 하고 감격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짐짓 “내가 귀찮고 성가시니까 이북 아내에게 슬쩍 떠넘기려 한다”며 딴소리를 했다.

    큰아들이 “남쪽 두 분 다 자식이 없으니까 통일이 되면 우리가 거두어 정성스레 모시겠다”고 해서 가슴이 후끈했다. 방북 기간 내내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남북의 두 아내가 서로 어색해한다고 말이 많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이북 아내는 틈만 나면 남쪽 아내를 붙잡고 “영감 잘 거둬주어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비칠까 부담돼 일부러 서로 피하는 체했던 것이다. 그런 두 아내를 보자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너무 고마워 방북 기간 내내 당치도 않게 신이 나 있었다.

    마지막 가족상봉 날 준비해간 1000달러를 꺼내놓자 아내와 아들들은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1000달러가 아니라 몇억 달러인들 아까우랴. 그런 심정으로 방북할 때 입고 간 셔츠와 바지를 벗어 큰아들에게 주었다. 돈으로야 몇푼이나 되겠느냐만 이제 또 헤어지려는 마당에 그간 못 느낀 부정을 그것으로나마 느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북 아내에게는 입고 간 러닝셔츠를 벗어주었다. “내 땀냄새가 밴 거니까 오늘 하룻밤만 입고 자라.” 나와 이북 아내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반동분자 가족으로 몰려 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와 자식이 살아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그것처럼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빨리 통일의 날이 와서 “구순잔치를 차려드리겠다”던 아들과 아내를 꼭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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