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형 교수(48·서울대 아동학)의 첫인상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줌마. 차분하고 울림 좋은 목소리에서 싸움이라곤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다정다감함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한국의 종가(宗家) 연구에 18년을 바친 연구자로서의 치열함과 우직함은 학계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머리 빗을 시간도 없냐”는 핀잔을 들으며 연구에 매달린 끝에 올해 ‘한국의 명문 종가’(서울대 출판부)가 출간되자, 이교수의 가족(친정 어머니, 남편과 세 아들)들은 “이제 종가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넌더리를 냈다. 학기 중에는 본업인 아동심리 첨단이론을 가르치고 주말과 방학이면 종가를 찾아 지방 출장을 떠나는 이중생활이 한두 해도 아니고 장장 18년. 가족들로부터 그런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주말마다 지방출장에 가족들 불만
이 책의 마무리 작업이 얼마나 고됐던지 나이에 비해 곱다는 말을 듣던 이교수의 얼굴에도 주름이 패고 머리에는 서리가 앉았다. 그는 “연구 주제를 잘못 택한 죄로 사서 고생”이라 웃지만 ‘한국의 명문 종가 연구’는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역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이교수가 연구 과제로 삼은 ‘조선 사회의 가족원리’는 국사학계로선 관심 밖의 주제. 그렇다고 페미니즘이론으로 접근하는 여성학계의 몫도 아니었다. 결국 아동학자인 이교수가 맨땅에서 낟알을 줍는 심정으로 종가의 실체에 대해 하나씩 발로 뛰며 기록해가지 않으면 안 됐다.
퇴계 이황의 종택(宗宅)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문묘배향(文廟配享·유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인물의 위패를 성균관에 모시는 것)된 종가 열네곳을 찾아다니며 70여명의 종손(宗孫)과 종부(宗婦), 젊은 종손 부부까지 인터뷰하고(인터뷰는 한 번으로 끝난 법이 없다. 적어도 두 번, 일곱 차례까지 만나 계속 정보를 수집했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족보를 뒤지며 문헌 연구를 병행했다.
“연구를 시작한 게 82년 여름이니까 덕성여대 강의를 하면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학위논문 ‘피아제 이론에 의한 한국 아동의 친척명 인지발달’)를 하고 있을 때였죠. 늘 서구 이론의 틀로 우리 가족을 분석하다 보면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아니라 뭔가 우리만의 원리가 있을 거다,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종가에서 그 뭔가를 찾아보자 했던 거죠.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제 전공대로 종가에서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것을 캐다 보니 종가에서의 남녀 역할을 알아야 했고, 또 종가의 운명을 좌우한 조선시대 왕조사를 알아야 했고, 그 시대의 군신관계,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학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습니다. 거꾸로 역사공부를 한 셈이죠.”
어쨌든 처음 그가 종택(宗宅)을 방문했을 때 종손들의 태도는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동학을 하는 여자 교수가 무엇을 하겠냐는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사랑채로 안내하며 “이 사랑에 여자분으로는 처음 들어오셨소”라 할 때부터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됐다. 수백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얘기하는 종손들의 시제가 불분명한 화법, 이름은 쏙 빼고 조상을 호(號)로 칭하는 통에 느낀 혼란, 도저히 구어체라 하기 어려운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를 마구 섞어 쓰는 난해함 때문에 처음에는 듣고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녹음하고 기록했다 다시 풀어서 읽어보고, 기록과 대조해가면서 조금씩 한국 종가의 실체를 잡아갔다.
하루에 한두 번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몇 차례씩 갈아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오는 이교수의 정성이 갸륵했던지 언제부턴가 종손들은 마음을 열어 보였다. 자신들이 직접 서울로 이교수를 찾아오는가 하면 종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를 보여주거나 깊이 감춰둔 사료들을 꺼냈다. 심지어 세상에 공개하기 어려운 집안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는 정도가 됐다.
“처음부터 어떤 이론적 틀을 가지고 접근했다면 연구는 훨씬 빨리 끝났을 겁니다. 대신 종가의 참모습은 발견하지 못했겠죠. 가장 놀라웠던 것은 종부(宗婦)들의 위상이었습니다. 종손이 있다 해도 재산 관리자로서 종부의 위치는 독립적이었으며, 문중회의에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만큼 집안 어른으로서 종손과는 또 다른 권한을 갖고 있었던 거죠. 심지어 종손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 양자를 들이는 결정권도 종부에게 있었습니다. 막후에서만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종가 제사 때 초헌(初獻·첫 술을 올리는 일)은 종손이 하고 아헌(亞獻)은 종부가 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은 핍박받았다는 고정관념으로 접근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는 연구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유학에 대해 지식의 부족을 느낄 무렵 사학과 대학원 강의 중 ‘조선 중기 이후 지성사’란 과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정옥자 교수(현재 규장각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청했다.
“말이 교수지 역사 분야는 까막눈입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선생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자신의 강의를 듣겠다는 동료 교수의 요청에 깜짝 놀란 정교수가 대신 개인지도를 해주겠다고 나섰고, 이후로도 틈틈이 훌륭한 조언자로 남았다.
비슷한 경험은 5년 전 이교수가 ‘정치사회화’란 책을 집필할 때도 있었다. 원고를 마무리짓고 그는 동료 교수 몇 사람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예의상 몇 마디 조언을 하거나 꼼꼼하게 오자를 잡아주는 이들은 있었지만, 문용린 교수(전 교육부 장관·교육학)의 조언은 뜻밖이었다. 원고의 순서와 틀을 완전히 바꾸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 된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조언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이교수는 출간을 1년 뒤로 늦추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의 완벽에 대한 집착은 종가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작업의 정확도를 위해 일단 초고를 작성하면 한학자의 고증을 거치고, 그 원고를 다시 각 종가로 보내 검토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조마조마한 순간도 많았다. 특히 명종 때 벽서사건으로 귀양갔다 죽은 회재 이언적 종가를 기록할 때 양자와 서자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 난감했다고 말한다. 이교수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
“회재 선생이 25세에 경주 훈도로 부임했는데 이때 가까이했던 여인이 잉태한 줄 모르고 경주를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여인은 다른 집 소실로 들어가 아들 옥강을 낳았는데 죽기 전에 아들에게 생부가 있다고 말해준 겁니다. 이 아들이 평북 강계로 귀양간 생부를 찾아가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까지 모셨어요. 회재는 아들에게 전인(全仁)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고, 아들은 12월 혹한에 아버지 시신과 문집을 가지고 강계를 떠나 이듬해 2월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회재의 위패가 경주 옥산서원에 모셔졌지요. 문제는 회재의 적실 박씨가 서자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 양자 응인(應仁)을 들여 후사를 이음으로써 적통과 혈통 양 줄기가 생긴 겁니다. 저도 기록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다 양자로 들인 쪽을 법자(法子), 서자에게는 혈자(血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집안을 기록하면서 혹시라도 어느 한쪽에 누가 되지 않을까 고심했지만 다행히 양측 모두 이해하고 넘어갔어요. 사실, 종가를 연구하다 보면 사연 없는 집이 없고 모두 대하 드라마더군요.”
그는 요즘도 이 연구를 시작하던 무렵 어느 사회학 전공 교수가 던진 말을 떠올리곤 한다. 80년대 학계는 종속이론이 풍미했고, 그 교수 역시 민중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종가를 연구한다고 했더니 당장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 말에는 편협한 양반계층의 특정 가문을 연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보다는 핍박받는 민중의 일상적 삶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종가 연구는 한국인의 사상과 삶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소박한 시도이지 특정 가문이나 인물의 미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요즘 이교수의 머릿속에는 벌써 다음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본(本)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나 혈통이나 가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몰래 전해지는 집안 의식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율곡 이이 선생의 종택도 잘 보존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가 연구까지 마무리지어야겠지요.”
주위 사람들로부터 “머리 빗을 시간도 없냐”는 핀잔을 들으며 연구에 매달린 끝에 올해 ‘한국의 명문 종가’(서울대 출판부)가 출간되자, 이교수의 가족(친정 어머니, 남편과 세 아들)들은 “이제 종가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넌더리를 냈다. 학기 중에는 본업인 아동심리 첨단이론을 가르치고 주말과 방학이면 종가를 찾아 지방 출장을 떠나는 이중생활이 한두 해도 아니고 장장 18년. 가족들로부터 그런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주말마다 지방출장에 가족들 불만
이 책의 마무리 작업이 얼마나 고됐던지 나이에 비해 곱다는 말을 듣던 이교수의 얼굴에도 주름이 패고 머리에는 서리가 앉았다. 그는 “연구 주제를 잘못 택한 죄로 사서 고생”이라 웃지만 ‘한국의 명문 종가 연구’는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역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이교수가 연구 과제로 삼은 ‘조선 사회의 가족원리’는 국사학계로선 관심 밖의 주제. 그렇다고 페미니즘이론으로 접근하는 여성학계의 몫도 아니었다. 결국 아동학자인 이교수가 맨땅에서 낟알을 줍는 심정으로 종가의 실체에 대해 하나씩 발로 뛰며 기록해가지 않으면 안 됐다.
퇴계 이황의 종택(宗宅)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문묘배향(文廟配享·유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인물의 위패를 성균관에 모시는 것)된 종가 열네곳을 찾아다니며 70여명의 종손(宗孫)과 종부(宗婦), 젊은 종손 부부까지 인터뷰하고(인터뷰는 한 번으로 끝난 법이 없다. 적어도 두 번, 일곱 차례까지 만나 계속 정보를 수집했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족보를 뒤지며 문헌 연구를 병행했다.
“연구를 시작한 게 82년 여름이니까 덕성여대 강의를 하면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학위논문 ‘피아제 이론에 의한 한국 아동의 친척명 인지발달’)를 하고 있을 때였죠. 늘 서구 이론의 틀로 우리 가족을 분석하다 보면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아니라 뭔가 우리만의 원리가 있을 거다,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종가에서 그 뭔가를 찾아보자 했던 거죠.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제 전공대로 종가에서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것을 캐다 보니 종가에서의 남녀 역할을 알아야 했고, 또 종가의 운명을 좌우한 조선시대 왕조사를 알아야 했고, 그 시대의 군신관계,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학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습니다. 거꾸로 역사공부를 한 셈이죠.”
어쨌든 처음 그가 종택(宗宅)을 방문했을 때 종손들의 태도는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동학을 하는 여자 교수가 무엇을 하겠냐는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사랑채로 안내하며 “이 사랑에 여자분으로는 처음 들어오셨소”라 할 때부터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됐다. 수백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얘기하는 종손들의 시제가 불분명한 화법, 이름은 쏙 빼고 조상을 호(號)로 칭하는 통에 느낀 혼란, 도저히 구어체라 하기 어려운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를 마구 섞어 쓰는 난해함 때문에 처음에는 듣고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녹음하고 기록했다 다시 풀어서 읽어보고, 기록과 대조해가면서 조금씩 한국 종가의 실체를 잡아갔다.
하루에 한두 번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몇 차례씩 갈아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오는 이교수의 정성이 갸륵했던지 언제부턴가 종손들은 마음을 열어 보였다. 자신들이 직접 서울로 이교수를 찾아오는가 하면 종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를 보여주거나 깊이 감춰둔 사료들을 꺼냈다. 심지어 세상에 공개하기 어려운 집안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는 정도가 됐다.
“처음부터 어떤 이론적 틀을 가지고 접근했다면 연구는 훨씬 빨리 끝났을 겁니다. 대신 종가의 참모습은 발견하지 못했겠죠. 가장 놀라웠던 것은 종부(宗婦)들의 위상이었습니다. 종손이 있다 해도 재산 관리자로서 종부의 위치는 독립적이었으며, 문중회의에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만큼 집안 어른으로서 종손과는 또 다른 권한을 갖고 있었던 거죠. 심지어 종손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 양자를 들이는 결정권도 종부에게 있었습니다. 막후에서만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종가 제사 때 초헌(初獻·첫 술을 올리는 일)은 종손이 하고 아헌(亞獻)은 종부가 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은 핍박받았다는 고정관념으로 접근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는 연구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유학에 대해 지식의 부족을 느낄 무렵 사학과 대학원 강의 중 ‘조선 중기 이후 지성사’란 과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정옥자 교수(현재 규장각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청했다.
“말이 교수지 역사 분야는 까막눈입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선생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자신의 강의를 듣겠다는 동료 교수의 요청에 깜짝 놀란 정교수가 대신 개인지도를 해주겠다고 나섰고, 이후로도 틈틈이 훌륭한 조언자로 남았다.
비슷한 경험은 5년 전 이교수가 ‘정치사회화’란 책을 집필할 때도 있었다. 원고를 마무리짓고 그는 동료 교수 몇 사람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예의상 몇 마디 조언을 하거나 꼼꼼하게 오자를 잡아주는 이들은 있었지만, 문용린 교수(전 교육부 장관·교육학)의 조언은 뜻밖이었다. 원고의 순서와 틀을 완전히 바꾸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 된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조언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이교수는 출간을 1년 뒤로 늦추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의 완벽에 대한 집착은 종가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작업의 정확도를 위해 일단 초고를 작성하면 한학자의 고증을 거치고, 그 원고를 다시 각 종가로 보내 검토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조마조마한 순간도 많았다. 특히 명종 때 벽서사건으로 귀양갔다 죽은 회재 이언적 종가를 기록할 때 양자와 서자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 난감했다고 말한다. 이교수가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
“회재 선생이 25세에 경주 훈도로 부임했는데 이때 가까이했던 여인이 잉태한 줄 모르고 경주를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여인은 다른 집 소실로 들어가 아들 옥강을 낳았는데 죽기 전에 아들에게 생부가 있다고 말해준 겁니다. 이 아들이 평북 강계로 귀양간 생부를 찾아가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까지 모셨어요. 회재는 아들에게 전인(全仁)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고, 아들은 12월 혹한에 아버지 시신과 문집을 가지고 강계를 떠나 이듬해 2월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회재의 위패가 경주 옥산서원에 모셔졌지요. 문제는 회재의 적실 박씨가 서자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 양자 응인(應仁)을 들여 후사를 이음으로써 적통과 혈통 양 줄기가 생긴 겁니다. 저도 기록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다 양자로 들인 쪽을 법자(法子), 서자에게는 혈자(血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집안을 기록하면서 혹시라도 어느 한쪽에 누가 되지 않을까 고심했지만 다행히 양측 모두 이해하고 넘어갔어요. 사실, 종가를 연구하다 보면 사연 없는 집이 없고 모두 대하 드라마더군요.”
그는 요즘도 이 연구를 시작하던 무렵 어느 사회학 전공 교수가 던진 말을 떠올리곤 한다. 80년대 학계는 종속이론이 풍미했고, 그 교수 역시 민중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종가를 연구한다고 했더니 당장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 말에는 편협한 양반계층의 특정 가문을 연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보다는 핍박받는 민중의 일상적 삶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종가 연구는 한국인의 사상과 삶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소박한 시도이지 특정 가문이나 인물의 미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요즘 이교수의 머릿속에는 벌써 다음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본(本)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나 혈통이나 가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몰래 전해지는 집안 의식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율곡 이이 선생의 종택도 잘 보존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가 연구까지 마무리지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