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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영화 ‘청연’의 모델 박경원과 권기옥 동갑내기 비행사로 친일 행적과 독립군 극명한 대조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영화 ‘청연’의 모델 박경원. 최초로 한국 하늘을 난 안창남.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왼쪽부터).

배우 장진영은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 여자다. 영화 ‘청연’(12월29일 개봉)의 모델 박경원(1901~33)은 그를 얼마간 닮았다. 장진영은 팬이 많은 만큼 ‘안티’도 적지 않다. 그런 그가 ‘청연’에서 한국 항공의 선각자면서도, 평가가 극적으로 엇갈리는 박경원 역을 맡았다.

박경원의 삶은 하나로 재단하기 어렵다. 그는-그가 살았던-당대의 진보적 신여성이다. 물론 친일 행적이 따라붙지만…. 본명은 박원통. 남자아이를 바라던 부모가 마음이 상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그런데 ‘미운 오리’는 부모의 실망을 이겨내고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그는 이름처럼 성(性)을 ‘원통’해했다. 가부장사회에서, 덧붙여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가 되고 싶었다. 훨훨 나는 ‘靑燕(청연·푸른 제비)이 되려고, 또 차별을 내던지려고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식민지 조선에서 차별 극복 위해 몸부림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안창남의 비행기.

“박경원이 아니라 권기옥이라면 영화가 훨씬 살았을 텐데….”

공군대학의 한 교수는 영화 ‘청연’을 아쉬워했다. 일제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된 박경원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조종술을 배운 권기옥(1901~88)의 행적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권기옥. 그는 최초의 여성비행사다. 권기옥은 박경원과 얼마간 비슷한 삶을 살았다. 박경원이 그랬듯 편견과 차별은 그가 창공을 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권기옥은 박경원과는 다른 삶을 산다.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1920년 2월17일 도산 안창호의 일기)

도산은-조선국 독립을 위해서-비행기를 사고 싶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도 비행기를 구입해 일본을 공격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임시정부는 “비행기 구입이 어렵다(임시정부 예산으로 비행기 구입은 꿈도 꿀 수 없었다)”면서 대신 조종사를 양성하기로 한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 흥의여학교를 다닌 권기옥은 만세운동에 휩쓸렸다가 6주 동안 감옥에 갇힌다. 출옥 후 그는 한동안 임시정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가 일제의 감시가 날카로워지자 상하이로 망명한다.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안창남 선생(원 안)이 동아일보사 초청으로 고국 영공 기념비행을 위해 1922년 12월 귀국, 경부선 특급열차 편으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고 있는 것을 보도한 당시의 동아일보.

권기옥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재무총장 및 법무총장을 지낸 이시영을 만난다. 이시영의 추천으로 간신히 들어간 곳이 중국 곤명의 운남비행학교. 이 학교 교장은 처음엔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한다.

이시영의 부탁을 받은 중국 군벌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학교는 ‘조선 여자’ 권기옥에겐 천국이었다. 그는 25년 2년 남짓의 비행술 과정을 마치고 푸른 하늘을 제멋대로 쏘다닌다. 학교를 끝내고 상하이에 돌아온 뒤 국민혁명군에 소령으로 입대한다. 비로소 일제에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박경원, 만주국 기리는 친선비행

박경원은, 권기옥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구체적 친일 행위가 없음에도, 그가 일제를 이용하려 했다는 걸 부인키는 어렵다.

고이즈미 마타지로(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할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소문은 뒤로하더라도(그는 고이즈미 당시 체신장관과 함께 내선일체의 상징인 고려신사의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이라는 만주국을 기리는 청연호의 마지막 비행은 떨떠름한 게 사실이다. 영화 ‘청연’도 박경원의 마지막 비행이 일만친선비행이었다는 걸 숨기지 않고 영상화했다.

그러나 그를 친일파라고 재단할 수는 없다. 또 당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만큼 무지한 일도 없다. 어쩌면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보다, ‘소름’으로 실력을 입증받은 윤종찬 감독이 ‘청연’을 통해 묘사한 ‘인간 박경원’이 현실에 더 근접했는지도 모른다. 하코네 산중에 추락한 청연호에서 박경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제강점기, 한국은 강토뿐 아니라 하늘도 빼앗겼다. 한국의 하늘을 난 최초의 비행사는 13년 서울 용산 일본군사령부 연병장에서 비행 시범을 보인 일본 해군의 기술장교 나라히라. 그가 직접 만든 나라히라4호가 창공을 날 때 동갑내기인 박경원과 권기옥은 13세였다.

동갑내기로 똑같이 하늘을 날고 싶었으되 다른 선택을 한 두 신여성은, 누구는 친일파니 누구는 독립군이니 하는 논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닮았고 또 달랐던 박경원과 권기옥은 ‘조선 여성’의 역사를 새로 쓴, 또 한국 항공사를 연 선각자다. 공군사관학교가 처음으로 여생도를 받은 때(1997년)는 선각자들이 하늘을 난 지 70년 넘게 지나서다.

영화와 역사의 틈

최초의 여성비행사는 박경원? 아니, 권기옥!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영화 ‘청연’

윤종찬 감독의 신작 ‘청연’은 역사적 사실과 얼마간 닮았을까. 여성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극으로 꾸린 이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12월29일 개봉한다. ‘청연’은 박경원을 ‘최초의 여성비행사’라고 알리다가 ‘최초의 여성 민간비행사’로 바로잡았다. 영화와 역사의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질문: 박경원은 최초의 여성비행사인가.

감독의 말: 최초는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치 않다.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것뿐이다. 굳이 최초를 붙이자면 박경원은 최초의 민간 여성비행사다. 공군 쪽에서는 다른 분이 그에 앞서 계셨다. 어찌됐든 본의 아니게 문제를 일으켜 죄송하다.

정답: 최초의 여성비행사는 권기옥이다. 권기옥은 1925년 운남비행학교를 졸업한다. 박경원은 3년 늦은 28년 2월 일본 비행학교를 마친다. 권기옥이 다닌 운남비행학교는 군인 양성기관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권기옥은 한국 공군과는 관련이 없지만 군인으로 보는 게 맞다.

질문: 그렇다면 박경원은 최초의 민간 여성비행사인가.

감독의 말: (‘청연’에서 한지민이 분한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은 26년에 비행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영화에서 박경원에게 조종 지도를 받는 것으로 나온다) 이정희는 실재했다. 박경원과 생활한 시간이 없거나 적었을 뿐 실존 인물이다.

정답: 사실과 다르다. 이정희는 물론 실재했다. 그러나 비행은 이정희가 먼저다. 이정희는 권기옥에 이어 두 번째 여성비행사다. 1928년 3월7일 대구 연병장에서 비행대회를 가졌다. 박경원이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28년 2월로 이정희보다 늦다. 이정희는 광복 후 한국 여자항공대 교관으로 일했으니 공군 쪽에서 보면 최초의 여성 파일럿이다. 그러나 이정희가 첫 비행을 했을 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한국 공군의 뿌리는?

中 육군군관학교 출신 전투기 조종사 최용덕이 시초


창공의 두 여걸 닮았지만 달랐던 삶

1920년대의 한국인 비행사들. 비행 초창기에 활약한 한국인 비행사는 안창남, 서왈보, 최용덕, 권기옥, 박경원 등이었다.

공군의 뿌리는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한 인사들이다. ‘공군사’는 뿌리를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인물들’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뿌리를 특정해놓고 있지는 않다.

한국 하늘을 난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 (그러나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안창남이 아니다.) 그는 1920년 일본 오쿠리비행학교를 마치고 22년 12월 금강호를 타고 서울 상공을 선회한다.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에서 일하다 30년 30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공군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이 독립군 비행사 양성소를 미국에 세운 때로 파일럿의 역사를 끌어올린다. 노백린은 “앞으로의 전쟁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했을 만큼 선견지명이 있었다. 노백린이 세운 월로스 한인비행학교에서 한인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친 이들이 최초의 파일럿이다.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20년 하늘을 난 이용선, 이초, 오임하, 이용근, 한장호, 장병훈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아 공군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월로스 한인비행학교 학생들은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어놓겠다” “천왕이 사는 성을 박살내겠다”고 외치며 비행술을 배웠다.

공군사는 48년 미군으로부터 정식으로 간부 교육을 받아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처음 조직한 7명의 멤버를 ‘공군 창설 간부 7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정렬(초대 및 3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2대 공군참모총장), 장덕창(4대 참모총장), 이근석(6·25전쟁 중 전사), 박범집(6·25전쟁 중 전사), 김영환(통위부 정보 및 작전국장), 이영무(초대 항공사령관)가 그들이다.

7인의 창설 간부 중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인물들’에 속하는 사람은 2명이다. 최용덕과 이영무. 이영무는 권기옥과 함께 운남비행학교를 다녔다(권기옥과 이영무는 25년에 졸업했다). 국민혁명군에 입대한 권기옥과 마찬가지로 그는 중국 군대를 선택했다. 광복 후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와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를 창설할 때 산파 노릇을 했다.

이영무는 그러나 6·25전쟁 중 행적이 묘연하다. 신동아 1월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5월 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모 씨가 “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초대 항공사령관이 바로 이영무다(신동아 1월호,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기사 참조). 이영무는 월북하거나 납북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영무를 공군의 뿌리로 보기는 어렵다.

결국 최용덕 1명이 남는다. 최용덕은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비행술을 배우고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20년대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에서 일하기도 했다. 중국군에서 활동하던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및 참모장을 지냈다. 최용덕과 이영무를 제외한 창설 멤버 중엔 일본계가 많다. 김정렬은 일본 육군 항공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박범집은 일본 육사 52기 출신으로 포병으로 근무하다가 일본 육군 항공정비학교를 마치면서 비행기와 인연을 맺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는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최용덕이라고 할 수 있다.


주간동아 2006.01.03 517호 (p74~76)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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