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 교육부가 주최한 ‘제1회 영어수업 발표회’에서 ‘총체적 언어교수법’을 제시한 윤영화 교사(서울 염동초)의 수업 장면.
5년차 영어교사 김은영(29·가명) 씨는 지난 학기 9년간 호주에서 살다 온 한 학생에게 당돌한 질문을 받았다. 교과서 지문에 일일이 밑줄을 그어놓은 이 학생이 “한국 영어교과서에는 왜 이렇게 틀린 부분이 많으냐”고 따져 물었던 것. 외국어고등학교(이하 외고)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1년간 공부한 김씨는 학교에서 ‘영어 잘하는 교사’로 통한다. 하지만 ‘네이티브 스피커’인 학생의 지적에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떤 학생은 ‘영어교과서를 믿지 못하겠다’고 해요. ‘문장을 전개할 때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안 쓴다’ ‘여기서는 however보다 다른 접속어가 들어가야 한다’라며 교과서를 교정할 정도죠. 반 인원 45명 중 해외 장기 체류자는 10명이고, 단기 어학연수 체험자까지 합치면 반수가 넘어요. 이런 아이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이 돼요.”
#2. 서울 여의도 B고등학교
매학기 시험철이 되면 영어교사들은 ‘초긴장 모드’에 돌입한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나면 교무실로 ‘영어 시험문제를 왜 이 따위로 내느냐’고 항의하는 학부모 전화가 줄을 잇기 때문. 이 학교에 재직 중인 한 영어교사의 말이다.
“다른 과목 교사들과 달리 영어교사들은 유독 학생과 학부모의 등쌀에 시달려요. 학부모 중에 해외 경험이 풍부한 고학력자 등 ‘한 영어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죠. 영어교사들은 꼬투리 잡힐 문제를 안 만들려고 서로 시험지를 돌려보며 오류 여부를 점검해요.”
“꼬투리 잡힐라 … 살얼음판 걷는 기분”
초·중·고 영어교사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조기 영어교육을 받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이 점차 늘면서 영어교사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 특히 ‘외국물을 먹은’ 학생 비중이 25~40%에 달하는 서울 강남·목동·여의도, 경기 분당 신도시,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학교들은 일부 영어교사들의 기피지역 1순위다.
정부가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 비중을 늘리도록 권장하면서 영어교사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2015년까지 모든 영어교사는 영어로 수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주입식 문법교육에 익숙한 국내 영어교사들이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한국 영어교사들의 자질 시비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부가 2005년 3월 영어연수프로그램에 참가한 272명의 중·고교 영어교사들을 상대로 실시한 토익(TOEIC) 점수는 평균 718점이었다. 반면 같은 해 대기업 신입사원과 12개 공기업 합격자의 토익점수는 각각 778점과 841점이었다. 이 통계는 영어 공교육에 대한 일반인의 불신을 더욱 키웠다.
서울 강남, 목동 등지에 거주하는 학부모들의 경우 “영어 공교육에 어떠한 기대도 없다”고 말한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자녀와 함께 5년간 미국에서 머물다 돌아온 학부모 김모(42) 씨는 “아이가 학교 영어수업에 전혀 흥미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하루는 아이가 집에 와서 ‘선생님이 begin과 start를 각각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모른다’며 투덜대더라고요. 교사가 잘못된 한국식 영어 표현을 가르치니 아이들도 학교를 불신할 수밖에요.”
해외파 학생과 토종 한국인 영어교사 사이에서 종종 미묘한 신경전도 벌어진다. 서울의 모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40대 교사의 영어발음에 대해 비난하다가 단체기합을 받았다. 서울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S(36) 원장은 영어교사로 일하는 한 친구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영어교사인 한 친구가 ‘수업에서 해외파 학생들이 나서면 일단 견제한다’고 고백하더군요. 튀는 학생에게는 계속 부정적인 지적을 하는 거죠. 교사와의 갈등으로 유학파 학생들도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죠.”
외국어 특기자가 주로 진학하는 외고의 경우 영어교사들의 부담감은 더욱 크다. 학부모들의 간섭이 심한 데다 일부 학생들은 영어교사의 능력을 시험하려 들기 때문. 전직 외고 교사 L씨는 자신만의 ‘해외파 학생 제압법’을 털어놓았다.
“수업에 들어가서 셰익스피어 시를 읽어줬어요. 중세 영어에 익숙지 않은 아이들은 그때부터 저를 만만하게 보지 않더군요.”
영어교사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왔다. 서울 Y중학교 L(28) 교사는 “영어교사들의 직무연수 참여도가 다른 교과 교사들에 비해 몇 배는 높다”고 전했다.
이들은 방학이 되면 십중팔구 사비를 털어 영국문화원이나 각종 어학원에 다닌다. 국내 대학 테솔(TESOL·영어교사 전문양성과정)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교사도 많다. 이번에 숙명여대 테솔 과정을 이수하는 한 교사는 “반의 과반수가 학교 영어교사”라며 “영어로만 수업할 자신이 없는 교사들은 아예 이 과정에 등록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교수법을 배우고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P(30) 씨는 경기 분당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미 교과서를 다 떼고 온 아이들이 재미없게 수업을 듣는 걸 보면 진이 빠지더라고요. 아이들에게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여러 교수법을 공부해보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죠.”
교사들 실력 향상 위한 정부지원 확충 절실
교육부가 1월 개최한 ‘제1회 영어수업 발표회’가 영어교사 300여 명의 참여 속에 성황리에 열렸다. 경기 야탑중의 박행란(44) 교사는 이 행사에서 ‘Scaffolder(학습조언자)’를 이용한 새로운 수업안을 소개했다. 이는 학생들이 서로를 돕는 소규모 그룹별 학습법으로,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 상위권, 중위권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상호 학습효과를 얻도록 고안됐다. 박 교사는 “영어로만 진행하더라도 실력이 제각각인 학생들이 수업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일선 교사들은 “국내 영어교사들의 능력을 높이는 데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실력이 없다’고 비난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영어교사들은 최근 정부가 원어민 보조교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원어민 보조교사 영입에 쓰인 예산은 774억원. 반면, 국내 영어교사 연수에 지원된 예산은 약 176억4000만원에 불과하다. 서울 Y여고 J 교사는 “1년 지나면 떠나는 원어민 초청에 많은 예산을 쏟아붓기보다 국내 영어교사들의 자질 향상에 투자하는 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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