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이명박-김윤옥 부부.
“서울의 청계천도 센강처럼 개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볼거리도 생기고….”
2000년 이 전 시장은 아태환경NGO 한국본부 총재에 취임했다. 이 전 시장은 머릿속으로 헐고 짓기를 반복하던 청계천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그런 그에게 부인 김씨가 물었다.
“진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이 전 시장의 답은 간단했다.
“해외에 나가보면 대부분의 도로가 땅 밑으로 들어가는 대신 땅 위로는 물이 흐르고 숲이 조성되는 등 친환경적인 도시가 많아지고 있잖아. 그러니까 청계천에도 물이 흐르게 해야지.”
2005년 10월, 이 전 시장은 20여 년 전 얻은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겨 청계천을 복원했다. 복원된 물길을 따라 이 전 시장은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했다.
정치인들에게 부인은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다. 때로는 참모이기도 한 평생의 동지다. 대선 출마를 노리는 정치인들일수록 부인들의 역할이 커지게 마련이다. 역대 대통령 선거 과정을 보면 여성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는 물론이고 부인의 스타일에 따라 표심을 열고 닫는 경향이 강했다.
“공론의 장으로 나오라” 유권자들 손짓
유권자들이 이명박 전 시장의 부인 김윤옥 씨,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부인 이윤영 씨,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인 인재근 씨,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인 민혜경 씨 등 대선후보 부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최근 유권자들은 대선후보 부인들에게 ‘공론의 장으로 나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여론 앞에 선 대선후보 부인들은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래서 일단 남편 뒤에 얼굴을 숨긴 채 호흡을 고른다.
‘얼굴 없는 내조’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전 지사의 부인 이씨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손 전 지사도 이런 이씨의 스타일 때문에 몇 번 곤욕을 치렀다고. 손 전 지사가 한 술자리에서 털어놓은 애환이다.
“(부인은) 언론이나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사 시절 동부인해 공식행사에 한번 참석하려면 2주일 전부터 작전을 짜듯 설득해야 했다.”
2005년 5월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최로 열린 ‘나라와 겨레를 위한 미사’`에 참석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부인 민혜경 씨.
전략적 우군인 부인의 역할 없이 대선을 준비하기란 불가능하다. 유권자의 반에 해당하는 여심(女心)과의 접촉은 그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씨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력이 전달되는 것은 불문가지. 이씨에게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계기는 지난해 손 전 지사가 100일 동안 실시한 ‘민심대장정’이었다. 당시 이씨는 수시로 현장에 찾아가 손 전 지사의 빨래를 수거했다. 남편이 땡볕에 논에서 김을 매고, 강원도 탄광의 막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게 이씨의 소감.
이 과정을 통해 이씨는 정치인의 아내가 가야 할 길과 내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씨에게 정치인의 아내는 여전히 힘들고 부담스러운 자리다.
“남편과 똑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언론과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 참 부담스럽다. 누군가가 나를 항상 주목하고 있다는 걸 의식할 수밖에 없다.”
1985년 겨울 어느 날 서울구치소 면회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찬바람을 타고 느닷없이 노랫소리(‘사랑의 미로’)가 들렸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시국사범’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고, 청중은 그의 아내 인재근 씨였다. 김 전 의장이 생일을 맞은 부인에게 노래 선물을 바쳤던 것.
인씨는 김 전 의장의 정치적 동지다. 김 전 의장의 파란만장한 삶은 인씨의 삶과 이란성 쌍둥이다. 인씨는 민가협 결성을 주도했으며, 1985년 김 전 의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실을 외부에 알려 시국문제화하기도 했다.
인씨는 대선후보 부인들 가운데 제일 활동적이다. 김 전 의장의 홈페이지에 ‘인재근의 이웃사랑 나누기’라는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 측근들은 사교성과 친화력은 김 전 의장을 훨씬 능가한다고 평가한다.
정치적 활동도 곧잘 소화한다. 2006년 2월 우리당 전당대회 때의 일. 당 의장직에 도전한 김 전 의장을 측면 지원한 인씨는 당시 다소곳한 다른 후보 부인들과 달리 “당이 변해야 산다”면서 우렁찬 연설로 남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누군가가 주목 … 언론에 등장 부담
인씨의 화끈한 정치활동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선보인 바 있다. 2002년 2월14일 밸런타인데이. 인씨는 ‘인재근의 프로포즈 사랑의 초콜릿’이란 선물꾸러미 200여 개를 들고 당사에 나타났다. 놀란 당직자들을 뒤로한 인씨는 출입기자들과 당직자들에게 일일이 “잘 도와달라”며 초콜릿을 내밀었다. 민주당 상임고문이던 김 전 의장의 대선 출정식을 앞둔 기선(?) 잡기였다.
김 전 의장은 인씨를 ‘바깥사람’으로 곧잘 소개한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 투옥 등으로 김 전 의장이 주로 ‘안(구치소)’에 있었던 반면, 인씨는 줄곧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는 김근태 전 의장 부부.
이 전 시장의 부인 김윤옥 씨의 내조는 색깔이 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은 ‘적절한 조언과 위안’. 일 욕심이 많은 이 전 시장은 가끔 무리한 스케줄을 잡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김씨가 한마디 툭 던진다.
“행사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으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 있어요.”
한 박자 쉬어가며 내실을 기하라는 조언이다. 이 전 시장이 버스 중앙차로를 만든 직후의 일이다. 중앙차로에 익숙하지 못한 운전자와 시민들의 불평불만이 언론을 통해 터져나왔다. 이 전 시장은 이 여론에 민감했다. 지켜보던 김씨가 이 전 시장에게 던진 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처음이니 모두가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어요. 수많은 시행착오와 준비 기간을 거친 교통정책이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내조의 또 다른 축인 위로와 위안을 건네준 셈이다. 이런 부인에게 이 전 시장이 붙인 별명은 ‘가정 내 야당’. 측근들은 군기반장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내조는 전방위적이다. 여론은 물론 언론의 비판을 전달할 때는 참모로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반면 넥타이를 고르거나 의상 및 헤어 스타일에 대해 조언할 때는 아내의 자리로 돌아온다. 김씨도 대중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2007년 7월15일 인천공항.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부인 민혜경(51) 씨가 출국수속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5·31지방선거 참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는 길이라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욱진(24) 씨와 현중(21) 씨 등 동행한 두 아들 역시 말이 없었다. 더구나 욱진 씨의 군 입대가 한 달여 남은 시점이라 정 전 의장 부부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 분위기를 깨려는 듯 민씨가 입을 열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신 것이라 생각해요.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다 올게요.”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정 전 의장은 이 여행을 통해 지친 심신을 달랬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씨는 정 전 의장에게는 친구이자 애인이다.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정 전 의장 옆을 지킨 사람이 바로 부인 민씨다.
직업정치인의 아내지만 민씨 역시 ‘정치’는 서툴다. 무엇보다 남 앞에 서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 눈치다. 2006년 2월 전당대회에서 김 전 의장의 부인 인씨가 대의원들을 헤집고 다니며 바람을 일으켰을 때다. 정 전 의장 캠프에서 즉각 민씨에게 ‘SOS’를 타전했다. 연락을 받은 민씨는 곧바로 선거지원에 나섰다.
“남편은 민주당 쇄신 정풍운동을 이끄는 등 당의 위기를 정면 돌파해왔다.”
민씨의 노력 때문인지 정 전 의장은 무난하게 의장직을 차지했다.
당 의장의 부인인 민씨는 우리당 여성조직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때 우리당 의원 부인들의 모임인 ‘우리 가족’ 측은 민씨에게 수차례 “참석하라”고 연락했다. 그러나 민씨는 쑥스러워 못 갈 때가 더 많았다. 당직자나 정치인들을 만나도 ‘우리 남편’이라는 말을 못했다.
민씨는 요즘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하루 대여섯 군데 되는 경조사는 물론이고 각종 행사에 남편 대신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 2월6일 괴청년들로부터 신변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민씨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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