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꿈이 뭐니?”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니?”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이렇듯 꿈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사람들은 인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꿈이라고 불리는 욕망을 온전히 스스로 생각해낸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예컨대 아름다워지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많은 돈을 벌어 더 넓은 집과 더 좋은 옷을 사려 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의 추구를 자신의 욕망 표현으로 쉽게 믿어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욕망은 사실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을 긍정하고 내면화한 것이다. 즉,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아의 내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라캉이 지적했듯, 인간은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욕망은 삶에 대한 긍정 통해 실현 가능
타자 혹은 사회와 그 시대의 욕망을 개인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가치와 욕망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자신의 몸조차도 타자의 시선과 욕망을 통해 응시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더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조차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은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화는 개인을 사회구성원으로 성장시키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사라졌는지를 되돌아보라.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결국 외부의 대상을 욕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상이 수능 성적일 수도 있고, 좋은 옷일 수도 있다. 심지어 가장 사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도 평가와 성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타자의 욕망은 내 욕망이 부재한 공간을 우리의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할 것이다. 욕망이 과잉된 사회에서 욕망의 결핍을 발견한다는 것! 이 같은 모순은 우리 현실의 모순을 닮아 있다.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은 반드시 인격적인 타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격적인 타자의 욕망보다 비인격적 타자의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욕망들이 욕망하는 것, 욕망의 유일신은 돈의 욕망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이 돈을 욕망하는 과정이 아니다. 돈을 향한 욕망의 주체는 여전히 우리들 인간인 것으로 보이지만, 돈의 욕망은 우리가 자본의 욕망-자본 자체의 확대재생산-의 대상일 뿐임을 의미한다. 즉, 자본 자체의 욕망이 우리의 순수한 욕망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돈을 벌거나 경제성장을 하는 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즐거운 욕망일 수 없다. 욕망을 갖는 것, 그리고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축제가 아닌 자신의 내적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고 상실의 과정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축제를 위한 춤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추모하는 레퀴엠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니체가 비판했던 ‘중력의 영(기존 질서의 힘)’에 충실한 난쟁이와 낙타의 욕망일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두 발로 서서 자신의 꿈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욕망에 대한 긍정이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의 단계, 즉 본능에 충실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라면 이를 ‘최후의 인간’을 넘어선 ‘위버 멘쉬(초인·Ubermensch)’로 불렀을 것이다.
자신의 내적 욕망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고 즐거운 춤과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고, 삶에 대한 긍정은 즐거움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결핍된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갖는 것은 삶의 시작인 동시에 삶 자체일 것이다.
● 연관 기출문제
연세대 2005년 정시(세월과 욕망), 중앙대 2001년 정시(욕망과 행복), 서강대 2002년 정시(쾌락에 대한 시각들)
하지만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욕망은 사실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을 긍정하고 내면화한 것이다. 즉,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아의 내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라캉이 지적했듯, 인간은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욕망은 삶에 대한 긍정 통해 실현 가능
타자 혹은 사회와 그 시대의 욕망을 개인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가치와 욕망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자신의 몸조차도 타자의 시선과 욕망을 통해 응시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더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조차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은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화는 개인을 사회구성원으로 성장시키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사라졌는지를 되돌아보라.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결국 외부의 대상을 욕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상이 수능 성적일 수도 있고, 좋은 옷일 수도 있다. 심지어 가장 사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도 평가와 성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타자의 욕망은 내 욕망이 부재한 공간을 우리의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할 것이다. 욕망이 과잉된 사회에서 욕망의 결핍을 발견한다는 것! 이 같은 모순은 우리 현실의 모순을 닮아 있다.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은 반드시 인격적인 타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격적인 타자의 욕망보다 비인격적 타자의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욕망들이 욕망하는 것, 욕망의 유일신은 돈의 욕망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이 돈을 욕망하는 과정이 아니다. 돈을 향한 욕망의 주체는 여전히 우리들 인간인 것으로 보이지만, 돈의 욕망은 우리가 자본의 욕망-자본 자체의 확대재생산-의 대상일 뿐임을 의미한다. 즉, 자본 자체의 욕망이 우리의 순수한 욕망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돈을 벌거나 경제성장을 하는 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즐거운 욕망일 수 없다. 욕망을 갖는 것, 그리고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축제가 아닌 자신의 내적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고 상실의 과정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축제를 위한 춤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추모하는 레퀴엠이다. 타자화된 욕망은 니체가 비판했던 ‘중력의 영(기존 질서의 힘)’에 충실한 난쟁이와 낙타의 욕망일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두 발로 서서 자신의 꿈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욕망에 대한 긍정이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의 단계, 즉 본능에 충실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라면 이를 ‘최후의 인간’을 넘어선 ‘위버 멘쉬(초인·Ubermensch)’로 불렀을 것이다.
자신의 내적 욕망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고 즐거운 춤과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고, 삶에 대한 긍정은 즐거움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결핍된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갖는 것은 삶의 시작인 동시에 삶 자체일 것이다.
● 연관 기출문제
연세대 2005년 정시(세월과 욕망), 중앙대 2001년 정시(욕망과 행복), 서강대 2002년 정시(쾌락에 대한 시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