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롯데그룹의 맏딸이자 국내 유통계 대모인 신영자(74)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본격 겨냥하고 나섰다. 정운호(51·수감 중)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면세점 입점 청탁 명목으로 총 14억여 원을 받은 단서가 포착돼 출국금지한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신 이사장이 ‘정운호 게이트’의 유탄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검찰이 주요 수사 대상으로 설계한 ‘예정된 사정의 한 갈래’로 보는 게 정확한 접근이다. ‘검찰발(發) 롯데 사정(司正)’이 현실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롯데면세점 입점 로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시각이 많다. 검찰의 직격탄을 맞은 신 이사장도, 이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롯데그룹도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신 이사장에 대한 수사가 가시화된 것은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부장 박찬호)가 “신 이사장에게 금품을 줬다”는 정운호 대표의 진술을 확보하면서부터다. 검찰은 6월 2일 검사와 수사관 100여 명을 대거 투입해 서울 중구 롯데호텔 면세점사업부, 신 이사장과 그의 아들 장재영(48) 씨 자택, 아들 장씨가 대표인 면세유통업체 비엔에프(BNF)통상과 또 다른 업체 유니엘, 신 이사장 가족이 최대주주인 S사를 압수수색했다.
와인과 그림 능통한 ‘고급 브로커’
여기에 ‘수준급’ 브로커 한모(58·구속기소) 씨가 등장한다. 한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외국 대학에 다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어는 물론이고 독일어도 능통하게 구사하는 인물이다. 와인과 그림에 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정으로 각계 고위층을 두루 만났고 이 과정에서 신 이사장과 인연이 닿았다고 한다.정 대표가 한씨를 통해 신 이사장에게 접근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 대표는 한씨가 운영하는 I사와 2012년 네이처리퍼블릭의 롯데면세점 입점 등과 관련한 컨설팅 계약을 맺었다. 매장 수익의 3%를 수수료로 주는 게 계약의 골자다. 이를 통해 정 대표는 롯데면세점 입점이나 좋은 자리를 배정받는 데 한씨가 힘써주기를 기대했다.
정 대표는 검찰에서 “한씨를 통해 신 이사장에게 청탁 명목으로 돈을 줬다. 말이 컨설팅 명목이지, I사가 특별히 컨설팅해준 게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런 형태로 정 대표 측 자금 6억여 원을 한씨와 신 이사장이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신 이사장과 한씨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와 한씨 사이도 틀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정 대표가 2014년 7월 신 이사장 아들의 회사인 BNF통상과 비슷한 계약을 체결하고 총 8억여 원을 컨설팅 명목으로 송금했는데, 그 단서가 나왔다. 한씨는 정 대표와 신 이사장의 관계를 소상히 진술했다. 한씨는 컨설팅 계약이라는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 대표가 신 이사장 측에 건네는 로비자금이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신 이사장이 BNF통상의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신 이사장이 BNF통상 내부의 각종 증거를 폐기하고 검찰 수사 직전 개인용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교체한 사실도 공개했다. BNF통상 임원들은 현재 소환 조사조차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신 이사장은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정 대표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았겠느냐”고 주장한다. 신 이사장은 현재 롯데호텔, 롯데쇼핑, 롯데건설, 롯데자이언츠, 대홍기획, 롯데리아 등의 등기임원을 맡고 있다. 신 이사장 측 관계자는 “정 대표로부터 받은 돈은 BNF통상이 정당한 컨설팅을 해주고 받은 수수료”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BNF통상이 네이처리퍼블릭과 컨설팅 계약을 맺고 고액의 수수료를 받아온 것은 신 이사장이 자신의 아들 장씨를 챙겨주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장씨는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자다.
특히 장씨는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고도의 판단이 요구되는 컨설팅이나 기업 경영 활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그 대신 롯데그룹 출신 경영인 이모(56) 씨와 장씨의 아내가 경영 활동에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BNF통상 대표도 맡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 이사장에게 아들 장씨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 같다”며 “장씨에게 고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입원’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의 ‘아픈 손가락’인 아들
실제로 장씨에게 꾸준한 소득을 안겨줬던 상품 포장지 인쇄업체 유니엘은 현재 유명무실화된 상태다. 한때 ‘롯데가(家) 일감 몰아주기’의 전형으로 지목된 유니엘은 1991년 5월 장씨가 자본금 5000만 원으로 제영상공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등 롯데계열사의 전단지 제작과 각종 판촉물 제작을 도맡아 2004년 매출 440여억 원, 순이익 66억 원대로 급성장했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매년 10억~20억 원대 배당이 이뤄졌고 각종 주식투자로 회사 돈을 불린 흔적도 나온다.
이후 ‘일감 몰아주기의 전형’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목이 쏠리자 2007년부터는 매출 발생이 없는 상태. 하지만 2007년 이후에도 유니엘은 적자를 보면서도 2011년까지 매년 10억~20억 원을 장씨 등 주주에게 배당했다. 유니엘은 2006년 30억 원을 배당한 뒤 2007년 15억 원, 2008년 21억여 원, 2009년 21억여 원, 2010년 14억여 원, 2011년 10억여 원을 배당했다. 수년에 걸쳐 10억〜17억 원이 장기대여금으로 쓰이는 등 장씨 개인 회사처럼 이용된 흔적도 나온다. 공시에 따르면 교통비와 별도로 차량 유지비가 매년 5000만 원에서 1억 원가량 지출되기도 했다. 유니엘은 2007년 인쇄사업을 접고 부동산업으로 업종을 바꿨다. 현재는 레저사업과 부동산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하지만 실적이 없다.
검찰은 신 이사장이 BNF통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만큼 컨설팅 명목으로 지급받은 돈에 배임수재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더욱이 신 이사장이 직접 돈을 챙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건강이 나쁜 아들 장씨에게 지급해야 할 생계비를 사실상 네이처리퍼블릭을 통해 챙겨줬다는 것이다.
롯데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
이런 사정 속에서 롯데는 6월 29일로 예정한 롯데호텔 상장을 연기하고 주식 공모가도 낮췄다고 밝혔다. 공모주식 수는 4785만5000주로 변동이 없지만 공모가는 기존 주당 9만7000~12만 원에서 8만5000~11만 원으로 내렸다. 자연히 공모 규모도 4조677억~5조2641억 원 선으로 떨어졌다. 롯데호텔은 신 이사장의 비리를 ‘개인적 비리’로 한정 지으려는 분위기다.하지만 롯데를 바라보는 사정당국의 시선은 그리 녹록지 않다. 롯데호텔은 롯데쇼핑 등 롯데 주요 계열사를 거느린 한국롯데의 지주회사 격이다. 현재 일본 롯데홀딩스와 일본 투자회사들이 롯데호텔의 지분 99%를 보유해 ‘국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신동빈(61) 롯데 회장과 형 신동주(62)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벌인 ‘왕자의 난’에서 보여준 각종 잡음과 일본 광윤사를 필두로 한 불투명한 지배구조도 ‘국부(國富) 유출’ 여지가 있다고 사정당국은 보고 있다.
롯데 측은 상장하면 일본 측 지분율이 65%까지 떨어진다고 강조하지만, 과세당국과 사정당국은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롯데호텔의 상장으로 얻는 수익 대부분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구조가 유지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현재 검찰이 준비한 몇 갈래 사정수사 아이템이 6월 8일로 일정 부분 윤곽이 드러났다. 검찰총장 직속 수사기구인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대우조선해양을 압수수색했고,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방위사업수사부가 ‘정운호 게이트’를 수사 중이다. 이와는 별개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사 여러 건이 서울중앙지검 3차장 산하에서 준비되고 있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정운호 게이트, 그리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사 한 건이 하반기 사정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