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3월8일 판교지역 건설현장을 방문해 관계자에게서 건의사항을 듣고 있다.
3월8일 강 장관이 찾은 곳은 판교신도시 건설현장이었다. 최근 건설업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철근 사재기 동향을 파악한다는 게 방문 이유. 그래서일까. 이날 시찰에는 이례적으로 국세청 조사국장도 대동해 분위기를 잡았다.
현장경영 호들갑 … 많은 공무원들 ‘갸웃’
“최근 생산과 수입 등 공급엔 문제가 없는데 품귀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매점매석이 있다는 증거다.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사해 부당이득에는 철저히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강 장관)
시찰을 함께한 박상규 국토해양부 본부장도 강 장관을 거들었다.
“올 초엔 공급에 차질이 있었다. 하지만 2월 말부터 가격은 올라도 다시 수입이 진행돼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일부 유통상들이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해 사재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 장관의 발언이 전해진 후 경제관련 부처에는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 국세청 등에서는 비상연락망도 돌았다. “주말에 출근해 철근 사재기 동향을 파악하고 문제를 진단한 뒤 대책을 만들라”는 것. 특별히 국세청에는 철근 사재기에 나서는 철강 수입·도매 업체들의 세무관련 문제를 확인하라는 일종의 하명조사 지시도 떨어졌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이 3월10일 과천 정부 제2청사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 앞서 참석자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년 전 군사정권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 윗선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보고하는 식이다. 내라고 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냈지만… 실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관련업계는 이번 ‘철근 대란’의 원인을 내수시장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분위기다. 사재기 폐단도 있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다”는 것. 한국수입철강협의회 한 관계자는 “철근의 유동성 부족이 1차적 원인이다. 국내적인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국토해양부 한 관계자도 업계의 시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설명은 앞서 언급한 국토해양부 박 본부장의 설명과 다소 차이가 있다.
‘철근 대란’ 직전엔 ‘환율 대란’도 있었다. 강 장관은 “환율관리는 경제적 대외균형을 지키기 위한 주권 행사”라는 철학을 지닌 이른바 ‘환율론자’다. 그는 장관 취임 이후 줄곧 “환율을 안정적으로 운용해 중소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해왔다.
유탄을 맞은 곳은 환율문제의 제1 방어선인 한국은행이었다. “시장에 맡긴다”는 한국은행의 오랜 원칙은 이미 온데간데없어졌다. 금융감독원 등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때 아닌 환율시장 공부에 일과시간을 할애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금융감독원 한 직원은 “요즘 환율에 대해 공부 중이다. 관련 보고서를 (위에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직접 관련 부서는 아니지만 필요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준비없이 공표하는 지침 결국 발전 저해
그러나 환율문제는 생각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새 정부 출범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안 그래도 불안한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시장에서는 “정부의 대처가 늦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어 이명박 정부의 뒤통수를 친다. 한국은행 한 관계자는 “실효성 없는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주장만 있지 액션은 없다”고 정부 정책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샌드위치를 들고 스탠딩 회의를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현장에 대한 간섭, 대(對)국민 홍보용 현장 챙기기가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나라당 출신의 청와대 한 관계자조차 “대통령이 직접 전봇대도 뽑고 생활필수품도 챙기고 물가지수도 관리하는데 공무원들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며 우려를 표시할 정도다.
여론의 도마에 오른 이명박 정부의 ‘전시행정’ 사례는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렵다. 지금은 뽑혀나간 ‘대불공단 전봇대’는 이 대통령의 전시행정 사례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됐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마치 폭로하듯 터져나왔던 이 대통령의 유류세 10% 인하 방안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 나온 ‘50개 생필품 관리’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다음은 3월17일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 나온 이 대통령의 발언.
“(정부의 유가대책을 언급하면서) 과거 부처 이름만 산업자원부였지 대책은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 같다. (물가급등을 우려해) 물량 수급을 통해 생필품에 해당하는 품목 50개를 집중 관리하라.”
대통령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물가관련 부처인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통령이 얘기한 50개 품목이 뭘 지목한 것인지 진상 파악에 나선 것. 하지만 정작 업무보고 당시에는 어느 한 사람 대통령에게 50개 품목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았고 토론조차 없었다는 후문이다. 업무보고가 끝나고 나서야 각 부처는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냐며 허둥지둥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 기획재정부 한 관계자는 “물가관리를 잘하라는 뜻 아니겠느냐. 50개 품목이라는 건 상징적인 것이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물론 이 같은 전시행정이 이명박 정부에서만 불거진 것은 아니다. 어느 정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정권 초기에 그런 일이 많았다.
참여정부 초기에도 ‘공무원 다면평가’가 전시행정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당시 청와대는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 이름도 생소한 대통령정책프로세스개선비서관이라는 자리까지 만들었지만 사업은 시작도 못한 채 졸속추진 논란만 남기고 사라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밝힌 ‘대통령이 주재하는 전국 시·도지사 회의와 시장·군수·구청장 대표자회의’도 전시행정 논란을 빚었고, 2003년 5월 국세청 전 직원의 20%가 넘는 5000명 이상이 투입됐던 부동산 투기 일제단속은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문을 닫아거는 파업에 들어간 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통령과 정부의 전시행정 사례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들은 정부가 준비 없이 공표하는 행정지침이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제와 행정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고 평가한다. 박대순 강원대 교수(행정학)의 설명이다.
“기업이라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규모가 다르다. 정치지도자는 거시적 목표를 세우는 역할에 활동의 중심을 둬야 한다. 목표가 실현되는 전술적인 부분은 각 부문 책임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창의성이 높아지고 주인의식이 생긴다. ‘전시행정’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행착오에 빠질 때 공무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정부는 장기적인 발전동력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