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관들을 모아 ‘통치철학’을 만든 유우익 대통령실장(오른쪽)과 이명박 대통령.
지난해 12월20일 오전, 국립현충원을 방문한 이명박(MB) 당시 대통령 당선인은 헌화와 분향을 한 뒤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국민에게 희망을 드리겠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전날 대통령 당선 소감을 밝힐 때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이는 당시 국민에게는 ‘감동’이었다.
‘BBK 특검 수용’ ‘재산 헌납’ 등 비우는 모습 보여줘
대통령선거 막판 최대 이슈였던 ‘BBK 주가조작 의혹 사건’.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측은 김경준 씨의 말을 인용해 “이명박 이름 빼주면 구형량을 3년으로 맞춰주겠대요”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총공세에 나섰다. 김씨의 친필 메모도 신문광고에 등장했다. MB 측의 ‘강경 맞대응’은 당연한 순서. 하지만 어느 날 MB 측은 대응방식을 바꾼다.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못난 사람, 이명박’…. 자신을 ‘낮춘’ 신문광고가 등장하고 ‘재산 헌납’ ‘BBK 특검 수용’이라는 예상치 못한 대응이 이어졌다. 싸우지 않고 자신을 ‘비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시 모임에서 여러 ‘통치철학’이 논의됐어요. ‘섬김의 정치’ ‘싸우지 마라’라는 ‘제왕학(帝王學)’도 그때 나온 겁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유우익 현 대통령실장이 국민대 조중빈 교수에게 ‘MB의 국정운영 철학 프로듀싱’을 요청한다. 전문경영인(CEO) 출신 후보의 ‘철학 부재’를 메워달라는 ‘특명’과 함께. 유 실장은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사람으로 당시 MB의 싱크탱크라 불리던 국제정책연구원(GSI) 원장을 맡고 있었다.
조 교수와 영남대 김영수 교수, 성균관대 이기동 전헌 교수, 항공대 최봉영 교수 등이 ‘MB 경연관(經筵官)’으로 나섰고 서울 종로구 내수동 GSI 연구실에서 서너 차례 만나게 된다.
당시 경연관들은 어떤 통치철학을 내놨을까. 최 교수는 “정치의 본질은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라며 “‘다스림’은 ‘모두 다 사랑하다’와 연관이 있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 잘살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살맛나는 세상론(論)’을 설파했다고 한다. 그는 MB의 ‘실용정치’는 결국 ‘다살림(국민이 다 잘사는) 정치’가 돼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고 한다.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걸 원했다”
2월22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해단식 후 인수위 건물을 나서는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같은 맥락에서 ‘BBK 사건 대응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한 교수는 “한국 사람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을 깨끗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MB는) 깨끗하다고만 하지 마라. 부끄러운 게 있으면 있다고 해라”고 진언했다고 한다. 모임의 한 참석자는 “이후 BBK 사건과 관련해 MB 측이 날선 공방을 삼갔다. 자신을 낮추더라”고 했다.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도 주요 강론(講論) 대상.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1977년 저술한 ‘섬김의 리더십’을 소개한 모 교수는 “경영학 모델이지만 대통령의 리더십과도 맞닿아 있다. 봉사에 초점을 두고 국민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섬김의 리더십’ ‘공무원 머슴론’은 지금도 MB 철학의 키워드다. 하지만 이 책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 1996년 4월 미국의 한 경영 전문 출판사가 다시 출간하며 경영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다. MB가 미국에 체류하던 90년대 후반 이미 접했을 수도 있다.
김 교수는 세종의 ‘생생지락(生生之樂)’을 강조했다. 만물이 편안하게 다 잘사는 세종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지난해 11월 MB는 관훈클럽에서 “생생지락의 편안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라며 김 경연관의 강론을 인용한다.
이 교수는 “대통령은 어머니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 잘산다고,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따뜻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며 ‘어머니 정치론(論)’을 설파했다는 전언.
한창 강론을 듣고 메모하던 유 실장은 가끔 “옛날 건데… 요즘도 통할까요?”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이시니까 납득이 잘 안 되겠다”며 MB가 공감하면서 ‘실전 투입’에 써먹을 수 있는 통치철학을 주문했다고 한다. ‘MB 통치철학 부재’를 자인한 셈이다.
모임의 한 참석자는 “유 실장도 (대선이) 급하니까 차분히 통치철학을 완성하기보다는 대선 때와 취임 후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걸 원했던 것 같다”고 했다. 경연관들은 5장 내외의 짧은 글을 유 실장에게 전달했다.
여론 역풍을 몰고 온 ‘영어 몰입교육’도 강론 대상. “영어교육을 강조하고 국민들 부자 만들겠다는 말은 앞세우지 말라고 했죠. 자칫 백성(국민)은 뭔가 ‘모자라는 사람’이란 심리적 부담을 줄 수 있거든요.” 경연관들은 영어교육은 ‘교육정책을 통해 조용히 실행할 수 있는 사안’으로 결론냈지만 영어 몰입교육을 주창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MB는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됐다.
경연관들은 요즘 우려스럽다고 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서민 눈높이와 맞추지 못한다” “‘무위이치자 기순야(無爲而治者 其舜也·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도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순임금)’라고 했는데…”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무명’의 이명박 씨를 중용했다. 본인은 (안목의) 혜택을 입었지만 사람을 모시는 안목은…”이라는 반응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