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월9일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제로 개헌하자는 내용의 대국민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개헌안 발의카드를 활용해 임기말 권력 관리에 나설 것이란 정치적 예측이자 진단이었다. 당시 맹 의원의 예측서는 정치권의 관심을 끌었지만, 청와대는 “맹 의원이 점쟁이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신당 창당 등 여당 정계개편에 직접적 영향
2006년 2월2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북악산 산행에 나섰다.
개헌에 대해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인 노 대통령은 사실 개헌론자다. 대통령 후보 시절 기자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5년 단임제의 폐해를 거론하곤 했다. 해박한 법률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논리 끝자락에는 항상 개헌(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이란 대안이 뒤따랐다. 2002년 대선공약집에 개헌론이 비중 있게 자리잡은 이유도 그의 이런 소신과 무관치 않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노 대통령의 386 측근인 백원우 의원(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이 개헌을 위해 지난해부터 기회를 엿봤다”고 말했다. 1월9일 노 대통령이 꺼내든 원포인트 개헌 카드가 즉홍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여론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야당은 물론 여당도 개헌을 제안한 노 대통령의 진정성에 의혹을 제기한다. 다급한 노 대통령이 탈당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임기단축 카드로 대선구도를 흔들려고 한다는 의구심이 해소되기는 했지만, 싸늘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2007년 1월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재경 대구경북 신년교례회에 참석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좌).<br>1월9일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이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방문해 개헌문제를 상의하고 있다(우).
노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의 요체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개헌이 되면 18대 총선과 17대 대선이 동시에 치러진다. 2007년 연말에 동시선거가 실시된다면 정치인들의 관심은 대선이 아니라 자신의 선거(총선)다. 그 이전에 ‘공천 전쟁’까지 거쳐야 한다. 어떻게 보면 ‘4년 연임제’보다 ‘대통령-국회의원 임기일치’라는 제안이 정치권 처지에서는 더 충격적일 것이다. 우리당 인사들에게 이런 선거구도는 약이자 독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개헌 발의 땐 한나라당 빗장 고집 힘들어
정치권 인사들은 개헌에 대한 부담은 둘째치고, 이런 정치지형 변화에 따른 충격도 소화하기 힘들다. 야 4당이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정략에 근거한 판 흔들기라면서 철저히 무시하는 데는 이런 배경도 한몫한다.
1월11일 노 대통령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2월 중 개헌을 발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칼을 뽑은 이상 승부를 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노 대통령이 이처럼 마이웨이를 외칠 경우 정치권은 맞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노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하면 특히 한나라당은 계속 빗장을 걸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통령의 개헌 발의권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이다. 대통령이 발의권을 행사하면 국회는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의결해야 한다. 이를 거부하면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나쁜 대통령’이라며 개헌 제안을 무시한 한나라당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장 먼저 우려되는 것은 내부 균열이다. 한나라당은 현재 단일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 개헌 저지 전선은 비교적 탄탄하다. 그러나 대립은 장기전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세 달 이상 대치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이 기간에 일사불란하게 단일 대오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나라당의 두 축인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의 입장도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질 수 있다.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두 사람은 즉각 반대하며 같은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앞서가는 이 전 시장과 추격하는 박 전 대표에게 전달되는 개헌의 강도와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앞선 이 전 시장은 어떤 경우든 판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한다. 당연히 개헌이란 빅 이슈의 등장이 달갑지 않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경우 입장이 다르다. 추격의 고삐를 다잡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판을 흔드는 노 대통령에게 어느 순간 우군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같아도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 틈새를 노린 노 대통령의 갈라치기 전략이 작동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여론이다. 여론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청와대와 야당의 상황도 달라진다. 노 대통령이 개헌 이슈를 제기하면서 기대한 것도 열린우리당이나 친노세력이 아닌 여론이다. 여론만이 개헌을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다음 정권에서 개헌’ 여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는 이런 민심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까.
청와대 측이 개헌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개헌과 관련한 세계 각국의 자료를 모으고 헌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여론조사도 여러 차례 실시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맞추는 개헌’에 대해 묻는 여론조사에서 국민 80% 정도가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 정권 임기 내 개헌’에 대해서도 55% 이상이 찬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9일 노 대통령이 국민담화를 통해 개헌 의제를 던진 것은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개헌 역풍 잠잠할까, 거세질까
그러나 노 대통령이 개헌 화두를 던지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각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현 정권 임기 내 개헌’에 대해서는 절반 이상이 반대하고 나선 것.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한 노 대통령의 말이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개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명분을 노 대통령이 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론 싸움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강조한다. 청와대는 현재 여론을 6대 4 정도로 반대가 찬성보다 많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정도는 홍보를 통해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알린다면 뒤집을 수 있다는 게 청와대 측의 판단이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이 현재 이유 없이 당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등을 돌렸던 지지자들이 당하고 있는 노 대통령 주변으로 몰려들 것으로 전망한다. ‘시간은 노 대통령의 편’이라는 주장이다. 청와대는 적절한 시점에 대국민 직접 대화에 나서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이런 제안 및 개헌 발의가 모두 거절당했을 경우다. 그렇게 된다면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약해지고 대통령의 리더십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는다. “결국 개헌이 안 되면 대통령을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적 야심을 위해 끊임없이 계산했으며, 그 계산에 따라 던지고 버렸다. 국민들은 이 버림의 미학에 심취했고 열광했다. 이를 통해 노 대통령은 신화를 썼다. 개헌정국에 임하는 노 대통령은 그때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달라진 여론은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노 대통령을 불만과 경계의 눈길로 쳐다본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공신화를 다시 쓰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야 4당은 11일 노 대통령의 청와대 초청을 거부했다. 개헌 여론을 확산하려던 노 대통령의 첫 번째 계획이 차질을 빚은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개헌 역풍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개헌 카드를 빼든 노 대통령이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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