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15일 영국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 퍼레이드에 참석한 케이트 미들턴. 이날 이 학교를 졸업한 윌리엄 왕자는 근위기병대에서 복무할 예정이다.
‘파팍… 파파파팍’.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를 자랑하는 케이트가 흑갈색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채 모습을 드러내자, 길 건너에서 대기하던 카메라의 플래시가 속사포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불과 5초. 케이트가 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 10여 m 떨어진 집 앞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파파라치들은 다음 날 아침 타블로이드 신문 1면을 먹여 살릴 먹잇감을 구해야 한다.
다소곳한 요조숙녀의 얼굴로는 성미 까다로운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편집장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이 ‘예비 왕자비’를 웃기든 울리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독자들의 눈길을 확 끌어당길 만한 표정을 잡아내느냐의 여부에 이날 아침 출동한 파파라치들의 ‘일당’이 걸려 있는 셈이다.
과잉 취재로부터 케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왕실 측과 파파라치들은 한때 ‘길 건너에서만 촬영한다’는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0.001초의 순간에 최고 1000만원짜리 사진이 왔다갔다하는 파파라치들의 세계에서는….
“10년 전 다이애나 교훈 벌써 잊었나”
현장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날 아침에도 일부 TV 카메라맨이 대열을 무너뜨리자 30여 명의 사진기자와 파파라치들이 순식간에 대로를 건너 케이트의 코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고 한다. 사실 유명 연예인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영국 파파라치들이 가장 즐기는 습관 중 하나는 어떻게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불쾌한 표정을 잡아내는 일이다. 파파라치들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촬영 매너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미녀스타가 가운뎃손가락이라도 한 번 치켜올려 주면 이들로서는 대특종을 건지는 셈이다.
상대방의 악에 받친 표정을 유도하기 위해 근접촬영으로 쉴새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을 두고 파파라치들은 ‘호스로 물을 뿌린다’는 은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아무리 호스로 물을 뿌려댄다고 한들 ‘예비 왕자비’가 손가락을 치켜들 수야 없는 일. 케이트는 흥분을 가라앉힌 채 차에 올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길에 나섰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받아든 독자들은 평소와는 다른 영국 신문들의 태도에 적잖이 놀랐다. 우선 60만 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최고 권위지 ‘더 타임스’가 곤혹스러워하는 케이트의 얼굴 사진을 실은 것이 아니라, 케이트의 코앞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파파라치를 클로즈업한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기사 역시 케이트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아닌, 윌리엄 왕자의 대변인이 언론들을 향해 지나친 취재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발언 내용이었다. 왕실 측 변호사들이 영국 언론의 사생활 침해 행위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도 실렸다.
실제로 왕실 측 변호사들은 케이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언론중재위원회 제소나 민사상 대응은 물론, 유럽연합 인권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직 왕실의 호적에 오르지도 않은 ‘예비 며느리’를 보호하기 위해 왕실 측이 공식 대응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아직까지 케이트 미들턴은 런던 시내 한 패션회사에서 구매보조 직원으로 근무하는 젊은 여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왕실 측이 일찌감치 파파라치들에게서 케이트를 보호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들어간 것은 뭐니뭐니해도 찰스 황태자의 부인이던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왕실 측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다이애나가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과속운전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벌써 다이애나의 교훈을 잊었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부 언론 ‘탈파파라치’ 선언하고 자정 노력
2006년 6월12일 영국 남부 서리 리치먼드에 있는 폴로클럽에서 데이트 중인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가 카메라에 잡혔다.
그동안 이 신문이 게재해온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이나 케이트의 사진 등만 보더라도 ‘더 선’이 얼마나 극성스럽게 이들의 뒤를 쫓았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이 불콰해진 윌리엄 왕자와 표정이 상기된 케이트가 함께 나이트클럽을 나서는 사진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동료들과의 여행 일정을 알아내 결국 비키니 차림의 케이트를 렌즈에 담아내는가 하면, 얼굴만 내놓은 채 바닷물에 몸을 담근 두 사람 뒤의 나체 관광객을 클로즈업함으로써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도 ‘더 선’의 편집 전략이었다. 짧은 스커트에 망사 스타킹을 신은 케이트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을 야릇한 포즈로 포착한 사진이 이 신문의 1면을 장식했는가 하면, 주차위반 딱지를 끊으려는 경찰과 옥신각신하는 케이트의 사진도 ‘더 선’에는 놓칠 수 없는 특종이었다.
그런 점에서 ‘더 선’과 ‘더 타임스’ 등 대중지와 권위지를 아우르며 영국 독자의 4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뉴스 인터내셔널이 파파라치 사진을 게재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단순한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번 결정에는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뉴스 인터내셔널의 ‘탈(脫)파파라치’ 선언은 그야말로 선정적 사진의 공급 채널을 제한하겠다는 것일 뿐, 그러한 사진의 게재를 줄이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회사가 ‘상업주의’를 무기로 미디어 시장을 장악한 세계적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뉴스코프 그룹의 영국법인인 데다,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는 무가지와 타블로이드 시장의 경쟁환경을 감안한다면 ‘더 선’같은 대중지가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적 로맨스를 놓칠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라파치들이 찍은 케이트의 비키니 사진 한 장 가격이 2만5000파운드(약 4500만원)까지 치솟고 있는 마당에 ‘더 선’이 아니더라도 이 사진을 실어줄 타블로이드 신문은 넘쳐날 것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더 선’의 편집자들로 하여금 더 ‘화끈한’ 사진을 요구하는 독자들과 ‘탈파파라치’를 선언한 경영진의 방침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게다가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가 설령 소문대로 올해 약혼한다고 해도 스타성을 두루 갖춘 이들 커플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둘러싼 뉴스는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