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는 결혼 전엔 친구들끼리 훌쩍 춘천이며 부산에 다녀오기도 했고, 여름 휴가 땐 혼자서 홍콩행 패키지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리핀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여행이란 ‘꿈’같은 얘기가 됐다. 더욱이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를 집에 두고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그래서 K씨는 외국의 사진과 함께 분위기에 어울리는 짧은 에세이나 글을 찾아 블로그에 올린다. 최승자 시인이나 김남조, 조용순 시인의 시를 특히 좋아한다. 또한 긴 글보다는 그림과 ‘서늘한’ 감성의 시가 블로거들 사이에서 훨씬 인기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다. 새로 포스팅을 하면 ‘K님의 블로그는 언제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라는 댓글이 10여 개씩 붙는다. K씨는 즉시 정성껏 답글을 쓴다.
K씨는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도 갖고 있다. 딸의 사진을 앨범으로 올리기 위해 시작했다. 미니홈피는 ‘일촌’에게만 공개해 외부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니홈피에서 K씨는 애교가 넘치고 자상하다.
“어느 쪽도 실제의 나와는 많이 달라요. 아무래도 방문자를 의식하게 되니까요. 블로그의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모습이고, 미니홈피의 나는 지금의 저와 정반대예요. 현실에서 저는 무뚝뚝한 성격이거든요.”
“실제와는 많이 다른 나, 방문자 의식”
K씨는 얼마 전까지 다른 블로그를 갖고 있었다. 직접 만든 음식의 사진과 예쁜 케이크 사진들, 그리고 시를 올리는 블로그였다. 이를 통해 알게 된 남성을 ‘오프라인’에서 만난 순간, K씨는 블로그와 현실의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고 한다. 거짓말을 해왔다는 기분에 K씨는 두 번 다시 그 요리 블로그를 찾지 않았다. 그 전에는 남편이 우연히 보고 ‘여왕병 말기 아니냐’고 비웃는 바람에 버린 블로그도 있었다. 이제 K씨는 지인에게는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 블로그에서는 닉네임처럼 신비한 존재로 남고 싶을 뿐이다.
여성 작가인 A씨는 사진과 이름을 공개한 뒤 ‘쿨하다’ ‘대가 세다’는 댓글이 지속적으로 붙자 자신의 미니홈피를 폐쇄했으며, 지금은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가명을 빌려 다른 미니홈피를 운영 중이다.
“미니홈피의 내가 실제의 나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미니홈피의 나를 기대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나를 만나면 ‘다르다’는 말을 하니까 당황할 때가 많았죠.”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듀나’는 블로그에만 존재하는 사이버 인간이다. 현실의 ‘듀나’를 만나본 영화배우나 기자는 없다. 단지 사이버 공간에서만 e메일이나 댓글로 접촉할 수 있는 ‘듀나’는 “현실의 집안일도 충분히 복잡한데, 평론가 듀나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 다중적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은 이들 외에도 적지 않다. 사실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이들은 혼자서 노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나’를 만들며 노는 중일 것이다. 블로그, 홈페이지, 메신저, 온라인 게임 등 새로운 윈도가 열릴 때마다 다른 ‘나’를 꾸며야 하고 새로 생긴 ‘이웃’(블로그), ‘일촌’(미니홈피), ‘친구’(메신저), ‘혈맹’(게임)들도 챙겨야 한다. 인기가 떨어졌거나 싫증난 나는 그냥 ‘버리고’ 새로운 나를 만들면 된다. 2006년에 태어난 UCC(이용자 제작 콘텐츠)란 개인 미디어는 ‘끼 있는 나’를 만들라는 쉽지 않은 의무까지 부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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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 ‘시즌2’와 미니홈피 ‘씨2’구조.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에 사이버 공간의 ‘또 다른 나’는 기술시대에 대한 환상과 공포의 상징적 의미였다. 그러나 현재 개인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여러 명의 ‘또 다른 나’는 단어의 뜻 그대로 각각의 강력한 정체성을 지닌 ‘나’로 존재감을 굳혀가고 있다.
개인 미디어 속의 다중적 정체성은 현실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UCC에서 ‘마빡이’로 다시 태어난 수많은 오프라인의 ‘나’가 그 단적인 예다.
2007년 2대 개인 미디어인 네이버 블로그와 싸이월드 홈페이지가 각각 ‘블로그 시즌2’와 ‘씨2’를 오픈하고 사용자 끌어오기 대결을 벌이고 있는 점도 ‘더 개성 있는 나를 만들고 싶다’는 ‘나’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서비스팀의 임삼열 씨는 “사람들은 멋진 옷을 사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로그의 나를 꾸미고 싶어한다. 이에 따라 ‘시즌2’는 많은 면에서 커스터마이즈드된 블로그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동차나 운동화처럼 ‘튜닝’할 수 있는 블로그가 ‘시즌2’라는 것이다.
‘씨2’의 개발책임자인 SK커뮤니케이션즈 박지영 부장은 “극소수만이 개인 미디어에 논리적인 글을 쓴다. 개인 미디어는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매체가 아니다. 매우 감성적이고 대중적인 서비스라야 한다. 이런 요구를 수용한 것이 ‘씨2’다”라고 말한다. ‘씨2’는 ‘오픈마켓’ 기능도 갖출 것으로 보여 ‘관계 지향’이라는 개념이 ‘자기 표현’과 ‘쇼핑’으로 대폭 바뀔 가능성이 높다.
황상민 교수(연세대 심리학)는 “현실의 나와 오프라인의 관계들에 대해 ‘정이 떨어질 때’ 개인 미디어의 ‘나’에 집착하게 된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누구나 현실에 불만이 있다. 대통령도 현실 관계가 불만스럽기에 인터넷 속의 ‘나’를 통해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이버상에서 다중적 정체성 혹은 유연한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대개 현실에선 규범적 관계에 매여 있지 않거나 그런 관계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학생이나 주부, 연구원 등이 가장 많죠. 역으로 대기업 샐러리맨들은 사이버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조직화한 대기업이 인터넷 서비스 사업을 못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미국에서 급속히 세 불리는 ‘세컨드 라이프’
초기 인터넷 시대, 미국의 전 부통령 앨 고어나 프랑스의 조스팽 대통령 같은 정치가들, 과학자들, 빌 게이츠 같은 기업인들은 입을 모아 ‘정보통신 네트워크’에 대해 “다양한 민주주의의 희망을 제시하면서 지식과 문화로의 접근,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좌파 진보주의자들도 2001년 무렵 전 세계에 확산된 블로그 같은 개인 미디어가 사회를 개혁하는 강력한 연대 수단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최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세컨드 라이프’. 3D 그래픽으로 쇼핑, 데이트, 운동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놀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꾸미는 다양한 포맷이나 ‘관계’들을 끌어모으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나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라’고 권하죠. 유저들이 온라인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은 상업적 면에선 도움이 되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일반 가정에까지 깔린 덕분에 시각 이미지와 영상, 게임 중심으로 개인 미디어가 발달했어요. 미국이나 유럽만 해도 초고속망이 없어서 텍스트 중심의 개인 미디어가 많다 보니 저널리즘적, 사회비판적 블로그가 발달한 데 비해 한국적 블로그는 매우 즉각적, 감정적, 관계지향적인 특징을 갖고 있죠. 인터넷상의 ‘관계’들이 현실처럼 ‘주고받는’ 수고스런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해도 되는 ‘호혜적’ 관계라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입니다.”(김영주 언론학 박사·한국언론재단 미디어연구팀)
최근 미국에서 급속히 세를 불리고 있는 ‘세컨드 라이프’는 말 그대로 ‘또 다른 삶’을 사는 사이버 정체성의 내가 집도 사고, 별장도 사고, 콜라도 마시고, 섹스도 하는 인터넷 사이트다. 미국인들은 모니터 안의 ‘그림’ 코카콜라나 나이키 운동화(코카콜라와 나이키의 기업 매출이 ‘진짜로’ 일어난다)를 사기 위해 ‘달러’를 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한국에선 초딩들도 ‘도토리’를 사려면 엄마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말이다.
현재 상상할 수 있는 - 하지만 전문가들조차 앞으로 무엇이 더 나올지 모르는 - 자기표현의 욕구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나’는 UCC다. 이미 포털업계를 넘어서 방송사와 연예기획사들도 상업적인 UCC 확보에 뛰어들었다. 포털 다음이 JYP 엔터테인먼트, 케이블 MTV와 손잡고 ‘UCC 스타발굴 오디션’을 열고 KT는 영화사 싸이더스FNH, 포털 파란, IPTV 등과 함께 4억원의 상금을 걸고 UCC 공모를 시작했다.
1700만명이 가입한 싸이월드, 가장 자유로운 블로그 ‘이글루’ 등을 인수하고 네이트, 네이트온, 메타블로그 ‘통’ 등을 결합해 네트워킹 서비스를 완비한 SK커뮤니케이션즈의 로고가 ‘좋은 사회’나 ‘미래’가 아닌 ‘사람을 향합니다’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을 향한 인터넷, 이젠 세상을 향할 때
결국 ‘나’만의 비밀스런 공간에서 나의 의지와 감성을 자유롭게 발현해 만들어낸 ‘나’는 나와 개인 미디어 업체들의 상업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인 것이다. 사이버 공간의 ‘나’들은 존재하기 위해 ‘튀어야’ 한다. 인터넷의 정체성이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터넷업체의 유전자를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블로그의 ‘나’와 미니홈피의 ‘나’, 메신저의 ‘나’, 게임 속의 ‘나’, UCC의 ‘나’라는 ‘부족민’들의 유형이 만들어진다.
이미지와 관계에 몰입하는 미니홈피의 ‘나’들은 명랑했다가 내면에 침잠하기도 하는 등 감정 기복이 크고, 젊은 여성의 말투를 쓰며, 놀이공원에서 걱정 없이 노는 10대 같다.
이에 비해 블로그의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외계어’를 싫어하며, 싸이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방문객을 기다리는 남성이거나 중성의 캐릭터다. 약간 ‘스노브(snob)’한 면도 있다.
채팅하는 ‘나’는 각종 이모티콘들과 ‘--^’ 같은 기호들을 남발한다. ‘압훌사’‘얼헙쇼’ 같은 완전히 다른 언어가 통용되므로, 초딩과 직딩이 동등한 정체성을 갖는다.
현실의 나는 개인 미디어라는 ‘맥락상’ 특정 사이트에 로그온 하는 순간, 각기 다른 행동 공간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다른 자아로 ‘스위치 온’ 된다. 다중적 정체성들은 24시간 네트워킹된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지만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므로 독립적이고, 헷갈리지도 않는다(드물게 보이는 이런 사람은 다면성격장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표현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몰개성화한 개인 미디어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일까? 소프트웨어 자바(Java)를 만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으로 미국 정보기술미래위원회 의장이었던 빌 조이가 뒤늦게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연구를 중단할 수도 있다”며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 즉 인간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는 유명한 글을 쓴 것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몰개성화한 나의 복제물들, 상업화의 틀로 만들어진 다중적 정체성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역시 개인 미디어를 통해 실천되고 있다. 영상운동을 하는 ‘미디액트’의 이주훈 사무국장은 “현재 대다수 개인 미디어들이 ‘삶의 재조직’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진 못해도 이를 목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전문가 그룹과 콘텐츠가 탄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새로운 맥락이다”라고 말한다. 싸이의 ‘일촌’에 싫증을 느끼고, 더 자유로운 블로그를 찾아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싶어하는 ‘나’야말로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에 대한 가장 희망적인 전망인 것이다. ‘인간을 향한’ 인터넷은 이제 ‘세상을 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