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사실 공개와 DJ의 격노, 그리고 그의 병원행을 지켜본 김 부대변인의 느낌은 ‘권력이란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착잡함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린우리당이 분당을 해 나간 지금도 참여정부가 DJ의 권력을 승계했다고 믿고 있다. 민주당의 다른 고위 관계자인 J 씨도 같은 생각이다.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을 버리고 분당을 했을 때 “언젠가는 다시 합칠 세력”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도청 사실 공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J 씨는 이를 배신행위로 표현했고, 동교동의 정서적 온도도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이다.
“DJ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모독”
“DJ 정권이 도청을 했다고 한 것에 대해 DJ는 일생을 모독당했다고 생각한다. 집권 당시 조직적으로 도청을 했다면 노벨평화상은 뭐가 되고, 인권대통령으로서의 체면은 뭐가 되느냐.”
그는 평심으로 살아가던 DJ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점을 유의해달라고 말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DJ의 속내를 바로 읽지 않으면 참여정부와 동교동 간에 또다시 정치적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DJ의 입원은 싫으나 좋으나 정치행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현직 대통령의 보이지 않는 갈등도 깊어갈 수밖에 없다.
DJ 측은 지금도 자신들이 정치사찰과 도청의 최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집권 당시 여러 차례 도청 근절 의지를 밝힌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참여정부가 자신들의 순혈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를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동교동 측에서 “미림팀의 도청 내용과 거기에 나오는 삼성은 어디로 가고, 불법 도청에 대한 불명예를 국민의 정부가 다 뒤집어쓰느냐”는 불만이 쏟아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동교동 측은 김 원장의 도청 발언에 배경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한 민주당 지도부 K 씨의 설명도 비슷하다.
“그들(청와대)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참여정부는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려다가 국민의 정부를 갖다붙인 것이다.”
김효석 의원(맨 오른쪽), 유종필 대변인(맨 왼쪽) 등 민주당 당직자들이 8월1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기 위해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했다.
먼저 국정원의 조사가 지극히 부실한 점이 지적된다. “왜 그렇게 서둘렀느냐”는 또 다른 의문도 나온다. DJ 측은 국정원이 뭔가에 쫓기듯이 서둘러 발표했다고 주장한다. 김정현 부대변인은 “조사가 부실하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조사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국민의 정부도 도청했다는 김 원장의 발언이 정치적 의도로 포장돼 의혹의 날개를 펴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국정원의 발표 시점 선택이 노 대통령의 연정론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 나아가 정치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YS와 DJ 세력 및 주도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라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는다. 정치 개혁과 세력 교체를 동시에 겨냥, 도청 후폭풍을 유도했다는 것.
맨손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핵
물론 이런 정도의 내용이 DJ의 격노 배경으로 설명되는 전부는 아니다. 이미 정치권에서는 느닷없는 DJ의 격노 이면에 5년여의 방랑을 끝내고 돌아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나돈 지 오래다.
8월11일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들어서고 있는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
병상정치에 나선 DJ 측의 결기는 어느 때보다 강하다. 노정객은 그런 모습으로 노 대통령과 맞설 태세를 보인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쪽은 노 대통령이다. 그는 ‘살아 있는 권력’이다. 명분도 선점하고 있다. 정계를 은퇴한, 거기에다 세력도 없는 DJ로서는 이런 구조에 맞설 현실적인 수단이 많지 않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 대통령과 DJ 관계는 ‘애증’으로 점철됐고, 대북송금 특검, 분당 등 갈등의 고비고비마다 DJ가 뒤로 물러앉은 것도 이런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청 후폭풍에 휩싸인 DJ의 이번 노기는 과거와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맨손처럼 보이지만 DJ도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수당으로 전락했지만 민주당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를 매개로 ‘호남’이라는 지지기반과도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느슨한 시스템도 가동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호남권에서 DJ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한다. DJ의 입원이 여권에 대한 불만으로 비칠 경우 현 정부에 대한 호남 민심의 이반으로 번질 가능성은 매우 크다. 정권의 기반인 호남권이 등 돌릴 경우 여권은 엄청난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당장 10월 재·보선과 내년 5월 지방선거에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또다시 지역을 볼모로 한다”는 비판이 비등하지만 이런 여론을 신경 쓸 만큼 동교동이 한가하지 않다. DJ의 격노에 여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DJ 비서실 출신인 열린우리당 문희상 대표와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통해 진화에 나섰지만 DJ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을 것 같다.
이런 틈을 노리고 민주당도 반(反)우리당 여론 확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유종필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구정당인 한나라당에 팔아넘긴 것”이라며 칼날을 세웠다. 호남 민심도 이에 부응하는 눈치다. 민심 동요는 각종 여론 조사에서 감지된다. DJ 측도 이런 기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눈치다. 동교동 한 관계자는 “광주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한때 거론했었다”고 말했다. 다만 선동정치를 한다는 역풍을 우려, 계획을 포기했다. DJ는 9월6일 개관 예정인 김대중컨벤션센터 행사 참석을 예정했었다. 정계를 은퇴한 지 2년여, DJ는 다시 정치 구심력을 회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