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1월17일 161권 중 5권이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
“내가 누구의 딸인지를 잊어달라.”
한일협정 문서 일부 공개를 시작으로 불붙은 ‘제3공화국’으로의 회귀는 △문세광 사건(육영수 여사 피살) 미스터리 공개 △박 전 대통령 친필 광화문 현판 논란 △영화 ‘그때 그사람들’ 개봉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의 정수장학회 강탈 의혹 조사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 교과서 검정 통과가 이어지면서 과거사 정국은 불을 뿜었다. 당시 여권은 “‘박근혜 죽이기’ 의도가 없다”고 밝혔으나, 한나라당은 “여권이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박 대표, 이완용의 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정국의 시계바늘이 또다시 ‘박정희 시대’로 되돌아갈 기세다. 정부 한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는 광복 60주년(8월15일) 직후(23일 또는 24일)에 한일협정 문서 ‘전체’를 공개하기로 결론짓고 막바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일협정 관련 문서는 모두 161권으로, 1월 공개된 청구권 관련 5권을 빼고 남은 156권이 이번에 모두 공개된다(국익에 현저히 반하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극히 일부 내용 제외). △공개 안 된 청구권 관련 문서 △기본관계 관련 문서 △재일교포 법적 지위 관련 문서 △어업 문제 관련 문서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문서가 한꺼번에 햇빛을 보는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드러나는 박 전 대통령의 과(過)가 있다면 이는 박 대표에게 또 다른 악재다. 30년이 경과한 외교 문서는 일반에 공개하게 돼 있다는 점에서 한일협정 문서 공개가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순수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후폭풍의 중심에 박 대표가 자리 잡은 건 여권도 잘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해 6월 중순 한 여권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일협정 40주년인 6월22일에 맞춰 공개하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광복절 전후가 아무래도 문서 공개의 파괴력이 더 크지 않겠는가. 한일협정 문서가 모두 공개되면 박 대표는 ‘이완용의 딸’이 될 수도 있다. 청구권 문제에 이어 독도 영유권 문제 및 문화재 반환 협상과 관련해 군사정권의 ‘굴욕 협상’ 전말이 드러나면 나라가 다시 한번 시끄러워질 것이다.”
청구권 관련 부분은 1차 공개에서 상당 부분 드러났다. 1월 공개된 청구권 관련 문서들에 따르면 회담 과정에서 일본 측이 피해자들에 대한 개별 배상도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으나 정부 차원에서 일괄 배상을 받겠다며 ‘정치적 타결’로 협상을 마무리한 뒤 실제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개별 보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 문서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앉은 사람).<BR>강제위안부 할머니가 도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60년대 초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이끈 인사들의 모임인 `‘6·3동지회’ 이재오(한나라당 의원) 회장은 “박정희 정권이 일본에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며 “기점을 울릉도에 선정해놨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줬다”고 주장했다. 김-오히라 메모의 이면을 비롯해 추가로 공개되는 한일협정 문서엔 이렇듯 일본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데 빌미가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문화재·독도 문제 등 시한폭탄 거리 많아
문화재 관련 한일협정 문서엔 한국 정부가 협정 체결을 서두르면서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무능하게 다룬 내용도 들어 있다. 당시 정부는 문화재 문제를 부속품처럼 다뤘다는 비판을 들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이 점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는 지난해 말 현재 3만4000여점. 전문가들은 일본이 구입하거나 약탈해간 문화재가 10만점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 가운데 한일협정에 따라 돌려받은 문화재는 도자기, 석조미술품, 도서 등 불과 1400여점에 그친다.
굴욕 외교 논쟁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또 과거사 정국에서 박 대표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와 여권의 공세엔 ‘야당 대표 죽이기’라고 맞대응 할 수 있으나 1차 공개 때 박 대표에게 비수를 꽂은 바 있는 이재오 의원을 비롯한 당내 비주류 인사들의 움직임이 박 대표에겐 더 부담일 수 있다. 6·3세대인 이명박 서울시장에게도 한일협정 문서 추가 공개는 호재다. 태풍이 박 대표를 향해 안팎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다.
반면 노 대통령은 과거사 정국으로 ‘재미를 좀 봤다. 일본을 향해 ‘할 말을 하면서’, 지지율이 가파른 오름세를 탄 것이다. 3월1일 노 대통령은 “일본이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는 ‘깜짝 발언’을 하기도 했다. 3월 하순 대통령 지지율이 48%로 올 과반에 근접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일본을 향한 강공이 지지율 급등의 요인이라는 해석이 따라붙었다.
정부는 “일본이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법적으로 가능한지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1951년 전승국 주도로 이뤄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에 서명국 자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이 전승국에 포함되지 않아 일본은 배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청구권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과연 배상은 가능할까.
정부는 청구권 협상에서 빠진 강제위안부 등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상 및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무관하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65년 한일협정의 토대 아래서 식민지 지배라는 ‘불법 행위’에 기인한 피해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놓고는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일본이 배상할 부분이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면서 “어느 쪽 주장이 우세한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한일협정 문서 완전 공개와 관련해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대통령이나 여당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라고 말했다. 민족사적 숙원을 해결하는 문제인 데다 덤으로 군사정권에 일부 뿌리를 둔 한나라당을 압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과 여권은 박정희 정권의 과가 드러날 때마다 반사이익을 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역풍이 만만찮을 것 같다. 대통령 지지율은 롤러코스터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