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8일 서울 종로구 수송빌딩 앞에서 있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현판식 모습.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2005년 지금, 대한민국의 검찰은 조직 역사상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도전을 각계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법원과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공판중심주의로 가겠다고 벼르고, 경찰은 수사권 조정을 말합니다. 게다가 여권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어 검찰의 힘을 빼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해낼 것임을 확신합니다.”
5월 말까지만 해도 추락하는 검찰권을 지켜보는 검사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검찰의 표정은 한결 나아 보인다. 극적인 반전을 꾀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이하 공수처)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 문제도 노무현 대통령의 검·경 자제 발언 이후 국회에서 싸워볼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가장 큰 관건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이하 사개추위)의 ‘공판중심주의’ 개혁 방안조차 7월6일 사개추위 실무위원회의 5인 소위원회(위원장 신동운 서울대 교수)와 11일 열린 제6차 실무위원회 본회의에서 검찰의 의견을 대폭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사개추위의 혁신적 개혁안을 기대하고 있던 경찰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닭 쫓던 개’ 처지가 되고 말았다. 5인 소위원회의 결정 이후 인터넷에는 경찰 논객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일부 경찰관들은 ‘근조 사법개혁’을 외치며 사개추위를 공격하고 나섰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전쟁이 여론(1차)과 국회(2차)를 넘어 이제는 사개추위(3차)로 공이 넘어간 모양새다.
사개추위는 7월18일 전체 본회의를 열어 실무위원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형사소송법 개정안’ 및 ‘고등법원 상고부 도입 방안’ 등을 최종심사를 거쳐 통과시킬 예정이다. 이른바 사개추위 개혁안의 양대 축인 ‘로스쿨 설립’과 ‘공판중심주의’가 8부 능선에 다다른 형세다.
경찰·행자부 등 강한 반발
그렇다면 검·경의 수사권 조정과는 별 관계없어 보이고, 사법개혁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법정심리 절차의 개정 논의가 제3차 검·경 수사권 전쟁으로 불거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시기는 4월 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과 소장파 학자들로 구성된 사개추위 실무추진팀에서 △피고인이 부인하는 검찰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부인 △검찰이 추진 중인 영상 녹화물 증거 채택 △재판에서 피고인 신문 완전 폐지 등 ‘검찰이 작성한 조서 중심’ 재판 관행을 혁파하는 개혁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지나치게 집중되고 독점화된 검찰 권력을 분산하고, 검사들의 역할을 공소 유지에 한정한다는 사개추위의 의도와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안이 맞아떨어지면서 검찰은 더욱 큰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사태가 불거지자 평검사들은 수뇌부를 향해 “형사소송 구조 전체가 뒤흔들리는 판국인데, 사안의 중대성도 인식하지 못하고 대검 수뇌부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5월4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들은 “사개추위 위원장과 법무부 장관의 합의도 국민의 참여가 배제된 일종의 밀실 타협에 불과하므로 그 절차와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발했다. 총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종빈 총장은 위신에 큰 상처를 입었고, 검사들은 당시 김승규 법무부 장관(현 국가정보원장)에게 서운함을 공공연하게 토로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개추위가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여론이 검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검찰은 ‘영상 녹화물만이라도 증거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수세적 처지에 몰렸다. 이때만 해도 ‘검찰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부인’은 움직일 수 없는 대세로 보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현재, 사개추위의 태도는 180도 돌변하고 말았다.
“경찰 불신 완전 떨쳐지지 않아”
사개추위 5인 소위원회는 7월6일 그동안 검찰과 첨예한 갈등을 빚어왔던 ‘형사소송법 개정 방안’과 관련해 △변호인이 입회한 상태에서 작성한 검찰 조서에 증거능력 부여 △다른 증거나 증언으로 사건 규명이 안 될 경우 영상 녹화물의 증거능력 인정 △재판에서의 피고인 신문제도 존치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한마디로 검찰 쪽 의견이 대폭 반영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논란이 가중되자 새로운 개정안에 합의한 5인 소위원회의 성격도 문제가 되었다(상자 기사 참조).
그렇다면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 경찰이 애당초 기대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경찰은 공판중심주의로의 변화를 통해 검찰 조서, 즉 검찰 수사권의 무력화나 최소한 경찰의 조서가 법원에서 검찰의 것과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피의자 조서의 법정 증거능력 부여’는 곧바로 수사권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개추위의 한 법학과 교수는 “이번 논의는 검·경 수사권 쟁점과 무관하게 공판중심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는데, 경찰이 뒤늦게 참여하면서 상황이 애매해졌다”고 말했다. 이에 경찰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경찰은 논의 주체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는 것이 경찰 위상의 현주소를 말하는 것 아닌가” 하며 반발했다.
공판중심주의란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판사가 중심이 돼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검찰과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가 범죄 사실을 자백했다 하더라도, 법정에서 부인하면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껏 검찰의 수사 내용은 법정에서 그대로 증거로 쓰여 ‘조서 재판’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사개추위가 처음 제시했던 안은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갔다가 검찰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후퇴한 셈이다. 또한 경찰엔 법원에서 검찰 조서와 같이 경찰 조서를 동등하게 대우받거나 검찰 조서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을 내심 기대할 빌미를 줬다.
결과적으로 5인 소위원회의 결론은 검찰과 법원의 경찰 따돌리기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공판중심주의로 힘을 얻은 법원의 결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도 장기적으로는 날려야 할 판인데, 경찰 조서를 동등하게 증거능력으로 인정해주기는 힘들다. 그리고 현재 법원은 검찰 조서를 부인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사개추위 실무위원회의 모 위원은 “현재 판사 수나 검찰 조서를 인정해온 법조계의 관행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양쪽이 원만한 타협을 이뤄냈음을 암시했다. 실제로 5인 소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검찰과 법원의 물밑 접촉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민변과 우리법연구회 소속 등 진보적 법조인들로 구성된 사개추위 실무추진팀은 복잡하게 엉켜 있는 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게 될까. 사개추위 관계자는 “비대화한 검찰의 권한을 줄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찰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떨쳐진 것은 아니다”고 토로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법원은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해야 할 마당에 경찰의 수사권까지 챙겨주며 법원의 파트너로 삼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
현재 많은 사개추위 관계자들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지금은 말하기 곤란하지만 곧 밝혀질 것이다”며 언급을 삼가고 있다. 그럼에도 확실해진 것은 앞으로 경찰이 수사권 조정을 위해 검찰과 국민에 대한 설득뿐만 아니라 법원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