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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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을에 찾아온 ‘한여름 밤’의 기억, 진추하

가수와 배우, 사업가 아내의 삶을 말한다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17-11-07 15: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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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

    남산에 살짝 단풍이 든 날 그를 만났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때까지 ‘진추하(사진)’를 중국어 발음으로 알고 있었다. 정확히 환갑인 그가 노란색 옷을 입고 나타나 건네준 명함에 ‘陳秋霞’라고 적혀 있어 ‘어!’ 했다. 의심 없이 그를 좋아한 소년 시절, 진추하가 중국 발음으로 들렸던 탓이다. 陳秋霞의 광둥어 발음은 ‘천추샤’, 보통어 발음은 ‘천치우시아’, 그리고 영어 이름은 ‘첼시아 첸’이란다. 

    한국, 홍콩, 대만 무대와 은막을 사로잡던 그는 24세이던 1981년 말레이시아 화교 재벌인 중팅썬(鍾廷森·73) 라이언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그때 홍콩에서 24세는 ‘과년’했다고 한다. 그 뒤 세 딸을 낳았고 모두 사업가로 성장했다. 현재 라이언그룹은 유통과 부동산, 광산, 철강, 농업 분야에서 44개 업체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것이 철강인지라 중 회장은 ‘철강왕’으로 불린다. 

    진추하는 이 그룹이 만든 라이언팍슨재단의 주석(主席)이다. 사람들은 그를 ‘꽃자리’만 앉아온 이라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능력이 없으면 바로 조롱당하며 쫓겨나기에 ‘앉으라’고 해도 저어하며 피하는 이가 태반이다. 그가 운(運)을 만들어간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연예인과 어머니, 사업가의 아내로 성공해온 그를 대상으로 인물 탐구를 시도해봤다. 

    그는 홍콩의 산업화가 한창이던 1957년 서민 집안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언니가 연예인 꿈을 갖고 있어 그도 연예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언니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경험만 하고 19세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해내는’ 성격이라고 했다.

    영화 ‘사랑의 스잔나’로 국내서 빅히트

    진추화가 낸 앨범들. 
영화 ‘사랑의 스잔나’ OST 앨범(왼쪽)과 ‘Dark side of your mind’.

    진추화가 낸 앨범들. 영화 ‘사랑의 스잔나’ OST 앨범(왼쪽)과 ‘Dark side of your mind’.

    “우리 가족은 큰 건물 옆에 불법으로 증축한 듯한 차고 같은 곳에 살았다. 여덟 살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레슨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무료로 배운다고 하면 허락해줄 것이냐’고 말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영국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을 드나들며 2년간 피아노를 익혔다. 학생 때는 연기를 아주 좋아했다. 친구들을 모아 연극 연습을 했는데, 여학생은 거의 없었고 남학생들과 많이 했다. 나는 감독과 주인공을 도맡았다. 몰입을 잘해서 울어야 하는 대목이 있으면 펑펑 울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묻곤 했다. 친구들한테는 ‘왜 너는 주인공만 하니’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서인지 집중할 일이 아니면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예계에 진출했다. 언니, 오빠가 독립했기에 어머니는 그에게 ‘올인’했다. 스태프 10여 명을 거느린 매니저 구실을 맡은 것. 어머니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도 알려줬다. 걸그룹은 없었고 댄스가수도 드문 시절이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조용히 노래하는 그는 ‘티 없이 맑다’는 느낌을 줬다. 홍콩류(流)가 휩쓸 때라 금방 아시아 스타가 됐다. 

    1976년 한국과 홍콩의 영화사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를 만들었다. 한 남자를 두고 자매가 경쟁하다 언니가 몹쓸 병에 걸려 죽으면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다는 신파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영어로 ‘One Summer Night’와 ‘Graduation Tears’, 중국어로 ‘우연(偶然)’을 불렀는데 다 히트했다. 모두 그가 작곡한 곡이었다. 언어가 다르면 가사의 뜻이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감정과 감흥을 건드는 가락은 전달될 수 있다. 영국인 부부로부터 귀염을 받아 피아노를 익히고 친구들과 연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는 그것을 음으로도 표현해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작사는 못해봤다. 다양한 일을 겪고 많은 책을 읽어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작사이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2002년 다시 서울에 왔는데 공항으로 마중 나온 여성의 휴대전화 컬러링이 ‘One Summer Night’였다. 호텔에 도착해 로비를 지나가는데 필리핀인으로 보이는 한 여가수도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 내 팬클럽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홍콩류는 사라지고 한류가 아시아를 덮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홍콩에서 1년, 일본에서 반년,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2년, 그리고 대만에서 4년 동안 활동했다. 그런데 나라마다 그가 많이 불렀던 노래가 다르다고 했다. 홍콩에서는 상처받은 이를 위로하는 ‘일점촉광(一點燭光)’이, 대만에서는 ‘Graduation Tears’가, 싱가포르에서는 ‘우연’이 애창곡으로 꼽힌다고 한다.

    “남을 돕고자 옛 노래 부른다”

    한국 팬클럽 회원들을 만난 진추하. 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를 만나는 등 명사이기도 하다.[김도균 기자]

    한국 팬클럽 회원들을 만난 진추하. 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를 만나는 등 명사이기도 하다.[김도균 기자]

    대만에서 중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땐 냉랭하게 대했다고 한다. 익숙지 않은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바꿨다. 그와 결혼하자 어머니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중 회장의 저택에는 수영장이 있고 시중을 들어주는 이도 많았다. 그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만난 어머니가 “네가 나와 지낼 때처럼 응석을 부리면 보디가드들과 경비원들이 너를 수영장에 던져버릴 거야”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혼자 헤엄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몰입으로 형성된 내성적 성격을 버리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려 노력했다. 웃어야 상대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밝아지려 애썼다. 사업가 집안의 안주인 구실을 소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30여 년이 지나 다시 노래의 세계로 돌아오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대사업가의 아내이다 보니 다른 소임이 주어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를 만날 수 있었고, 말레이시아 화교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쓸 수 있게 됐다. 사회복지재단을 맡아 자선사업도 했다. 그는 “민망해도 참고, 이제는 남을 돕고자 옛 노래를 부른다”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쳐야 할 것 같아 “홍콩에도 가을이 있나. ‘가을 노을’ 추하는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 언니 이름은 ‘여름 노을’ 하하(夏霞)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홍콩에는 단풍 드는 가을이 아닌, 긴 옷을 입는 가을이 있다. 아버지는 그런 계절에 비까지 와 운무가 낀 날 내가 태어나 추하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그런데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찾아봤더니 내가 태어난 날 홍콩에는 비가 오지 않은 것으로 돼 있어, 아버지가 말을 지어낸 게 아닌가 생각했다. 1940년대 홍콩에서는 공추하(龚秋霞·공치우시아)라는 여가수가 아주 유명했다. 아버지가 그의 이름에서 ‘추하’를 따온 것은 아닌가 추측해본다. 언니 이름은 메이바우(美寶)다.(웃음)” 

    재벌가 안주인은 연예인과는 상충하는, 참으로 어려운 자리다. 그는 몰입으로 욕심을, 청순함으로 오만을, 소통으로 벽을 허물 줄 알았기에 그 자리를 지켜낸 것은 아닐까. 그러한 노력이 그를 ‘진추하’에서 관록 있는 ‘진여사’로 바꿔놓은 것 같다. 그와 헤어져 나오면서 바라본 남산에 옅은 가을 노을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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