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근 성인용품점이 확 달라졌다. 기존 성인용품점이 후미진 건물 2, 3층에 위치하던 것과 달리 대로변 1층에 문을 연 곳이 늘었다. 내부 분위기도 환한 조명, 은은한 바닐라향, 부드러운 재즈 선율, 세련된 인테리어 등 고급 커피숍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 많다. 진열된 제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스플레이도 아기자기하다. 20대 젊은 직원들은 제품의 명칭과 용도를 상세히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젊음의 거리인 서울 홍대 앞 곳곳에서 이런 성인용품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0월 31일 이른바 ‘연트럴파크’라 부르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 인근 건물 1층에 위치한 ‘레드컨테이너’를 찾았다. 커피숍,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에 자리한 데다 겉으로는 팬시용품점처럼 보여 손님들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호기심에 들렀다 구매, 단골도 늘어
2년 전 출시된 여성용 흡착형 자위기구 ‘우머나이저’는 국내 수입 전 온라인 카페에서 공동구매하는 이들이 있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레드컨테이너’ 홍대점 2층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컨테이너 외관이 인상적인 성인용품점 ‘레드컨테이너’는 연트럴파크라 부르는 경의선 숲길 1층에 자리했다(왼쪽부터). [박해윤 기자]
진열대 전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립스틱 모양의 제품이 눈에 띄었다. 직원에게 묻자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은 여성용 자위기구 우머나이저”라는 민망한 답이 돌아왔다. 바이브레이터, 딜도 등 삽입형 기구의 원리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우머나이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동법을 궁금해하자 직원은 “손바닥을 대보면 알 것”이라며 전원을 켜고 만질 수 있도록 해줬다. 이어 “클리토리스 흡착 방식으로 바이브레이터와는 원리가 다르다. 고객 취향에 따라 디자인도 여러 가지”라며 흡착형 여성용 자위기구의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했다. 한참 어려 보이는 20대 여직원이지만 전문용어로 외설스럽지 않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성교육 강사처럼 느껴졌다.
2층으로 올라가자 좀 더 과감한 제품들이 있었다. 윤활제, 섹시토이, 러브링, 섹시 란제리, 코스튬 등 적극적인 성생활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제품이었다. 특히 란제리는 가리는 부분보다 드러내는 부분이 많을 정도로 과감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또 영화에서 보던 수갑과 채찍 등 성생활 분위기를 반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난감들도 놓여 있었다.
한쪽 코너에 ‘여성 출입금지’ 간판이 걸린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남성 전용 공간으로, 19금 사진이 붙은 남성용 자위기구가 진열돼 있었다. 유럽산, 일본산으로 양분됐는데 모양과 재질, 성분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원리는 같았다. 이곳에 대해 직원은 “제품 자체가 대놓고 보기에 민망한 부분이 있어 남성 고객들이 구경하는 것조차 쑥스러워한다. 고객 배려 차원에서 따로 공간을 마련했고, 설명도 여성 직원이 하는 것을 꺼리는 이가 많아 남성 직원이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자 손님이 없을 것 같다고 하자 “은근히 찾는 분이 많다. 거의 수입제품인데, 품절되거나 품절 임박한 제품이 상당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레드컨테이너는 1월 성인용품 도매업체 코스모스사가 서울 이태원동에 1호점을 연 뒤 홍대 앞, 성수동, 건대 앞 등에 차례로 문을 열었다. 또 연말에 이수, 강남에 지점 오픈이 예정돼 있다. 홍대점은 7월 문을 열었는데 입소문이 퍼지면서 3개월 만에 손님이 급격히 늘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제인(37) 대표는 “처음에 손님들 반응이 궁금했는데 다들 ‘밝고 신선하고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성인용품점에 대한 선입견을 깬 곳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오픈 초기에는 호기심에 들어왔다 그냥 둘러보고 나가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보고 찾아와 이모저모 따져보고 구매하는 이가 많아졌다. 또 재구매하려고 방문하는 이도 상당수”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요가 강사였던 제인 대표는 커플, 부부 등을 대상으로 수업하던 중 성생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성생활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 가운데 요가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성인용품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시장조사를 꾸준히 했고, 요즘 성문화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는 추세라 전망이 밝아 보였다. 앞으로 성을 건강하게 즐기는 쪽으로 바뀔 거라는 판단 하에 사업을 시작했다”며 창업 계기를 설명했다.
여성 전문 성인용품점, 2년 만에 급성장
성인용품점 ‘플레저랩’ 내부 모습.[박해윤 기자]
“전 세계 성인용품 소비층의 70%가 여성인 만큼 국내에도 분명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여성도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고 여성용 제품들을 볼 권리가 있잖아요. 그동안 우리나라는 여성이 마음 놓고 들어갈 성인용품점이 거의 없었고, 저렴한 제품을 비싼 값에 팔면서 검은 봉지에 담아주는 식이었죠. 주변 친구들과 사업과 관련해 많이 이야기했고 잘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곽 대표와 의기투합한 최정윤 공동대표는 여성 전문 성인용품점을 오픈하고자 성인용품 도매상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도매상들은 남성 전문 제품 위주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고 심지어 “젊은 여성인 당신들이 남성을 대상으로 자위 인형을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편견을 뒤로한 채 사업을 강행했고, 지금은 많게는 하루에 20건씩 가맹점 문의 전화를 받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업계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가족이나 친구들은 ‘건전한 성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인정하고 응원해줬어요. 우려와 달리 ‘이런 공간을 만들어줘 고맙다’는 손님도 많이 생겼어요. 전화로 상담을 요청하는 분도 있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성생활의 즐거움을 모르다 중년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알게 됐다는 분도 있죠. 지금은 매장 운영뿐 아니라 유럽, 홍콩 등 유명 브랜드 수입 유통과 자체 브랜드 제작 등 사업 영역이 넓어졌어요. 또 후발 주자도 생기는 등 시장을 키우는 데 일조했고, 연매출 20억 원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성공한 셈이죠.”
외국계 기업도 오프라인 매장 진출
내 ·외 부가 모두 카페를 연상케 하는 국내 1호 여성 전용 성인용품점 ‘플레저 랩’은 여성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 호평을 받고 있다. [사진 제공 · 플레저 랩]
내 ·외 부가 모두 카페를 연상케 하는 국내 1호 여성 전용 성인용품점 ‘플레저 랩’은 여성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 호평을 받고 있다. [사진 제공 · 플레저 랩]
외국계 기업들도 국내에 진출하고 있다. 독일 최초 여성 파일럿인 베아테우제가 1946년 설립한 ‘베아테우제’는 성인용품 하나로 독일 주식시장에 상장까지 한 글로벌업체다. 지난해 10월 베아테우제는 이태원동에 1호점을 오픈했다. 기존 제품은 대부분 온라인몰에서 판매됐는데, 국내 유통 전문기업 ‘하운트아’에서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해 오프라인 매장을 연 것. 매장에는 여성 바이브레이터, 남성 자위 용품, 커플 아이템, 섹시 란제리 등 200여 종의 제품이 진열돼 있다. 특히 여성 바이브레이터가 전체 제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베아테우제는 이태원점 오픈을 시작으로 지방 대도시로 확장 중이다.
일본의 유명 성인용품 생산기업 ‘텐가’도 지난해 11월 한국 법인을 세우고 오프라인 매장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2005년 설립된 텐가는 남성용 자위기구, 바이브레이터, 윤활제 등을 판매하는 회사로, 현재 전 세계 45개국에서 5000만 개 이상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남성용 자위기구는 단순히 여성 질 모양의 실리콘 제품에서 벗어나 세밀한 돌기와 매끈한 굴곡, 압력 조절이 가능한 에어홀 등 뛰어난 기술력으로 남성들에게 신세계를 선물했다는 평을 받는다. 디자인도 겉면만 봐서는 화장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세련됐다. 지난해 국내 론칭 당시 남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한 온라인매체 기자는 시용기를 통해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선물했다면 마쓰모토 고이치 대표는 인류에게 텐가를 선물했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벌써부터 국내 오프라인 매장 론칭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소비자들은 이처럼 성인용품점이 문턱을 낮추고 고객 친화적으로 변화하는 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32세 미혼 직장인 여성 A씨는 “성인용품에 관심이 있어도 어떤 제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등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다. 대부분 인터넷에서 찾아보는데, 직접 보고 만져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나. 소비자들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구경할 수 있도록 더 대중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자친구와 사귄 지 3년쯤 됐는데 성관계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는 편이다. 우연히 바이브레이터 이야기가 나와서 ‘한번 사볼까’ 했더니 선뜻 괜찮다고 했다. 온라인몰에서 구매해 사용해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느낌은 아니어서 한두 번 쓰다 말았다. 만약 여성 전문 성인용품점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직접 가보고 이것저것 물어본 뒤 마음에 드는 걸로 샀을 텐데 좀 아쉽다”고 말했다.
2~3년 새 성인용품점이 양지로 나오고 있는 추세지만 아직 급속도로 성장하지 못하는 데는 규제가 심한 탓도 있다. 성인용품점은 유해시설로 분류돼 있다. 2008년 시행된 학교보건법의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에 따라 절대정화구역과 상대정화구역에서는 영업이 불가능하다. 절대정화구역은 초중고교 출입문으로부터 직선거리로 50m 이내, 상대정화구역은 학교경계선으로부터 직선거리로 200m 이내 지역을 말한다. 홍대 앞 상권은 홍익대 입구를 기점으로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합정역, 서울지하철 6호선 상수역까지 확장돼 있는데 이 안에 서교초, 서강초, 성산중 등 학교가 있어 이를 피해 입점해야 한다. 물론 법률을 지키는 것이 먼저다. 그러나 이처럼 상업지역에 학교가 있는 경우 학교와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도 200m 안에서는 영업할 수 없는 등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아직까지 제약 많아, 규제 완화 필요
지난해 국내 법인을 설립한 일본 성인용품 생산기업 '텐가'의 제품들. 얼핏 보면 화장품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부가 성인용품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다. 2월 통계청이 내놓은 ‘온라인쇼핑 동향’ 조사에 따르면 전체 시장 분류 가운데 성인용품은 ‘각종서비스 및 기타’ 항목에 묶여 있어 시장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집계되지 않고 있다. 해당 항목이 전체의 4%를 차지하는 것으로 봐서 스포츠·레저용품(3.1%), 농축수산물(2.4%), 신발(1.5%) 등에 비해 거래 규모가 크다고 추정할 뿐이다.
글로벌 통계정보 사이트 스태티스틱 브레인의 집계에 따르면 2014년 글로벌 섹스토이 시장의 거래 규모는 150억 달러(약 16조7200억 원)로 파악된다. 우리나라는 오프라인 거래가 음성적으로 이뤄져온 탓에 시장규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관련 업계가 온라인 쇼핑몰과 대형도매점 등 양성화된 시장의 거래 규모만으로 추산했을 때 2000억 원가량일 것으로 보고 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제품을 양성화된 경로로 구매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방안을 마련할 경우 거래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성인용품 판매업 관계자들은 하루빨리 우리나라에도 성인용품 산업을 관리하는 주무부처와 관리·감독기관이 마련돼 명확한 법적 틀과 위생안전 기준 안에서 영업하기를 바라고 있다. 곽유라 플레저 랩 대표는 “성인용품점이라는 이유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상호를 치면 홈페이지가 검색되지 않는다. 홈페이지는 성인인증을 거쳐야 제품을 볼 수 있어 문제가 없는데도 무조건 정보를 차단해놓아 부당하다고 느껴진다. 또 관련 용품 수입에도 법적 규제가 많다. 해외에서는 생리컵(삽입형 생리대)을 여성 전용 성인용품점에서 파는데 우리나라는 절차가 복잡해 판매가 어렵다”며 정부가 개선책을 마련해주길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