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쉰 전 국무원 부총리(오른쪽)가 1978년 아들 시진핑(현 국가주석)과 함께 하이난성을 방문했을 때 모습.[베이징 뉴스]
1928년 공산당에 입당한 시 전 부총리는 홍군(옛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서북지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45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조직부 부부장, 제1야전군 정치위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위원,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사건’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당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류즈단 사건이란 마오 전 주석을 추종하는 일파가 ‘류즈단’(시중쉰의 전우)이라는 인물을 그린 장편소설을 반당(反黨) 문학으로 규정하고 출판에 간여한 시 전 부총리 등을 제거한 것을 말한다. 이후 78년까지 옥살이와 공장 근무 등 16년간 고초를 겪은 시 전 부총리는 마오 전 주석이 사망하면서 광둥성 제1서기로 복권됐다.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시 전 부총리는 중국 공산당의 8대 원로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혀왔다.
시 주석도 부친 때문에 15세 때 황토고원인 산시성 옌안시 옌촨현의 산골 마을 량자허촌으로 하방(下放)돼 7년간 어렵게 생활했다. 하방은 문화대혁명 때 ‘농촌에서 배우라’며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낼 때 썼던 말이다. 시 주석은 이곳에서 토굴을 파고 생활했다. 시 주석은 토굴에서 들끓는 벼룩들과 싸우며 9전10기 끝에 공산당에 입당했고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량자허촌은 현재 ‘혁명전통 교육기지’가 됐다. 황토 산비탈을 파내 만든 토굴에는 당시 시 주석이 썼던 침상과 침구, 책상, 낡은 셔츠,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기념사진 등이 가지런히 보관돼 있다. ‘성지(聖地)’가 된 량자허촌으로 가는 길은 도로가 잘 닦여 있고 주변엔 새 건물들도 들어섰다.
철저한 충성파, 입만 열면 시진핑 찬양
시 전 부총리 묘소를 성역화하고 시 주석의 유배지를 성지로 만든 인물은 중국 반부패 총괄기구인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 새롭게 임명된 자오러지(趙樂際·60) 상무위원이다. 1957년 칭하이성 시닝에서 태어난 자오 서기는 74년 문화대혁명 기간 시 주석과 마찬가지로 하방 생활을 했다. 80년 1월 베이징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칭하이성의 주요 부처를 거쳐 2000년 칭하이성 성장으로 승진했다. 2003년 칭하이성 당서기가 된 자오 서기는 22년간 근무한 칭하이성을 떠나 2007년 3월 산시성 당서기로 자리를 옮겼다.산시성은 자오 서기 일가의 고향이다. 자오 서기는 같은 해 제17차 당대회 때 시 주석이 최고지도부인 상무위원에 입성해 차기 후계자로 낙점되자, 재빨리 시 전 부총리 묘소를 성역화했다. 또한 량자허촌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시 주석이 생활하던 토굴도 보존했다. 공산당의 개인숭배 금지 규정과 차기 후계자라는 점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 부친의 묘소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시 주석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흡족해했다고 한다.
시 주석과 자오 서기의 집안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자오 서기의 당조부(堂祖父) 자오서우산(趙壽山)과 시 전 부총리는 국공내전 때 서북야전군에서 각각 부사령관, 부정치위원으로 근무했다. 자오서우산은 시 전 부총리가 반당분자로 몰렸을 때 수차례 구명에 나서기도 했다. 시 주석은 부친을 도왔던 자오 서기 당조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16세에 혁명에 가담했던 자오 서기의 부친인 자오시민(趙喜民)은 시 전 부총리의 부하였다.
시 주석은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가 되자마자 자오 서기를 당 중앙조직부장에 임명했다. 중앙조직부장은 당의 모든 인사와 조직 관리를 총괄하는 막강한 요직이다. 당정 고위직은 물론이고 국유기업, 언론사, 공립대 등 4000여 명에 이르는 간부들에 대한 인사가 중앙조직부 권한이다. 이런 직책에 자오 서기를 발탁했다는 것은 시 주석의 신임이 매우 두텁다는 방증이다. 자오 서기는 지난 5년간 중앙조직부장을 지내면서 시 주석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반대파인 장쩌민 전 주석의 상하이방과 후진타오 전 주석의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출신들을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시 주석의 친위세력을 중요 보직에 포진시키는 등 시 주석의 1인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상당한 구실을 했다.
반대파 숙청 앞장설 것으로 보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 시중쉰 전 국무원 부총리 묘소 앞에 있는 조각상(오른쪽). 자오러지 상무위원 겸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인민일보,홍콩빈과일보]
또 다른 이유는 자오 서기의 충성심 때문이다. 자오 서기는 시 주석 숭배에 열렬하게 앞장서왔다. 자오 서기는 입만 열면 시 주석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충성심 덕분에 자오 서기는 산시성 당서기 때 측근인 웨이민저우 전 산시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이 8월 비리 혐의로 낙마했음에도 최고지도부의 일원인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자오 서기는 “시진핑 신시대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지침으로 삼아 전면 종엄치당(從嚴治黨·엄격한 당 관리)에 나서야 한다”면서 당 조직의 기강 해이와 부패 만연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앞으로 ‘새로운 칼잡이’가 된 자오 서기를 앞세워 반대 세력을 철저히 숙청할 것이 분명하다. 반면 시 주석은 과거 인연을 맺고 충성심을 보여온 인사들을 대거 중용하고 있다. 자오 서기를 필두로 이른바 ‘시자쥔’(習家軍·시진핑 군단)이 득세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마오 전 주석과 마찬가지로 ‘영수(領袖)’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시 주석은 말 그대로 ‘황제’라고 볼 수 있다.
서방 언론들과 중국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1인 독재체제를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에서 ‘중국이 개인숭배를 앞세우면서 지난 40년 이래 최악의 독재로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목소리는 중국에선 나오지 않고 있다. ‘호위무사’인 자오 서기의 서슬 퍼런 칼날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