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병원에서도 대학원 못지않은, 아니 더 심각한 폭행, 성추행 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자 수련과정을 밟고 있는 전공의 등이 교수나 선배들로부터 부조리한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욕설이나 폭언은 예사고, 상습적 폭행이나 성추행도 만연해 있지만 불이익이 두려워 쉬쉬하고 있었을 뿐이다. 정부나 국회 차원에서 해결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몇십 년간 쌓아온 구습을 씻어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언어폭력은 문제인지도 몰라
“(교수님이) 욕 하시는 것도 문제가 되는군요.”수련과정에서 담당교수로부터 폭언이나 욕설을 들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전공의가 한 대답이다. 욕설이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폭언은 병원 내에서 일상화된 풍경이었다. 10월 31일 밤 서울 근교에서 만난 A씨는 현재 수도권 소재 대형병원의 전공의 1년 차다. A씨는 “실수하는 순간 운 좋으면 욕설이고 보통은 맞는다. 간호사나 병원 직원 앞에서도 자주 욕을 먹는다. 가끔은 ‘지능이 낮은 것 같다’ ‘널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우니 나중에 내 밑에서 배웠다고 하지 마라’ 등의 폭언도 듣는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욕만 먹고 넘어가면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단순히 교수의 심기를 거스르기만 해도 폭언 등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이다.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는 교수가 전공의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방에 한 전공의의 인성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문자메시지에 답변이 20분가량 늦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당 전공의의 답변이 늦은 이유는 응급환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채 ‘개념이 없다’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글을 남겼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전공의 17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올해 기준 전공의의 70%가량이 ‘상급자로부터 폭언, 욕설 등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신체적 폭력과 성희롱 ·성추행을 당했다는 비율은 각각 10.2%, 20.3%를 기록했다. 대전협 관계자는 “심한 욕을 듣거나 인격모독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아예 문제라 생각지 못하는 응답자도 많았다. 이런 사례까지 전부 합치면 거의 모든 전공의가 폭언과 욕설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교수가 전공의를 직접 폭행하는 일도 병원 내에서는 놀랍지 않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전공의 B씨는 “환자의 사정 등 여러 이유로 수술이 연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부 과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수술이 늦춰지면 레지던트들이 교수나 선배들에게 말 그대로 두들겨 맞는다. 이 때문에 마취 전 혈액검사에 문제가 생길까 봐 전공의가 환자 혈액 대신 자신의 혈액을 뽑아 검사하는 일도 있다”고 밝혔다.
최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선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이 다리가 검붉게 피멍이 들거나 피부가 찢어진 사진 여러 장을 공개했다. 2014~2015년 2년간 부산 서구 부산대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11명이 S(39)교수로부터 폭행을 당해 입은 상처였다. 이 사진이 보도되면서 병원 내 참혹한 폭행 실태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부산 서부경찰서는 11월 1일 S교수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유 의원이 공개한 피해 사례에 따르면 S교수는 수술도구를 이용해 폭행하기도 했고, 심한 경우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올해 3월에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에서 당직근무를 하던 성형외과 전공의 2명이 무단이탈했다. 병원 자체 조사 결과 이들은 교수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병원에서 나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협 관계자는 “해당 교수가 (전공의가) 감정적으로 견딜 수 없는 폭언을 하고 신체적 폭행까지 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심한 경우 환자가 보는 앞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문제 삼으면 보복하겠다”며 협박까지
부산대병원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으로 전공의들의 다리와 발에 피멍이 든 모습.[뉴스1]
최근 서울 강남구 강남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1년 차 전공의 11명은 그동안 당한 성추행과 폭언, 폭행 사례를 담은 ‘전공의 제안사항’(제안서)을 작성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제안서에는 성추행과 폭행 내용뿐 아니라 병원 측에 시정을 요구했다 교수들로부터 협박을 당한 사실, 전공의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도 담겨 있다.
제안서에 따르면 모 교수는 회식자리에서 옆에 앉은 여성 전공의 C씨의 손을 잡았다. C씨는 당황해 손을 뿌리치고 다른 자리로 옮겼다. 하지만 해당 교수는 다시 C씨를 옆자리로 불렀다. 교수의 부름을 피할 수 없었던 C씨는 할 수 없이 교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교수는 C씨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추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다른 회식자리에서도 해당 교수는 C씨의 다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안으려 했다.
제안서에는 일부 교수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한 전공의가 당직근무에서 무단이탈하는 등 수련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도 있었다. 참다 못한 전공의들은 교수진에게 폭언, 성추행 문제를 정식으로 항의했다. 8월 전공의들이 의국 내 폭언, 폭행 및 성희롱 추행 사례를 모아 교수진에게 전달한 것.
하지만 한 교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가만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는 논문을 주지 않겠다’ 등 보복성 발언을 이어갔다. 해당 교수는 과거 다른 전공의의 취업을 방해한 전력이 있어 전공의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는 것. 결국 교수의 협박과 폭언을 참지 못하고 전공의 2명이 10월 13일 ‘개인 사유’를 들어 의국에 사직서를 냈다. 이에 다른 전공의들이 교수들의 폭언이나 성추행 재발 방지를 위해 제안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대전협은 10월 23일 성명을 발표했다. 대전협은 ‘관련 교수를 대한의사협회윤리위원회에 제소할 것이며 반드시 합당한 처벌을 받고 다른 전공의에게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연세대의료원도 자체 조사를 거쳐 해당 사건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병원 측은 “제안서를 작성한 전공의들에 따르면 유출된 문건이 최종본이 아닌 만큼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의료원 노조도 성명서를 내고 조합원을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수의 폭행 등을 견디다 못해 신고, 민원 등 절차를 밟은 뒤 불안에 떠는 전공의도 많다. 의료계에 소문이 퍼져 불이익을 받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부산대병원 S교수의 경우만 해도 폭행을 당한 전공의 11명 가운데 10명이 11월 1일 S교수의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S교수 가족과 병원 동료들의 설득으로 탄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인지, 군대인지
병원 내 동료 폭행과 관련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 강명재 전북대병원장.[뉴스1]
D씨는 “쉽게 이야기해 군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병원 업무가 서툴러 실수하면 어김없이 선배들의 욕설과 함께 폭행이 가해졌다. 손이 느리면 내 얼굴에 손이 날아오는 식”이라고 말했다. 또 일과 관계없이 선배들이 시키는 심부름도 힘겹긴 마찬가지였다. 담배나 커피 심부름은 예사고 발표자료를 대신 만들라고 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선배들의 발표자료를 만드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 걸으면서 졸기도 했다”고 밝혔다.
최근 전북 전주시 전북대병원 정형외과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선배 레지던트가 후배 레지던트 김모(32) 씨를 폭행하고 욕설을 퍼붓는 등 괴롭혀온 것. 2015년 3월 레지던트 발령을 받은 김씨는 11월부터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업무가 미숙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선배뿐 아니라 교수급 전문의들도 폭행을 가했다. 선배 레지던트는 식사비용 명목으로 김씨로부터 돈을 받아 가기도 했다. 결국 이듬해 2월 김씨는 반복되는 폭행과 폭언을 참지 못하고 병원을 나왔다.
김씨는 올해 7월 동료 의사들을 폭행 및 금품갈취로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은 이를 기소의견으로 송치해 현재 검찰 조사 중이다. 피의자들은 폭행 사실이 없다며 무고를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또한 병원 내 전공의들을 상대로 한 조직적인 금품갈취 실태도 폭로했다. 1년 차 전공의들이 선배들의 주말 식사비용으로 인당 50만 원에서 100만 원가량을 모아 냈다는 것. 병원 자체 조사 결과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전북대병원은 10월 26일 해당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강명재 전북대병원장은 입장문을 통해 “병원 자체 조사 결과 수련현장에서 확인된 규칙 위반 등은 즉시 시정조치했다. 하지만 폭행 사건은 검찰 조사 중이라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사실로 확인되면 가해자에게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신입 레지던트들로부터 돈을 걷는 등 금품갈취 관행은 의료계에 널리 퍼진 악습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방 소재 대학병원 2년 차 레지던트 E씨는 “아예 병원에 들어오기 전 선배 전공의가 공지사항이라며 ‘마이너스통장을 만들라’고 종용했다. 선배들 식사비와 회식비 명목이었다.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수련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병원에서 교수님 생일 선물비도 걷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서울 소재 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하는 중견 의사 F씨는 “군대식 문화가 강하고 인기가 많은 과에서는 신입 레지던트들이 선배와 교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다. 당시에는 ‘좋은 과에 갔으니 기분 좋게 한턱 낼 수도 있겠다’며 넘겼다”고 밝혔다.
전공의 괴롭힐 거면 뽑지 말라
인턴과정을 마친 후 3~4년간 전문과목을 수련하는 전공의(레지던트)들. 야간 당직이 잦고 업무 강도도 높다.[동아 DB]
복지부는 정형외과 전공의 폭행 사건이 발생한 전북대병원에 전공의법을 근거로 첫 행정처분을 내렸다. 처분 내용에 따르면 전북대병원 정형외과는 2018~2019년 2년간 레지던트를 선발하지 못한다. 같은 기간 인턴 선발 정원도 5% 줄였다. 전공의는 교육생인 동시에 매우 싼 임금으로 일을 시킬 수 있는 인력이기에 전공의 정원이 축소되면 병원은 타격을 입게 된다.
금전적 제재도 논의 중이다. 복지부는 전공의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고자 ‘의료질평가지원금’을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의료질평가지원금’은 병원의 수익을 보전해주려고 2015년 9월 마련된 제도다. △의료의 질 △환자의 안전 △공공성 △의료전달체계 △교육수련 △연구개발 등 6개 지표를 평가해 점수가 높을수록 많은 지원금을 받는다. 지난해 병원 전체 지원금 예산은 5000억 원이었다.
현재 평가 항목 중 교육수련 분야의 예산은 400억 원(8%) 규모다. 1등급부터 3등급까지 지원금이 차등 지급되며 하위 50% 미만은 받지 못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등급별 지원금 격차를 최대화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전북대병원 외에도 최근 민원이 접수됐거나 언론보도를 통해 제기된 전공의 폭행 사건 발생 병원에 대해서도 조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폭행 및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한양대병원 성형외과, 삼육서울병원 가정의학과, 양산부산대병원 등은 이미 복지부가 자료를 제출받아 검토하고 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부산대병원 정형외과에는 추가 자료 제출 명령을 내릴 방침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8월 30일부터 ‘진료실 폭행 신고센터’(신고센터)를 마련해 전공의 및 의료인 폭행 근절에 나서고 있다. 10월 25일 열린 상임이사회에서 의협은 신고센터가 폭력 가해자 교수의 지도전문의 자격 박탈을 요청하는 공문을 전문의 지정 자격이 있는 대한의학회 측에 보낼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