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이기고 우승을 확정한 KIA 타이거즈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스포츠 동아]
사실 스포츠 세계에서는 원래 그랬다. 특정 팀이나 선수가 매번 우승을 차지한다고 기사를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19년 반 동안 프로야구 무대에 머문 해태(현 KIA)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정상을 9번 차지할 때마다 언제나 ‘빅뉴스’가 됐다.
그래서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가 김응용 전 해태 감독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바뀐 건 좀 안타까웠다. 문 대통령 지지 여부와는 다른 문제다. 그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이듯 ‘야구의 것은 야구에게’를 떠올렸을 따름이다. KIA가 8년 만에 한국시리즈 1차전을 치른 10월 25일은 1997년 이 팀이 해태라는 이름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당시 해태 지휘봉을 잡고 있던 게 바로 김 전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다른 곳이 아닌 광주에서 열렸기에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어이 KIA가 4승 1패로 두산 베어스를 꺾고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KIA가 우승하면서 문 대통령 시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해야 할까.
프로야구 10개 팀이 연고지로 쓰는 8개 도시 어느 곳에서 야구가 특별하지 않겠느냐마는 광주는 확실히 야구가 특별한 도시다. 야구 종주국 미국이 각국 대사관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야구는 민주적(democratic)이다’. 그리고 광주야말로 야구가 곧 민주주의인 도시다.
광주의 한(恨) 덜어준 야구
교육부 출입기자 시절 5년간(2005~2009) 대학수학능력시험 원자료를 분석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시 광주는 2006년 이후 4년간 줄곧 평균 성적 1위를 차지한 도시였다. 그 이유가 궁금해 광주시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답변은 이랬다.“아무래도 5·18(민주화운동) 이후 실력이 없으면 당한다는 생각이 광주 사람들 사이에 깔려 있다 보니 교사나 학부모가 죽기 살기로 자녀들을 공부시켜서 그런 게 아닐까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 “지금 여쭙고 있는 건 교육청 공식 의견이다. 정말 그렇게 기사가 나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관계자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혹시나 해서 일선 학교에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기사로 나간 문장은 이랬다. ‘대부분 광주 출신인 교사들은 ‘공부만이 살길이다’는 신념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과거 광주가 소외받던 시절 만들어진 정서다.’
야구장에서도 그랬다. 그 소외받는 마음을 달래주는 존재가, 진짜 호남의 실력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해태였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해태의 우승은 호남의 씻김굿이었다”며 “(지금도 KIA가 응원가로 쓰는) ‘목포의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응원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1980년대 야구장을 찾은 호남 팬들이 해태 선수 이름 대신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하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갤럽이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프로야구팀 선호도를 설문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자 가운데 10%가 KIA라고 응답해 롯데(11%)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굳이 이런 조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엘롯기’(LG, 롯데, KIA)라는 표현처럼 KIA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인기 구단이다.
그런데 1987년 사정은 조금 달랐다. 6월 30일 광주무등야구장을 찾은 관중은 213명. 당시 프로야구 최소 관중 기록(현재 19위)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튿날(7월 1일) 광주무등야구장에서는 이 기록이 195명(현재 15위)으로 줄었고, 다음 날(7월 2일)에도 또 같은 곳에서 132명(현재 6위)으로 기록이 바뀌었다.
야구적 민주주의는 광주에서 꽃핀다
1987년 10월 25일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한국시리즈 통산 3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해태(현 KIA) 타이거즈.[스포츠 동아]
당시 프로야구는 전·후기로 나눠 치렀다. 그해 전·후기 우승 모두 당시 권력의 중심지 TK(대구·경북)가 연고인 삼성 라이온즈가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해태가 4승 무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해태가 그해 정상을 차지한 날도 (당연히) 10월 25일이었다. 그 뒤로도 삼성은 2001년 전반기를 마지막으로 팀 이름이 KIA로 바뀔 때까지 한국시리즈에서 끝내 해태를 넘지 못했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한 건 2002년. 당시 한국 대통령은 한때 호남 사람들이 복받쳐 불러야 했던 그 이름, 김대중이었다.
‘‘慶北高-光州一高(경북고-광주일고), 숙명의 격돌’이라고, 정말 대문짝만하게 ‘미다시’를 뽑은 ‘日刊스포츠’로 모자를 만들어 李선배와 나는 하나씩 머리에 썼다. (중략) “광주일고는 져야 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 “POETIC JUSTICE요?”/ “그래.”/ 이 선배는 나의 몰지각과 무식이 재밌다는 듯이 씩 웃는다. (중략) 나는 3루에서 홈으로 생환(生還)하지 못한, 배번 18번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호남(전남 해남군) 출신인 황지우 시인은 1983년 발표한 시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에 이렇게 썼다. 참으로 포에틱 자스티스하지 못하게(?) 광주일고 출신이 한가득하던 해태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팀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상대 팀은 경북고 출신이 즐비한 삼성이었다.
맞다. 이 야구 기사는 몰지각하고 무식하게도 ‘정치의 것은 정치에게’를 지키지 못했다. 21세기에 ‘광주 소외’를 논하는 게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인지, 사람이 개는 무는 일인지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야구만큼 좋은 민주주의가 또 있을까.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에도 야구는 ‘너는 고향이 어디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머지 9개 구단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차피 우승 팀을 바꿀 수도 없는데, 민주화에 성공한 1987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촛불혁명’에 성공한 2017년에도, 광주 팀 KIA가 우승한 걸 두고, 딱 한 번 정도는, ‘베이스볼릭 데모크라시(baseballic democracy·야구적 민주주의)’라고 불러줘도 괜찮지 않을까.
※이 기사는 물론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