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에밀리아나 밭에서 닭들이 벌레를 쪼며 돌아다니고 있다. ‘코얌’과 ‘지’ 와인(왼쪽부터). [사진제공 · 김상미]
에밀리아나가 처음부터 친환경 포도를 재배했던 것은 아니다. 에밀리아나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와인메이커였던 호세 길리사스티 가나(Jose` Guilisasti Gana)는 눈이 자주 충혈되고 피부병을 겪었다. 제초제 등 농약 때문이었다. 가나는 이렇게 해로운 화학물질을 먹고 자란 포도가 건강한 열매를 생산할 리 없다고 판단하고 이사회에 유기농으로 전환을 건의했다. 하지만 1998년 당시 칠레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이사회는 밭의 일부만 친환경으로 재배할 것을 허락했다. 이 밭에서 가나는 2001년 에밀리아나의 운명을 바꾼 첫 유기농 와인 코얌(Coyam)을 탄생시켰다.
2003년 칠레에서는 세계적 평론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와인을 심사하는 대회가 열렸다. 가나는 코얌 2001년산을 이 대회에 출품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코얌이 최우수 와인상을 받은 것이다. 코얌이 대성공을 거두자 이사회는 와이너리 전체를 친환경화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에밀리아나는 다양한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며 칠레 와인의 품질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코얌은 시라(Syrah)와 카르미네르(Carme-nere)를 주품종으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 여러 가지 적포도를 섞어 만든 레드 와인이다. 잘 익은 베리향과 은은한 꽃향의 조화가 뛰어나고, 질감이 실크처럼 매끄럽다. 제법 묵직하지만 산도가 좋아 와인이 경쾌하다. 크림소스가 들어간 음식과 즐기면 느끼함을 씻어주고, 버섯 요리에 곁들이면 버섯향과 조화가 오묘하다.
코얌은 칠레 원주민 마푸체(Mapuche)족의 말로 ‘참나무숲’이라는 뜻이다. 와인 이름처럼 에밀리아나 포도밭은 참나무가 우거진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밀리아나는 숲이야말로 친환경 농법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역설한다. 숲속 미생물이 밭으로 퍼져 토양을 건강하게 만들고, 숲에 둥지를 튼 새들이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에밀리아나 와인 가운데 지(Ge^)도 주목할 만하다. 지는 그리스어로 ‘땅’이라는 뜻으로, 환경을 중요시하는 에밀리아나의 와인 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지는 에밀리아나의 밭 가운데 가장 좋은 곳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다. 코얌처럼 카르미네르와 시라가 주품종인 지는 매콤함이 매력적이다. 고춧가루 같은 매운 향이 달콤한 베리향에 싸여 부드럽고 묵직하게 올라온다. 스테이크나 갈비찜에 지를 곁들이면 와인의 부드러운 타닌과 매콤함이 고기 육즙과 어우러져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포도는 자연이 키운다’는 것이 에밀리아나의 믿음이다. 인공적인 개입이 없을수록 자연이 건강하며, 자연이 건강해야 포도나무의 자생력이 커져 병과 해충을 견디고 맛있는 포도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밀리아나 와인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맛이 난다. 넉넉하면서도 강인한 자연을 품은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