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4일 새벽, 안상영 부산시장이 수감돼 있던 구치소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벅찬 감정에 휩싸였다.
너무나 벅차서 숨이 가쁘고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마치 작은 등불 하나가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안시장의 죽음은 필자에게 어둠과 절망의 심연이 아니라 빛과 희망의 실마리로 다가왔다.
안시장의 자살 소식을 듣고 처음 떠오른 말은 ‘죄의식’이었다. 죄의식! 이 말이 몸을 마비시킬 듯 옥죄어왔다. 한국 정치인 중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 더구나 죄의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56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안시장은 유서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사회적 수모를 견딜 수 없고, 부산시민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고 밝혔다. 또다시 자신과 같은 불행한 공직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죄의식과 책임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죄의식이 있었기에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크나큰 수치심을 느꼈기에 사회적 수모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명예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었기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안시장의 자살은 양심과 명예의식이 빚어낸 통렬한 자기반성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죽이기 정치’에서 ‘성찰의 정치’로 변화되나
대다수 한국 정치인은 수치심과 죄의식이 거의 없다. 양심이 없다는 얘기다. 거짓말과 부패와 야합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같이 “절대로 그런 일 없다” “모르는 일이다” “관행이다”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게 통하지 않으면 “표적수사다” “편파수사다” “야당 죽이기다” “정치적 음모다”면서 도리어 정권을 공격한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그마저 통하지 않으면 “정의는 살아 있다”거나 “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라며 뻔뻔스러움의 극치까지 보여주고 만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얘기하자. 필자가 보기에 해방 이후 이 땅을 휩쓴 ‘반공주의’가 한국인과 한국정치를 망가뜨린 주범이다. 이 땅의 반공주의의 핵심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죄악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의 주의주장에 대한 증오, 반대, 공격을 일삼는 ‘반대와 공격의 심리’다. 친일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독립운동세력, 공산주의세력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하고 숙청한 일이 그 전형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이나 양심이 없다. 오직 살아남고, 이기고, 빼앗는 동물적 생존본능밖에 없다. 이런 동물적 정치를 필자는 ‘반공정치’ 또는 ‘죽이기 정치’라고 부르는데, 21세기에도 이런 정치세력이 대한민국 국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안시장의 자살은 한국정치에서 죄의식과 양심, 명예의식이 되살아났다는 걸 보여주는 혁명적 사건이다. 나쁜 짓을 일삼으면서도 적반하장으로 “저놈 잡아라!”고 외쳐대는 ‘죽이기 정치’가 판치는 나라에서 죄의식의 정치, 양심의 정치가 싹을 틔운 것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죽이기 정치’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정치권 전체에서 작지만 강렬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저놈 잡아라!” “저놈 죽여라!” 따위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의 불법을 고백한다. 이런 죄의식과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반성과 고백의 정치를 나는 ‘자기 성찰의 정치’라고 부른다.
누가 ‘죽이기 정치’를 하고 있고, 누가 ‘성찰의 정치’를 하고 있는가? 맑은 눈으로 보면 누구 눈에나 보인다. ‘죽이기 정치’에서 ‘성찰의 정치’로 넘어가는 거대한 변화도 보인다. 문제는 ‘죽이기 정치’와 ‘성찰의 정치’를 한사코 나누지 않으려는 일부 언론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싸잡아 욕을 퍼붓고 있는 일부 언론의 벽을 뚫고 사람들이 ‘죽이기 정치’를 극복하고, ‘성찰의 정치’가 날개를 펴도록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운명은 그들 손에 달렸다.
너무나 벅차서 숨이 가쁘고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마치 작은 등불 하나가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안시장의 죽음은 필자에게 어둠과 절망의 심연이 아니라 빛과 희망의 실마리로 다가왔다.
안시장의 자살 소식을 듣고 처음 떠오른 말은 ‘죄의식’이었다. 죄의식! 이 말이 몸을 마비시킬 듯 옥죄어왔다. 한국 정치인 중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 더구나 죄의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56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안시장은 유서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사회적 수모를 견딜 수 없고, 부산시민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고 밝혔다. 또다시 자신과 같은 불행한 공직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죄의식과 책임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죄의식이 있었기에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크나큰 수치심을 느꼈기에 사회적 수모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명예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었기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안시장의 자살은 양심과 명예의식이 빚어낸 통렬한 자기반성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죽이기 정치’에서 ‘성찰의 정치’로 변화되나
대다수 한국 정치인은 수치심과 죄의식이 거의 없다. 양심이 없다는 얘기다. 거짓말과 부패와 야합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같이 “절대로 그런 일 없다” “모르는 일이다” “관행이다”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게 통하지 않으면 “표적수사다” “편파수사다” “야당 죽이기다” “정치적 음모다”면서 도리어 정권을 공격한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그마저 통하지 않으면 “정의는 살아 있다”거나 “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라며 뻔뻔스러움의 극치까지 보여주고 만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얘기하자. 필자가 보기에 해방 이후 이 땅을 휩쓴 ‘반공주의’가 한국인과 한국정치를 망가뜨린 주범이다. 이 땅의 반공주의의 핵심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죄악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의 주의주장에 대한 증오, 반대, 공격을 일삼는 ‘반대와 공격의 심리’다. 친일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독립운동세력, 공산주의세력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하고 숙청한 일이 그 전형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이나 양심이 없다. 오직 살아남고, 이기고, 빼앗는 동물적 생존본능밖에 없다. 이런 동물적 정치를 필자는 ‘반공정치’ 또는 ‘죽이기 정치’라고 부르는데, 21세기에도 이런 정치세력이 대한민국 국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안시장의 자살은 한국정치에서 죄의식과 양심, 명예의식이 되살아났다는 걸 보여주는 혁명적 사건이다. 나쁜 짓을 일삼으면서도 적반하장으로 “저놈 잡아라!”고 외쳐대는 ‘죽이기 정치’가 판치는 나라에서 죄의식의 정치, 양심의 정치가 싹을 틔운 것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죽이기 정치’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정치권 전체에서 작지만 강렬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저놈 잡아라!” “저놈 죽여라!” 따위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의 불법을 고백한다. 이런 죄의식과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반성과 고백의 정치를 나는 ‘자기 성찰의 정치’라고 부른다.
누가 ‘죽이기 정치’를 하고 있고, 누가 ‘성찰의 정치’를 하고 있는가? 맑은 눈으로 보면 누구 눈에나 보인다. ‘죽이기 정치’에서 ‘성찰의 정치’로 넘어가는 거대한 변화도 보인다. 문제는 ‘죽이기 정치’와 ‘성찰의 정치’를 한사코 나누지 않으려는 일부 언론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싸잡아 욕을 퍼붓고 있는 일부 언론의 벽을 뚫고 사람들이 ‘죽이기 정치’를 극복하고, ‘성찰의 정치’가 날개를 펴도록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운명은 그들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