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한나라당 경기 고양갑 경선대회(왼쪽)와 열린우리당 서울 마포을 경선대회 모습.
선거 때마다 신물 나게 들어온 말이다. 그러나 이번 총선만큼 이 표현이 절실한 적은 없었다. 여야는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지역구를 16곳(서울 3, 경기 8, 부산·대구ㆍ인천·광주·울산·충북·전북·경남 각 1곳증가, 강원·충남·경북· 각 1곳 감소) 늘렸다. 이에 따라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의석수는 기존 97곳에 12곳을 더해 109석(서울 48, 경기 49, 인천 12석)이 됐다. 이는 전국 지역구 총수 243곳의 44.9%로 16대 때의 42.7%에 비해 2.2%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과거 수도권의 표심은 지방 표의 결집력에 비례해 움직였다. 가령 민주당이 호남에서 강한 지지를 받으면 수도권의 호남 출신 유권자도 민주당에 높은 지지를 보냈다. 한나라당이 영남 의석을 싹쓸이하면 수도권 영남표도 한나라당으로 쏠렸다. 그 결과 수도권은 지역분할 구도를 재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최근 이런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대한 수도권 표심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도 이를 인정한다. 최병렬 대표의 한 측근인사는 “내일 당장 투표하면 열린우리당이 50% 이상 당선될 것이다. 솔직히 수도권 상황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의 한 인사도 “당초 수도권에서 50~60석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차떼기 사태’ 이후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한때 꿈꿨던 과반의석 확보도 이때 이미 물 건너갔다. 지금은 원내 1당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현 가능성과 거리가 먼 ‘희망사항’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한나라당을 감싸고 있다.
한나라당이 내심 목표로 하는 수도권 의석수는 대략 40석 전후. 하지만 확실한 우세로 분류할 수 있는 곳은 서울 강남갑·을, 서초갑ㆍ을 등 몇 곳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어렵다. 그나마 이명박 서울시장의 강북 뉴타운정책과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활발한 도정 수행 등 측면 지원이 없었다면 당 깃발을 지키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한 핵심당직자는 최근 한나라당 내분사태를 설명하면서 “이번 파동을 주도한 소장파는 당내에서도 지역구 관리를 잘 못한 대표적 의원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차떼기’ 한나라당 “미워도 다시 한번 40석 전후 목표”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조직은 돈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소장파는 소신이든 실제 돈이 없어서든, 돈으로 지역구를 관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앵벌이 하듯 지역구를 돌며 막걸리 받아 마시는 정치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최근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의 지역구 상황은 최악이다. 당 지지도는 떨어지고 기간 조직은 움직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수도권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YS정권과 이회창 총재시절을 거치면서 수도권은 여러 차례 물갈이를 해왔는데 그것이 요즘 들어 힘이 되고 있다는 것.
이번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물갈이 공천은 주로 영남에서 이뤄졌다. 영남 중진들의 대거 탈락이 한나라당 공천의 핵심이었다. 반면 수도권은 소장파를 중심으로 거의 90% 이상 현역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그러니까 ‘조직과 경험’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당 지지도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지만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조직과 경험’은 위력을 발휘할 것이란 얘기다.
반면 현역의원이 부족한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은 수도권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새 인물을 내세웠다. 이들은 경험도 조직도 부족하다. 정치 혐오가 극에 달한 까닭에 17대 총선의 투표율은 선거사상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투표율이 낮을수록 누가 조직표가 많으냐가 중요한데 아무리 한나라당 지지도가 바닥이어도 30% 가량의 고정 지지층은 엄연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2002년 치러진 재ㆍ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이유도 이런 조직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한 출마 예정자가 유권자와 악수를 하고 있다.
쪼그라진 민주당 “아무리 어려워도 30곳은 해볼 만”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북부벨트는 경기 고양과 파주, 의정부, 김포와 인근 서울 은평구를 잇는 라인. 한나라당은 홍총무를 그 벨트의 한가운데인 일산갑에 배치함으로써 주변에까지 한나라당 바람을 불러오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또 경기 북부에서 시작된 한나라당 바람을 서울 강북지역에도 이어지게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계획이다. 이른바 강북벨트 사수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원희룡 오경훈 의원이 버티고 있는 양천구를 시작으로 이성헌 의원의 서대문갑과 전통적 강세 지역인 마포, 용산, 그리고 박진 의원의 종로를 지나 홍준표 의원의 동대문을까지를 잇는 벨트에서 다수의 당선자를 내겠다는 게 강북벨트 전략의 요체.
반면 전통적 한나라당 우세 지역인 강남벨트 사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보수성향의 강남지역 표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낙관론이 우세하지만 당 일각에선 “서초을의 김덕룡 의원 외에는 몽땅 신인으로 교체한 강남벨트 공천에 지지자들의 실망 여론도 적지 않다”는 위기론도 나온다. 한마디로 강남 선거를 이끌 스타가 없다는 것. 한 당직자는 “강남갑만 놓고 보면 황병태 서상목 최병렬로 이어오면서 장관을 지낸 정권의 실세들이 출마했던 곳”이라며 “이번에 이종구 전 금융감독원 감사가 공천을 받았는데 민주당 후보인 전성철 변호사보다 인지도가 낮아 한나라당 지지자 사이에 실망 여론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일각에선 “자칫 서초구에서 시작해 송파구까지 연결되는 강남벨트가 곳곳에서 끊어지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입장에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수도권 선거에 관한 한 한나라당은 ‘종속변수’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얼마나 약진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한나라당 후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약진해 3파전이 될 경우 한나라당 의석은 늘어나고 반대일 경우 한나라당 의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수도권 전쟁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을까. 당초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100석을 얻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최근 80석 이하로 목표를 대폭 하향 조정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희망사항일 뿐, 실제 얻을 의석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민주당의 한 고위인사는 “아무리 어려워도 수도권에서 30곳 정도에서는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경기의 이윤수 조성준 의원, 신낙균 전 의원 등이 출마하는 성남에서 남양주시를 잇는 ‘경기 남부벨트’와 안산·시흥·부천 등 경기 서·남부에서 시작해 서울 강서·양천·영등포·마포구를 잇는 ‘수도권 서남벨트’, 그리고 추미애 의원이 버티고 있는 광진을을 시작으로 설훈 함승희 의원 등이 현역으로 있는 도봉·노원·강북으로 이어지는 ‘서울 동부벨트’ 등 호남 인구가 많은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박빙승부를 벌여볼 만한 지역구가 즐비하다는 게 이 인사의 주장이다.
민주당의 수도권 전략은 호남선을 통해 ‘광주’와 연동해 움직인다.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 지키기에 성공한 뒤 그 바람을 수도권까지 끌어올린다는 것. 그럴 경우 호남 29석 가운데 20석 이상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의 전략을 뒷받침할 바닥 열기는 미지근하기만 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카드를 꺼내들었지만 당내에서조차 그 실효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전의 계기를 찾지 못한 채 끝 모를 무기력증이 당을 감싸고 있다.
상황이 이러자 민주당 주변에서는 “수도권과 호남을 모두 합쳐도 30석 이상을 얻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어떤 분석가는 “호남 15석, 수도권 5석 미만”이라는 최악의 예상을 내놓기도 한다. 비례대표를 합쳐야 겨우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최악의 예상에 민주당 사람들은 펄쩍 뛴다. “호남 민심이 민주당을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 일각에선 벌써부터 17대 총선 이후 ‘캐스팅보트’ 역할에서 당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몰락은 우리당에겐 ‘복음’이다. 한나라당 이탈표보다 민주당 이탈표가 우리당 입장에선 당의 지지도를 높이는 영양가 있는 표이기 때문이다.
우리당은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수도권 50% 확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수도권 109석 가운데 적어도 50석 이상을 차지하고 비례대표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30석 이상을 획득, 명실상부한 제1당이 되겠다는 게 목표다. 당 여론조사 결과 수도권 전 지역에서 승기를 잡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 한다. 정동영 의장의 한 측근인사는 “정의장이 서울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수도권 선거가 어려웠다면 정의장은 종로 출마라는 승부수를 뒀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당 입장에서도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우선 국민투표인단 방식의 현행 상향식 공천제도가 남긴 후유증을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경선 출마자는 “공천방식 때문에 수도권에서 날린 우리당 의석만 10석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력 있다고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들이 토착 후보들에 밀려 잇따라 패배하면서 이런 불만 섞인 여론이 나오고 있는 것.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경선의 실무를 챙겼던 한 당직자는 “경선방식 때문에 토착후보에게 공천을 빼앗겼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영입인사의 경우 경선기간 당사를 찾아와 경선방식이 잘못됐다, 상대가 이런저런 불공정 행위를 한다며 항의만 늘어놓다 갔다. 결국 이 영입후보는 토착후보에게 10여표 차로 패했는데 만약 그가 중앙당을 찾아와 항의하는 동안 지역에서 움직였다면 충분히 경선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 역시 우리당 내부에서는 ‘잘되는 집안’에서 나타나는 분란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수도권 선거에 관한 한 승기를 잡았다는 게 우리당의 자평이다. 하지만 몸조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2000년 총선 때도 선거 막판까지 민주당 압승 분위기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나라당이 오히려 수도권에서 승리한 사례가 있었던 만큼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는 것. 선거까지는 여론을 뒤집을 만한 굵직한 이슈가 수두룩하므로 아직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과연 어느 당이 최후 순간 ‘서울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