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못할 짓이었다. 수십명의 스태프가 일분 일초를 다투며 전쟁처럼 드라마를 찍고 있는 촬영 현장에서, 잠깐 짬이라도 날라치면 대본에 얼굴을 파묻고 코앞에 시험이 닥친 수험생처럼 초조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그를 돌려세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같은 한가한 질문을 하고 답을 바란다는 게. 마치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남자에게 “시간 있으면 저랑 차 한잔 하실래요?”라고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민망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를 만난 곳은 아름답긴 했지만 온갖 악조건을 두루 갖춘 ‘최악’의 촬영장이었다. 강원도 용평스키장. 방수·방한이 완벽한 스키복을 갖춰 입고 땀나게 스키 타고 내려온 사람에게는 상쾌하기 그지없는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얇은 코트에 장갑 하나 없이 눈밭에 서서 몇 번씩 같은 동작과 대사를 반복하고 있는 배우와 꼼짝없이 이를 지켜보는 스태프들에겐 말 그대로 ‘칼바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요한 촬영장 분위기를 깨고 화들짝 큰 소리로 “용준 오빠!”를 외치며 달려드는 스키복 차림의 팬들을 저지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달려와 그의 팔을 잡기도 했고, 사진을 찍어대고, 사인해 달라며 종이를 내밀었다.
성가시고 짜증날 법도 한데 정작 배용준은 이들을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눈 깜짝할 새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반면 카메라가 멈추면 아이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여성팬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다정한 포즈를 취한 채 사진도 찍어준다. 보통 노련한 솜씨가 아니다. 하긴 그가 브라운관의 ‘왕자님’으로 군림한 세월도 어느덧 7, 8년이 다 되어간다.
“죽을 지경이에요. 요즘 하루 2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오늘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네요. 5일 동안 2회분 방송(140분)을 촬영하고 있으니, 일주일에 영화 한 편씩 찍는 셈이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땐 몰랐는데 원래 부드럽고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무참히 갈라져 나온다. ‘이렇게 힘든데 당신까지 괴롭힐 셈이냐’는 원망과 항의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말이지만, 이런 순간에도 그의 미소는 드라마 속에서 보던 것처럼 환하고 멋지다. 족히 ‘백만불짜리’라 할 수 있을 이 미소에 그의 여성팬들은 수년간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그에게서 저 미소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꽤 열심히 시청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어느 드라마에서나 그는 다를 바 없는 ‘배용준’ 그대로였고, 그의 외모가 아닌 ‘연기’에 넋을 빼앗겨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톱스타’임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추럴 본 액터’는 아닌 사람.
그런데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배용준 자신이다. 그는 자신을 “후천적 배우”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오늘 찍을 드라마 대본이 어젯밤에야 나왔다지만, 현장을 지키는 내내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는 건 배용준뿐이다.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져도 “감독님, 저 대사 씹었어요. 다시 한번 가죠”라고 자청하고, “‘사랑해야 될 사람’이 아니고, ‘사랑해야 할 사람’ 아냐?”라며 상대역인 최지우의 대사까지 고쳐준다. 대본을 아예 통째로 외고 있다는 얘기다.
웬만해선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TV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도 없는 배용준은 그래서 기자들과 TV 예능국 PD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원래 생각이 많고 매사를 조심스러워하는 성격 탓에 ‘까다롭다’ ‘도도하다’는 식의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배용준이 일에 임하는 자세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철저함과 성실함에 놀라게 된다.
“전 능력이 없어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요. 데뷔 이후 겹치기 출연을 피해온 것도 그런 이유죠. 이것저것 대충 하다 보면 소모되는 느낌만 남거든요. 대본도 충분히 숙지해 자신감이 생겼을 때 카메라 앞에 서고 싶고, 인터뷰도 오랜 시간 준비하고 제 속을 다 내보이면서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잘 못하게 되지만 말이죠(웃음).”
자신의 연기에 대한 불만도 있다. “감성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살려 연기할 수 있고, 표현의 폭이 좀더 넓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것. TV에서 ‘떴다’ 하면 모두들 더 좋은 대우와 제작 환경을 찾아 영화판으로 몰려가는 마당에, 배용준은 오랫동안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이마저 고사해 왔다. “인간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 영화를 하고 싶다”던 그의 말을 떠올리고 다시 물으니, “겨울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준비해 볼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제는 자신이 생긴 걸까.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면서 “배용준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지만 어딘지 경직되고 메마른 느낌을 주던 예전의 모습에서 느긋하고 장난기 많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탈바꿈한 그의 스타일과 연기는 확실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해오던 역할이 아니라 처음엔 정신적인 압박을 많이 느꼈어요. 다소 무거웠던 이미지를 벗어나는 게 스스로도 힘들었거든요. 어깨에 들어 있던 힘을 빼고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남들처럼 작품마다 ‘확’ 다르게 할 자신은 없고, 한 단계씩 도전하고 바꿔갈 생각입니다.”
편해진 건 연기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전에 없던 여유와 다정함이 묻어난다. 97년 ‘첫사랑’ 이후 5년 만에 재회한 최지우와는 오누이가 따로 없을 정도로 서로를 챙기기 바쁘고,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박용하나 스태프들과 툭툭 장난도 치면서 늘어진 촬영장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배용준은 이번 작품이 94년 ‘사랑의 인사’라는 드라마로 자신을 데뷔시킨 윤석호 PD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대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출연을 결정했다. 평소 작품 선택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배용준이지만 이번엔 사람에 대한 ‘의리’가 앞섰다.
“이 드라마는 제가 봐도 참 좋던데요. 첫사랑의 추억이란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니까요. 스태프들이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내는 겨울 풍경도 참 아름답지 않나요?”
바쁜 와중에도 드라마 자랑에 침이 마르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다. 현장에서 만난 윤석호 PD는 배용준의 연기가 ‘대만족’이라며 “‘사랑의 인사’ 때 본 선한 이미지가 참 좋았다. 몇 년 만에 만나 보니 어느새 어른이 다 됐더라. 이젠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느꼈다. 그 나이에도 아이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하나”라고 말했다.
만년 대학생 같은 모습이지만, 이제 그도 서른 즈음의 나이가 됐다. “저라고 왜 사랑이 없었겠어요?”라고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이 잠깐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사랑이 절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당분간은 ‘만인의 연인’으로 다소 외로운 시간을 보낼 테지만, 연기자라면 어쩔 수 없이 고독한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에게 친절하진 않지만 자신만의 세계와 깊이를 갖고 싶어하는 진지한 그의 모습을 미워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그를 만난 곳은 아름답긴 했지만 온갖 악조건을 두루 갖춘 ‘최악’의 촬영장이었다. 강원도 용평스키장. 방수·방한이 완벽한 스키복을 갖춰 입고 땀나게 스키 타고 내려온 사람에게는 상쾌하기 그지없는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얇은 코트에 장갑 하나 없이 눈밭에 서서 몇 번씩 같은 동작과 대사를 반복하고 있는 배우와 꼼짝없이 이를 지켜보는 스태프들에겐 말 그대로 ‘칼바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요한 촬영장 분위기를 깨고 화들짝 큰 소리로 “용준 오빠!”를 외치며 달려드는 스키복 차림의 팬들을 저지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달려와 그의 팔을 잡기도 했고, 사진을 찍어대고, 사인해 달라며 종이를 내밀었다.
성가시고 짜증날 법도 한데 정작 배용준은 이들을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눈 깜짝할 새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반면 카메라가 멈추면 아이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여성팬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다정한 포즈를 취한 채 사진도 찍어준다. 보통 노련한 솜씨가 아니다. 하긴 그가 브라운관의 ‘왕자님’으로 군림한 세월도 어느덧 7, 8년이 다 되어간다.
“죽을 지경이에요. 요즘 하루 2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오늘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네요. 5일 동안 2회분 방송(140분)을 촬영하고 있으니, 일주일에 영화 한 편씩 찍는 셈이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땐 몰랐는데 원래 부드럽고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무참히 갈라져 나온다. ‘이렇게 힘든데 당신까지 괴롭힐 셈이냐’는 원망과 항의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말이지만, 이런 순간에도 그의 미소는 드라마 속에서 보던 것처럼 환하고 멋지다. 족히 ‘백만불짜리’라 할 수 있을 이 미소에 그의 여성팬들은 수년간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그에게서 저 미소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꽤 열심히 시청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어느 드라마에서나 그는 다를 바 없는 ‘배용준’ 그대로였고, 그의 외모가 아닌 ‘연기’에 넋을 빼앗겨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톱스타’임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추럴 본 액터’는 아닌 사람.
그런데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배용준 자신이다. 그는 자신을 “후천적 배우”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오늘 찍을 드라마 대본이 어젯밤에야 나왔다지만, 현장을 지키는 내내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는 건 배용준뿐이다.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져도 “감독님, 저 대사 씹었어요. 다시 한번 가죠”라고 자청하고, “‘사랑해야 될 사람’이 아니고, ‘사랑해야 할 사람’ 아냐?”라며 상대역인 최지우의 대사까지 고쳐준다. 대본을 아예 통째로 외고 있다는 얘기다.
웬만해선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TV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도 없는 배용준은 그래서 기자들과 TV 예능국 PD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원래 생각이 많고 매사를 조심스러워하는 성격 탓에 ‘까다롭다’ ‘도도하다’는 식의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배용준이 일에 임하는 자세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철저함과 성실함에 놀라게 된다.
“전 능력이 없어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요. 데뷔 이후 겹치기 출연을 피해온 것도 그런 이유죠. 이것저것 대충 하다 보면 소모되는 느낌만 남거든요. 대본도 충분히 숙지해 자신감이 생겼을 때 카메라 앞에 서고 싶고, 인터뷰도 오랜 시간 준비하고 제 속을 다 내보이면서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잘 못하게 되지만 말이죠(웃음).”
자신의 연기에 대한 불만도 있다. “감성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살려 연기할 수 있고, 표현의 폭이 좀더 넓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것. TV에서 ‘떴다’ 하면 모두들 더 좋은 대우와 제작 환경을 찾아 영화판으로 몰려가는 마당에, 배용준은 오랫동안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이마저 고사해 왔다. “인간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 영화를 하고 싶다”던 그의 말을 떠올리고 다시 물으니, “겨울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준비해 볼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제는 자신이 생긴 걸까.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면서 “배용준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지만 어딘지 경직되고 메마른 느낌을 주던 예전의 모습에서 느긋하고 장난기 많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탈바꿈한 그의 스타일과 연기는 확실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해오던 역할이 아니라 처음엔 정신적인 압박을 많이 느꼈어요. 다소 무거웠던 이미지를 벗어나는 게 스스로도 힘들었거든요. 어깨에 들어 있던 힘을 빼고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남들처럼 작품마다 ‘확’ 다르게 할 자신은 없고, 한 단계씩 도전하고 바꿔갈 생각입니다.”
편해진 건 연기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전에 없던 여유와 다정함이 묻어난다. 97년 ‘첫사랑’ 이후 5년 만에 재회한 최지우와는 오누이가 따로 없을 정도로 서로를 챙기기 바쁘고,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박용하나 스태프들과 툭툭 장난도 치면서 늘어진 촬영장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배용준은 이번 작품이 94년 ‘사랑의 인사’라는 드라마로 자신을 데뷔시킨 윤석호 PD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대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출연을 결정했다. 평소 작품 선택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배용준이지만 이번엔 사람에 대한 ‘의리’가 앞섰다.
“이 드라마는 제가 봐도 참 좋던데요. 첫사랑의 추억이란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니까요. 스태프들이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내는 겨울 풍경도 참 아름답지 않나요?”
바쁜 와중에도 드라마 자랑에 침이 마르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다. 현장에서 만난 윤석호 PD는 배용준의 연기가 ‘대만족’이라며 “‘사랑의 인사’ 때 본 선한 이미지가 참 좋았다. 몇 년 만에 만나 보니 어느새 어른이 다 됐더라. 이젠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느꼈다. 그 나이에도 아이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하나”라고 말했다.
만년 대학생 같은 모습이지만, 이제 그도 서른 즈음의 나이가 됐다. “저라고 왜 사랑이 없었겠어요?”라고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이 잠깐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사랑이 절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당분간은 ‘만인의 연인’으로 다소 외로운 시간을 보낼 테지만, 연기자라면 어쩔 수 없이 고독한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에게 친절하진 않지만 자신만의 세계와 깊이를 갖고 싶어하는 진지한 그의 모습을 미워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