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카슈미르로 가는 길은 외국인에겐 쉽지 않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는 사실상 별개의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파키스탄의 실권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파키스탄 전국의 의회를 해산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지만, 카슈미르주(州)만은 의회민주주의가 살아 있을 정도다. 외국인이 이곳으로 들어가려면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허가를 받는다는 게 간단치 않다. 외국 기자들이 취재 목적을 밝히고 카슈미르 입주(入州)를 신청하면 “기다려 달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듣기 일쑤다. 그러다 하루 이틀 뒤 채근하면 “아직 검토중”이란 답답한 대답뿐이다. 그래서 많은 외국 기자들이 기다리다 지쳐 카슈미르 취재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한국 기자들도 그렇게 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특히 카슈미르에서 긴장감이 고조된 요즘 입주 허가를 받아내기란 더 힘들다.
무샤라프-미국 손잡은 뒤 파키스탄 자유전사 고립
지난 1월 중순 아프가니스탄 취재를 마치고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왔을 때 현지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파키스탄에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것. 알라신의 뜻에 따라 세상일이 돌아간다는 ‘인샬라’란 말을 파키스탄인들은 입에 달고 산다. 필자도 “인샬라”를 되뇌며 파키스탄 정부의 입주 허가증 없이 무작정 카슈미르로 향했다. 유엔 인도-파키스탄 정전감시단(UNMOGIP) 소속 한국군 장교(이원기 소령)의 뒷심만 은근히 믿고 지난 1월19일 그와 함께 이슬라마바드를 떠나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카슈미르에 발을 내디뎠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슬라마바드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까지의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도로 길이도 150km 남짓이다. 그러나 가파른 고갯길, 깎아지른 절벽길 등 산악지방 특유의 험한 길을 5시간쯤 내달려야 한다.
무자파라바드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거리에서 카슈미르 경찰초소와 맞닥뜨렸다. 옐름강을 가로지르는 쿠알라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온 초소였다. 그곳에서 30분 가량 심문을 받아야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40대 초반의 경찰 초소장은 “카슈미르에서 40년 살면서 한국인과는 처음 얘기를 나눠본다”며 처음과 달리 은근한 태도다. 2002년 월드컵축구가 화제로 떠오르자 분위기는 심문에서 대화로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초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카슈미르주 경계선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규제가 많았다. 우선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 모든 지형지물을 군사시설물로 여기는 까닭이다. 특히 교량 등 주요 시설물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금기였다.
인구 380만명인 카슈미르의 주도 무자파라바드 입구에 들어서면서 일단의 시위대를 만났다. 그곳 잠무카슈미르 대학 학생들이 주축인 그들은 “인도 정부는 이슬람교도들의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UNMOGIP 초소(돔멜 초소)까지 시위를 벌였다.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를 두르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시위대를 이끄는 한 여학생은 마이크로 “카슈미르인에게 자유를!”이라고 되풀이해 외쳤다.
시위행렬에 참여한 잠무카슈미르 대학 영문과 타크디스 길라니 교수(35ㆍ여)를 다음날 따로 만났다. ‘HOPE’라는 이름의 지역 인권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국제사회가 카슈미르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체첸족이나 위구르족의 인권이 실종됐듯, 카슈미르인들의 인권도 실종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무샤라프 장군이 미국과 손잡은 뒤부터 인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파키스탄 ‘자유 전사’들이 설 땅을 잃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실권자 무샤라프 장군이 반(反)탈레반 쪽으로 돌아선 것은 “파키스탄의 국익을 위해선 잘한 일”이라면서도 “카슈미르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만성적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의 지배에 저항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테러주의자’의 범주에 넣지 않았었다. 파키스탄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 전사’(freedom fighter)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죽음은 ‘순교’다. 따라서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해 인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파키스탄 언론을 통해 ‘순교자’로 보도되곤 했다. 문제는 미국의 심장부를 때린 9ㆍ11 테러사건이 일어난 뒤 그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점이다.
올 1월 들어 무샤라프 장군은 인도 뉴델리 국회의사당 테러사건(2001년 12월)의 배후로 꼽히는 5개 이슬람 과격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 내 양대 이슬람 과격단체인 수니파의 시파-이-사하바와 시아파의 테리크-이 자프리아, 테리크-니파즈-이-샤리아트의 활동이 금지된 한편,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단체인 자이쉬-이-무하마드, 라쉬카르-이-타이바의 사무실도 폐쇄됐다.
이들 무장단체는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에 바탕해 이슬람교 율법을 극단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한편으로 인도의 카슈미르 철권지배에 저항해 왔다. 미국과 인도의 압력을 받아온 무샤라프 장군은 1월 들어 이들을 집중단속해 이슬람 과격분자 1600명을 체포했고, 이슬람 단체의 사무실 약 500개를 문닫게 했다. 무자파라바드 시내에서도 검속 바람이 분 탓에 저항단체 사무실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자이쉬-이-무하마드 사무실 밖에 내걸린 아프간 난민 돕기 현수막이 을씨년스런 풍경을 보여줄 뿐이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카슈미르 취재 마지막 날 자이쉬-이-무하마드의 한 간부를 간신히 접촉했다. 그는 “무샤라프 장군이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활동을 불법화할 권리는 없다”면서 무샤라프 군정과 이를 뒤에서 부추기는 미국 그리고 ‘원인 제공자’인 인도를 싸잡아 비난했다. “인도군의 압제로부터 카슈미르를 분리독립하기 위한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그는 결의 섞인 전망을 내린다.
카슈미르는 인도령(Jammu and Kashmir)과 파키스탄령(Azad Kashmir)으로 나뉘어 지난 50여년간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려 왔다. 면적은 인도령이 두 배나 넓다. 인도령 카슈미르의 일부는 인도-중국 국경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 넓이와 비슷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 그리고 중국 서부와 맞닿아 있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대륙에서 철수할 당시 카슈미르는 지역주민 다수가 이슬람교도(77%)였고 힌두교도(22%)는 소수였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 과정에서 당시 통치권자인 마하라자 하라싱이 다수 주민의 뜻과 달리 인도 편입을 결정한 것이 분쟁의 씨앗이었다. 인도령 카슈미르도 그동안 인구지도가 크게 바뀌었으나 힌두교도보다는 이슬람교도가 여전히 다수다(61%).
카슈미르는 2차에 걸친 인도-파키스탄 전쟁(1948년, 1964년)으로 수천명의 사망자를 냈다. 전투원뿐만이 아니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1300만명의 카슈미르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향을 등지거나 이산의 슬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 지역에서 UNMOGIP가 1949년부터 활동해 왔으니,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원조인 셈이다. 한국군도 1994년부터 10여명의 장교를 파견해 UNMOGIP 요원으로 참여했다(현재는 우리 장교 9명을 포함해 45명의 다국적 장교가 근무중이다).
큰 그림을 그린다면, 카슈미르 분쟁은 초기의 전면전 양상에서 후기엔 국지전 또는 내전의 양상을 보여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주에서 이슬람교 무장세력에 의한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88년에 조직된 잠무 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을 중심으로 인도 정부 관리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이어졌다. 이 투쟁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지금껏 7만여명의 카슈미르인이 희생되고 약 20만명의 난민이 생긴 것으로 알려질 뿐 정확한 통계는 없다. 1999년 한 해 동안 사망자는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희생자 대부분이 비전투원(민간인)이다.
인도군의 인권 탄압은 악명 높다. 카슈미르의 중도파 정당인 아메르 자마아트-에-이슬라미 당 총재 압둘 라시드 투라비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에만 4만명이 투옥됐다고 전한다. “인도군은 이슬람교도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해 고문과 강간을 일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도 정부 입장에서 그들 범법자는 ‘테러리스트’ 혹은 그 방조자나 협력자들일 뿐이다.
현재 카슈미르 일대에는 인도-파키스탄 병력이 수십만명 집결해 대치중이다(파키스탄군 총병력은 52만명, 인도군은 98만명). 카슈미르의 실질적 국경선이나 다름없는 통제선(Line of Control·LoC) 주변에 몰려 있는 것. 파키스탄측이 화해 제스처를 취했으나 적어도 당분간은 양쪽 모두 병력 감축이 없을 듯하다. 특히 인도측이 강경자세를 보인다. 조지 페르난데스 인도 국방장관은 지난 1월 중순 “국경을 넘어 자행되는 테러가 중단되지 않는 한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에 배치된 군병력의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파드마나반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이 “접경지역의 상황이 심각하며 거의 전쟁 직전과 같은 모양새”라고 밝혔듯, 카슈미르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흐른다.
UNMOGIP 소속의 두 한국군 장교(심재천 중령과 이원기 소령)와 함께 LoC를 찾았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 무자파라바드에서 동남쪽으로 60km쯤 떨어진 차코티 지역이었다. 평지 같으면 1시간이면 족히 닿을 거리였지만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흐르는 강을 아득히 내려다보며 달리는 섬뜩한 꼬부랑길이라 2시간 넘게 걸렸다. 신통한 것은 그런 산악지대 곳곳에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곳곳에 천막촌이 보였다. 인도군의 박해를 피해온 난민들이었다. 그 가운데 제법 큰 규모인 자파르 난민수용소엔 170가구 1100명이 살고 있다. 4년 전 인도군의 포격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는 모하마드 압둘라(42)는 당시 포격으로 머리를 다쳐 줄곧 천막 속에서 누워 지낸다. 그가 병석에서 입고 있는 옷은 놀랍게도 땀에 절은 양복. 달리 입을 마땅한 옷이 없어서일 것이다. 촌장은 “난민으로서의 대접도 제대로 못 받아 하루하루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LoC가 가까워질수록 눈이 쌓인 고지 곳곳에 파키스탄군 초소들이 보였다. 통제선 500m 전방에 콘크리트로 다진 방호벽이 접근 가능한 최전방이었다. 그로부터 1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인도군 초소가 망원경으로 보였다. 그쪽에서도 망원경을 통해 필자를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섬뜩한 느낌이 스쳤다. 최전방을 지키는 파키스탄 군인들은 필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막무가내로 손을 내저었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 더 그럴 것”이라고 동행한 심재천 중령이 귀띔한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이원기 소령은 “그쪽 인도군은 파키스탄군보다 외부인들에게 더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필자가 카슈미르 통제선을 찾은 것은 1월20일. 그때는 그나마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짧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1월22일 인도 동부 캘커타의 미국문화원에 중무장한 괴한들이 총격을 가해 인도 경비경찰 등 4명이 숨지고, 특히 1월25일 인도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아그니(Agni)미사일 개량형 모델(사거리 700km 정도의 중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자 양국간 긴장은 다시 높아졌다. 열흘 가량 잠잠했던 카슈미르 계곡엔 다시 포성이 울려 퍼졌다.
필자가 카슈미르 취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던 지난 1월26일 인도군이 카슈미르 접경 파키스탄 진지에 포격을 가해 파키스탄 병사 12명이 숨지고 파키스탄군 벙커 10개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도측이 공화국기념일(1월26일) 바로 전날을 발사 시점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기술적 요인 때문이라 밝혔다. 그러나 여기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시위다. 파키스탄도 이에 맞춰 또 다른 핵실험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허가를 받는다는 게 간단치 않다. 외국 기자들이 취재 목적을 밝히고 카슈미르 입주(入州)를 신청하면 “기다려 달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듣기 일쑤다. 그러다 하루 이틀 뒤 채근하면 “아직 검토중”이란 답답한 대답뿐이다. 그래서 많은 외국 기자들이 기다리다 지쳐 카슈미르 취재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한국 기자들도 그렇게 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특히 카슈미르에서 긴장감이 고조된 요즘 입주 허가를 받아내기란 더 힘들다.
무샤라프-미국 손잡은 뒤 파키스탄 자유전사 고립
지난 1월 중순 아프가니스탄 취재를 마치고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왔을 때 현지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파키스탄에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것. 알라신의 뜻에 따라 세상일이 돌아간다는 ‘인샬라’란 말을 파키스탄인들은 입에 달고 산다. 필자도 “인샬라”를 되뇌며 파키스탄 정부의 입주 허가증 없이 무작정 카슈미르로 향했다. 유엔 인도-파키스탄 정전감시단(UNMOGIP) 소속 한국군 장교(이원기 소령)의 뒷심만 은근히 믿고 지난 1월19일 그와 함께 이슬라마바드를 떠나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카슈미르에 발을 내디뎠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슬라마바드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까지의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도로 길이도 150km 남짓이다. 그러나 가파른 고갯길, 깎아지른 절벽길 등 산악지방 특유의 험한 길을 5시간쯤 내달려야 한다.
무자파라바드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거리에서 카슈미르 경찰초소와 맞닥뜨렸다. 옐름강을 가로지르는 쿠알라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온 초소였다. 그곳에서 30분 가량 심문을 받아야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40대 초반의 경찰 초소장은 “카슈미르에서 40년 살면서 한국인과는 처음 얘기를 나눠본다”며 처음과 달리 은근한 태도다. 2002년 월드컵축구가 화제로 떠오르자 분위기는 심문에서 대화로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초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카슈미르주 경계선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규제가 많았다. 우선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 모든 지형지물을 군사시설물로 여기는 까닭이다. 특히 교량 등 주요 시설물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금기였다.
인구 380만명인 카슈미르의 주도 무자파라바드 입구에 들어서면서 일단의 시위대를 만났다. 그곳 잠무카슈미르 대학 학생들이 주축인 그들은 “인도 정부는 이슬람교도들의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UNMOGIP 초소(돔멜 초소)까지 시위를 벌였다.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를 두르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시위대를 이끄는 한 여학생은 마이크로 “카슈미르인에게 자유를!”이라고 되풀이해 외쳤다.
시위행렬에 참여한 잠무카슈미르 대학 영문과 타크디스 길라니 교수(35ㆍ여)를 다음날 따로 만났다. ‘HOPE’라는 이름의 지역 인권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국제사회가 카슈미르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체첸족이나 위구르족의 인권이 실종됐듯, 카슈미르인들의 인권도 실종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무샤라프 장군이 미국과 손잡은 뒤부터 인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파키스탄 ‘자유 전사’들이 설 땅을 잃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실권자 무샤라프 장군이 반(反)탈레반 쪽으로 돌아선 것은 “파키스탄의 국익을 위해선 잘한 일”이라면서도 “카슈미르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만성적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의 지배에 저항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테러주의자’의 범주에 넣지 않았었다. 파키스탄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 전사’(freedom fighter)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죽음은 ‘순교’다. 따라서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해 인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파키스탄 언론을 통해 ‘순교자’로 보도되곤 했다. 문제는 미국의 심장부를 때린 9ㆍ11 테러사건이 일어난 뒤 그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점이다.
올 1월 들어 무샤라프 장군은 인도 뉴델리 국회의사당 테러사건(2001년 12월)의 배후로 꼽히는 5개 이슬람 과격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 내 양대 이슬람 과격단체인 수니파의 시파-이-사하바와 시아파의 테리크-이 자프리아, 테리크-니파즈-이-샤리아트의 활동이 금지된 한편,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단체인 자이쉬-이-무하마드, 라쉬카르-이-타이바의 사무실도 폐쇄됐다.
이들 무장단체는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에 바탕해 이슬람교 율법을 극단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한편으로 인도의 카슈미르 철권지배에 저항해 왔다. 미국과 인도의 압력을 받아온 무샤라프 장군은 1월 들어 이들을 집중단속해 이슬람 과격분자 1600명을 체포했고, 이슬람 단체의 사무실 약 500개를 문닫게 했다. 무자파라바드 시내에서도 검속 바람이 분 탓에 저항단체 사무실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자이쉬-이-무하마드 사무실 밖에 내걸린 아프간 난민 돕기 현수막이 을씨년스런 풍경을 보여줄 뿐이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카슈미르 취재 마지막 날 자이쉬-이-무하마드의 한 간부를 간신히 접촉했다. 그는 “무샤라프 장군이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활동을 불법화할 권리는 없다”면서 무샤라프 군정과 이를 뒤에서 부추기는 미국 그리고 ‘원인 제공자’인 인도를 싸잡아 비난했다. “인도군의 압제로부터 카슈미르를 분리독립하기 위한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그는 결의 섞인 전망을 내린다.
카슈미르는 인도령(Jammu and Kashmir)과 파키스탄령(Azad Kashmir)으로 나뉘어 지난 50여년간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려 왔다. 면적은 인도령이 두 배나 넓다. 인도령 카슈미르의 일부는 인도-중국 국경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 넓이와 비슷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 그리고 중국 서부와 맞닿아 있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대륙에서 철수할 당시 카슈미르는 지역주민 다수가 이슬람교도(77%)였고 힌두교도(22%)는 소수였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 과정에서 당시 통치권자인 마하라자 하라싱이 다수 주민의 뜻과 달리 인도 편입을 결정한 것이 분쟁의 씨앗이었다. 인도령 카슈미르도 그동안 인구지도가 크게 바뀌었으나 힌두교도보다는 이슬람교도가 여전히 다수다(61%).
카슈미르는 2차에 걸친 인도-파키스탄 전쟁(1948년, 1964년)으로 수천명의 사망자를 냈다. 전투원뿐만이 아니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1300만명의 카슈미르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향을 등지거나 이산의 슬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 지역에서 UNMOGIP가 1949년부터 활동해 왔으니,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원조인 셈이다. 한국군도 1994년부터 10여명의 장교를 파견해 UNMOGIP 요원으로 참여했다(현재는 우리 장교 9명을 포함해 45명의 다국적 장교가 근무중이다).
큰 그림을 그린다면, 카슈미르 분쟁은 초기의 전면전 양상에서 후기엔 국지전 또는 내전의 양상을 보여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주에서 이슬람교 무장세력에 의한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88년에 조직된 잠무 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을 중심으로 인도 정부 관리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이어졌다. 이 투쟁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지금껏 7만여명의 카슈미르인이 희생되고 약 20만명의 난민이 생긴 것으로 알려질 뿐 정확한 통계는 없다. 1999년 한 해 동안 사망자는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희생자 대부분이 비전투원(민간인)이다.
인도군의 인권 탄압은 악명 높다. 카슈미르의 중도파 정당인 아메르 자마아트-에-이슬라미 당 총재 압둘 라시드 투라비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에만 4만명이 투옥됐다고 전한다. “인도군은 이슬람교도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해 고문과 강간을 일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도 정부 입장에서 그들 범법자는 ‘테러리스트’ 혹은 그 방조자나 협력자들일 뿐이다.
현재 카슈미르 일대에는 인도-파키스탄 병력이 수십만명 집결해 대치중이다(파키스탄군 총병력은 52만명, 인도군은 98만명). 카슈미르의 실질적 국경선이나 다름없는 통제선(Line of Control·LoC) 주변에 몰려 있는 것. 파키스탄측이 화해 제스처를 취했으나 적어도 당분간은 양쪽 모두 병력 감축이 없을 듯하다. 특히 인도측이 강경자세를 보인다. 조지 페르난데스 인도 국방장관은 지난 1월 중순 “국경을 넘어 자행되는 테러가 중단되지 않는 한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에 배치된 군병력의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파드마나반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이 “접경지역의 상황이 심각하며 거의 전쟁 직전과 같은 모양새”라고 밝혔듯, 카슈미르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흐른다.
UNMOGIP 소속의 두 한국군 장교(심재천 중령과 이원기 소령)와 함께 LoC를 찾았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 무자파라바드에서 동남쪽으로 60km쯤 떨어진 차코티 지역이었다. 평지 같으면 1시간이면 족히 닿을 거리였지만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흐르는 강을 아득히 내려다보며 달리는 섬뜩한 꼬부랑길이라 2시간 넘게 걸렸다. 신통한 것은 그런 산악지대 곳곳에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곳곳에 천막촌이 보였다. 인도군의 박해를 피해온 난민들이었다. 그 가운데 제법 큰 규모인 자파르 난민수용소엔 170가구 1100명이 살고 있다. 4년 전 인도군의 포격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는 모하마드 압둘라(42)는 당시 포격으로 머리를 다쳐 줄곧 천막 속에서 누워 지낸다. 그가 병석에서 입고 있는 옷은 놀랍게도 땀에 절은 양복. 달리 입을 마땅한 옷이 없어서일 것이다. 촌장은 “난민으로서의 대접도 제대로 못 받아 하루하루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LoC가 가까워질수록 눈이 쌓인 고지 곳곳에 파키스탄군 초소들이 보였다. 통제선 500m 전방에 콘크리트로 다진 방호벽이 접근 가능한 최전방이었다. 그로부터 1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인도군 초소가 망원경으로 보였다. 그쪽에서도 망원경을 통해 필자를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섬뜩한 느낌이 스쳤다. 최전방을 지키는 파키스탄 군인들은 필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막무가내로 손을 내저었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 더 그럴 것”이라고 동행한 심재천 중령이 귀띔한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이원기 소령은 “그쪽 인도군은 파키스탄군보다 외부인들에게 더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필자가 카슈미르 통제선을 찾은 것은 1월20일. 그때는 그나마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짧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1월22일 인도 동부 캘커타의 미국문화원에 중무장한 괴한들이 총격을 가해 인도 경비경찰 등 4명이 숨지고, 특히 1월25일 인도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아그니(Agni)미사일 개량형 모델(사거리 700km 정도의 중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자 양국간 긴장은 다시 높아졌다. 열흘 가량 잠잠했던 카슈미르 계곡엔 다시 포성이 울려 퍼졌다.
필자가 카슈미르 취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던 지난 1월26일 인도군이 카슈미르 접경 파키스탄 진지에 포격을 가해 파키스탄 병사 12명이 숨지고 파키스탄군 벙커 10개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도측이 공화국기념일(1월26일) 바로 전날을 발사 시점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기술적 요인 때문이라 밝혔다. 그러나 여기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시위다. 파키스탄도 이에 맞춰 또 다른 핵실험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