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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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영입만큼 남는 장사 있나요”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 능력 있는 학자 모시기 화제 … “십고초려도 마다 않는 집념 덕분”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15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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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재 영입만큼 남는 장사 있나요”
    지난 1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와 도자기 박사 윤용이 교수가 나란히 명지대 미술사학과로 둥지를 옮겼을 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유영구 이사장(56·명지학원)의 작품이라며 무릎을 쳤다. 인재 영입에 관한 한 유이사장의 집념은 소문이 났다. 92년 명지대 설립자인 유상근 총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그가 학교 살림을 맡으면서 다짐한 것이 “오너의 능력이 부족하면 유능한 CEO를 영입한다”는 원칙이었다.

    총장마다 기대 이상의 능력 발휘

    첫 구원투수는 이영덕 총장. 이총장은 2년여 임기 동안 분규 위기에 몰렸던 학교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부총리로 입각했다. 유이사장은 ‘안정’ 다음의 목표를 ‘변화’로 잡았다. 적임자로 마음에 둔 사람은 고건씨였지만 당시만 해도 각료 출신 총장이 그리 흔치 않았다.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고총장은 3년 재직기간 동안 ‘만만디’ 학교행정에 서비스 개념을 도입하고 공정한 인사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후 각 대학마다 전직 장차관들의 총장 모시기가 유행할 정도로 고총장 영입은 성공작이었다. 고총장이 다시 총리로 발탁돼 떠나자 연세대 총장을 역임한 송자 교수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때는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쯤 했죠. 최종결정을 못하시기에 송총장은 삼국지도 안 읽었느냐, 세 번 가면 허락하는 법인데 지금 열 번도 더 왔다고 몰아세워 겨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개혁에 속도를 붙여준 송자 총장이 부총리로 입각한 후 선우중호 총장을 모신 것은 그만한 분이 서울대에서 중도하차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지난 10년간 학교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적임자들이 와주셔서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역대 총장들이 연거푸 국무총리, 부총리로 발탁되자 “학교 터가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샘도 받았다. 그만큼 유이사장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대학이란 총장 중심으로 굴러가야지, 이사장이 간섭하고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래서 총장이 부임할 때마다 “학교 팔아먹는 일 말고는 마음대로 하시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2000년 국내 최초로 명지대에 기록과학특수대학원을 개설하고 지난해 문화예술대학원에 예술품감정학과를 설치한 것은 유이사장의 아이디어였다.

    유이사장이 사람 다음으로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책과 기록이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95년 10월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운영위원장직을 맡았다. 운동본부는 LG연암문고의 지원(매년 2억원) 아래 1950년 이전 해외에서 발간된 책 중 한국에 대해 언급한 책들을 수집해 왔다. “외국인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귀중한 자료인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어요. 서울대학에 400권, 연세대에 500권, 국립중앙도서관에 400권 정도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다며 수집에 회의적이었죠. 하지만 불과 6년 만에 9000권 이상을 수집했습니다.”



    “인재 영입만큼 남는 장사 있나요”
    고서찾기운동본부는 최근 청나라 지식인들이 조선의 선비를 칭송하며 펴낸 문집 ‘한재아집도’를 공개했고, 1895년 프랑스 주간지 ‘릴뤼스트라시옹’에 게재된 명성황후 삽화를 찾아냈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것 중 지난해 말 입수한 ‘일본인이 쓴 임진왜란 전사보고서’도 있다.

    “5년 전 일본에 갔다가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사람이 구소련 국방부가 제작한 25만분의 1 축척 남한지도를 3000달러에 팔려고 한다는 겁니다. 주위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3000달러를 모아 두말없이 주었지요. 그 러시아인은 저를 어마어마한 부자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몇 달 안에 꼭 보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5만분의 1 축척 북한지도를 가지고 왔어요.”

    일제시대 지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1981년 구소련이 군사용으로 제작한 이 정밀지도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었다. 고서찾기운동본부는 지도의 영인본 500부를 만들어 배포했다.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그리고 구소련이 붕괴되었을 때가 수집의 적기였어요. 제가 국가정보기관을 찾아가 국가 예산을 이런 데 쓰라고 권했죠. 25만분의 1 축척 중국지도가 나왔을 때 이것은 국가가 사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고서를 수집하면서 그는 운명론자가 되었다. 쫓아다닌다고 내 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만있어도 저절로 내 손에 들어오는 책도 있었다. 98년에 수집한 ‘함녕전시첩’은 제 발로 들어온 경우였다. “데라우치 총독이 쓴 발문에 이어 고종의 친필을 확인하는 순간 모골이 송연했죠. 왕은 글을 쓰더라도 이름을 쓰지 않고 낙관만 찍었는데 그 의미를 몰랐던 일본인 소장자가 이 시첩을 헐값(약 300만원)에 내놓았거든요. 가치를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서 동그라미가 두 개쯤 더 붙었죠.”

    1909년 한일병합 1년 전 고종의 처소인 덕수궁 함녕전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송별연이 벌어졌다. 이토를 비롯, 후임 통감 소네 아라스케 등 일본인과 당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등 친일파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인(仁), 신(新), 춘(春) 석 자의 운(韻)을 내린다. 이토, 모리, 소네에 이어 마지막으로 이완용이 이렇게 결구를 적는다. ‘양지일가천하춘’(兩地一家天下春·두 나라가 한집안이니 온 세상이 봄이다). 바로 1년 후 한일병합을 예고하는 글이었다.

    “7m에 이르는 거대한 시첩을 보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완용을 매국노라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친일의 증거는 부족해요. 유일하게 내세우는 게 한일병합서에 사인했다는 것인데, 당시 총리대신으로서 피할 수 없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첩의 한 구절이 이완용의 친일행위를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는 97년 국가기록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400여명의 전문가를 규합하고 ‘한국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을 발족했다. “우리 사회의 부패는 매스컴의 일과성 보도와도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보도를 접하는 사건 당사자나 독자 모두 그저 바람이 한 번 지나가는가 보다 생각하죠. 만약 돈 몇 푼 받아먹고 그 죄과가 유구한 역사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로 남는다면 수지가 안 맞는 장사겠죠. 정확한 기록이 남는다면 생각이 바뀌게 될 겁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영구 이사장은 고서 발굴과 수집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자료가 없어서 연구를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수집한 책을 모두 영인본으로 만들어 공개할 예정입니다. 제 역할은 전문가들이 연구할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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