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서면서 방송, 영화, 가요, 광고, 컴퓨터게임 등 대중문화와 시민의 접촉 면적이 갈수록 광범위해지고 있다. 그래서 젊은 대중가수나 개그맨, 영화배우들이 청소년과 주부들의 문화적 영웅으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다. 또 문화 유통망의 국제적 확산으로 거대한 외국 대중문화의 지배력도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들은 전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화를 포식하며 살아간다. 그와 함께 대중문화의 통속성, 상업성, 문화적 식민성에 의해 오염된 문화적 취향과 창의성의 고갈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순수예술과 전통예술이 상대적으로 대중의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시들어가는 현상을 가장 심각한 부작용으로 거론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 대중문화 상품의 상업적 성공에 경탄한다. 그러나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작소설이 필요했고 그 원작소설 뒤에는 셰익스피어와 위대한 영국 문학의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할리우드의 영화산업과 미국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창작 영감을 찾기 위해 세계의 고전문학과 클래식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문화의 세기 창작 자원·에너지 키워야 생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수억 수십억원으로 치장한 레스토랑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소극장의 관객은 거꾸로 줄어들고 있는 대학로를 보라. 대중 연예인의 화려함과 인기에 비해 연극, 무용, 음악, 문학 등 순수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그들의 소외감과 무력감은 점점 깊어져 분노로 변하고 있다.
공연예술마저도 창작품보다는 수입품이 인기다. 서구의 유명 공연물은 몇 십만원을 호가해도 매진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스럽게 만들어진 창작품들은 차갑게 외면당하고 있다. 국립극장 또한 이러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다. 책임운영기관으로 변신한 지난 2년간 모든 직원과 단원들의 악전고투 끝에 수입도 3배 이상 늘어나고 관객도 2배 이상 늘었지만 한 극장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적 환경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창극이나 한국무용, 국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관의 늪을 건너야 하는가? 우리에게도 자랑스런 고전의 전통과 전통예술이 숨쉬고 있건만 왜 현대의 시민문화와 그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가?
현대는 창의력이 국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문화는 창의력보다 선진 외국문화의 모방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광복 이후 지난 50년은 분단과 전쟁, 군사문화, 권위주의, 관료주의 등 비문화적 정치 상황과 시민문화의 대립이 주요한 문화적 과제였다면, 이제는 다국적 문화기업의 공격에 맞서 어떻게 개별 국가의 문화적 창조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문화의 세기에 우리가 살아갈 길은 독자적인 창작의 자원과 에너지를 길러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문화와 대중문화, 민족문화와 서구문화, 현대예술과 전통예술식의 근시안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문화 유통망을 형성하는 방안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는 창작의 순수성이나 작품성에서 순수예술이나 전통예술의 힘을 활용하고, 순수예술이나 전통예술 역시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에 대한 대응력에서 대중문화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시민문화의 발전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민사회의 문화적 욕구를 얼마나 잘 수용하고 새로운 문화적 비전을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순수예술과 전통예술이 상대적으로 대중의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시들어가는 현상을 가장 심각한 부작용으로 거론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 대중문화 상품의 상업적 성공에 경탄한다. 그러나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작소설이 필요했고 그 원작소설 뒤에는 셰익스피어와 위대한 영국 문학의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할리우드의 영화산업과 미국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창작 영감을 찾기 위해 세계의 고전문학과 클래식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문화의 세기 창작 자원·에너지 키워야 생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수억 수십억원으로 치장한 레스토랑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소극장의 관객은 거꾸로 줄어들고 있는 대학로를 보라. 대중 연예인의 화려함과 인기에 비해 연극, 무용, 음악, 문학 등 순수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그들의 소외감과 무력감은 점점 깊어져 분노로 변하고 있다.
공연예술마저도 창작품보다는 수입품이 인기다. 서구의 유명 공연물은 몇 십만원을 호가해도 매진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스럽게 만들어진 창작품들은 차갑게 외면당하고 있다. 국립극장 또한 이러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다. 책임운영기관으로 변신한 지난 2년간 모든 직원과 단원들의 악전고투 끝에 수입도 3배 이상 늘어나고 관객도 2배 이상 늘었지만 한 극장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적 환경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창극이나 한국무용, 국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관의 늪을 건너야 하는가? 우리에게도 자랑스런 고전의 전통과 전통예술이 숨쉬고 있건만 왜 현대의 시민문화와 그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가?
현대는 창의력이 국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문화는 창의력보다 선진 외국문화의 모방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광복 이후 지난 50년은 분단과 전쟁, 군사문화, 권위주의, 관료주의 등 비문화적 정치 상황과 시민문화의 대립이 주요한 문화적 과제였다면, 이제는 다국적 문화기업의 공격에 맞서 어떻게 개별 국가의 문화적 창조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문화의 세기에 우리가 살아갈 길은 독자적인 창작의 자원과 에너지를 길러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문화와 대중문화, 민족문화와 서구문화, 현대예술과 전통예술식의 근시안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문화 유통망을 형성하는 방안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는 창작의 순수성이나 작품성에서 순수예술이나 전통예술의 힘을 활용하고, 순수예술이나 전통예술 역시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에 대한 대응력에서 대중문화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시민문화의 발전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민사회의 문화적 욕구를 얼마나 잘 수용하고 새로운 문화적 비전을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