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빚만 아니라면 이렇게 막 나가진 않았겠죠.”
1월17일 밤 9시20분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프집. 기자와 마주한 P양(21)은 대화 내내 몹시 언짢아했다.
P양과는 1시간 전 모 채팅사이트를 통해 ‘만남’을 갖기로 약속한 사이. 취재 목적으로 기자가 ‘불건전한 만남’을 암시하는 방제(房題ㆍ대화방 제목)를 붙인 1대 1 대화방을 만든 뒤 찾아온 다섯 번째 ‘접속자’가 그였다. 5분 가량 ‘탐색’ 끝에 30만원에 흥정(?)이 이뤄졌지만, 대면 후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P양의 표정엔 불쾌감이 역력했다.
“까놓고, 목돈 만질 수 있는 게 ‘알바’(성매매) 말고 또 있어요?” 재작년 대학진학에 실패한 뒤 1년 넘게 ‘백수’ 생활을 했다는 P양은 지난해 세 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빚을 졌다고 했다. 옷 사 입고, 머리 손질하고, 현금서비스 받아 1년간 유흥비로 날린 돈이 500만원. 6개월간 편의점 아르바이트 끝에 200만원은 겨우 메웠지만, 이미 씀씀이가 학생 때와는 달리 커진 마당에 시급 몇 푼 받는 것으론 빚 청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란주점에서 일해볼 요량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되레 업소빚까지 떠안을까 두려워 포기했다고 한다.
“부모님께 도움을 청해 보았느냐”고 묻는 기자를 한심하다는 듯 잠시 바라본 P양은 “집에서 알면 끝장”이라며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니 연체빚만 다 갚으면 ‘알바’도 종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동안 몇 명의 남성과 ‘만남’을 가졌느냐”는 돌발성 질문까지 던지자 “카드빚 무서운 것 얘기해 줬으면 됐지 않느냐”며 급히 자리를 떴다.
P양과의 대화는 생맥주 500cc 한 잔으로 끝났지만, 그와 만나기까지 지난 며칠간 채팅을 거듭하는 동안 카드빚에 ‘결박’당해 ‘알바’를 시도하는 여성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돈 벌구 싶은 X’란 ID의 19세 여성(경기)은 “20만원만 주면 만나주겠다”고 했고, 심지어 ID를 ‘머니(money)가 필요해’라고 붙인 한 가출 여성(서울)은 “몇 번의 ‘알바’ 경험이 있다”며 “500만원만 선불로 주면 뭐든 다 하겠다. 동거까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나이도 19세. 기자와 접촉한 여성 신용불량자 중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다 사치벽 때문에 카드빚을 져 술집에서 1년간 일해 빚을 갚은 뒤 다시 점원 일을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경기침체 국면에서 급팽창한 개인(소비자)부채가 서민층의 ‘빚 대란’으로 이어져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이런 사례들은 비일비재하다.
남편(29)과 별거중으로 이혼을 종용당하고 있는 B씨(27ㆍ경기도 A시). 그는 ‘신용카드 연체대납’(고객의 카드 연체대금을 대신 갚아 카드 거래정지에서 풀어준 뒤 다시 현금서비스를 받게 해 고리를 뜯는 ‘현금깡’ 수법)을 하는 사채업자에게 급전을 빌렸다 더 큰 화를 불렀다. 2000년 말 아버지의 암 투병비와 어머니의 식당 개업비용을 대려 남편 몰래 자신 명의의 카드 3장으로 600만원을 신용대출했다가 연체한 B씨는 지난해 초 신용불량자가 됐다. 다급해진 그는 사채를 끌어다 이자를 포함한 카드빚 900만원을 일단 갚았지만, 월 10.8%의 사채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애써 장만한 아파트마저 건설업체의 부도 때문에 경매로 넘어갈 판이다.
전업주부여서 수입이 없는 B씨는 “빚 막기도 지쳤다. 6개월 내 빚을 다 갚아야 하고, 이혼하고 싶지도 않은데 속수무책”이라며 한 살, 세 살 난 두 아이를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 자포자기 상태다. 신용불량의 ‘낙인’이 가정 파탄 위기까지 부른 예다.
한국 신용사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경고하는 지표는 곳곳에 널려 있다. 신년 벽두(1월6일)에 날아든 ‘카드 신용불량자 100만명 돌파’ 소식도 그중 하나다. 보도에 따르면 신용카드 회원 4754만명(지난해 11월 말 현재) 중 전국은행연합회에 등록된 신용불량자가 104만명으로 전체 신용불량자 279만명의 37.2%에 달한다는 것.
그럴까. 엄밀히 따지면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279만명’ 중엔 개인사업자와 법인(법인사업자 포함)까지 섞여 있어 통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그러면 순수한 의미의 개인 신용불량자는 몇 명이나 될까. 그동안 금융업권별로 자체조사해 온 신용불량자 통계를 지난해 처음 공식 집계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개인 신용불량자는 외환위기가 도래한 1997년 142만9000명에서 98년 193만명, 99년 199만6000명, 2000년 208만4000명, 지난해 11월까지는 247만명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앞서의 ‘279만명’엔 못 미쳐도 한국의 ‘신용불량증’이 중증에 접어들었음을 방증하는 수치임엔 틀림없다.
과거와 달리 과소비형 신용불량자들이 두드러지게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금감원 신용정보팀 관계자는 “요즘 금감원에 접수되는 신용불량 관련민원 중 생활고로 인한 생계형 신용불량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밝힌다.
K씨(31) 역시 ‘무리’를 한 경우. 2년 전 테헤란밸리에서 일하다 사업자금을 빌려 벤처창업을 한 그는 펀딩에 실패했다. 심한 자금압박을 받은 C씨는 카드대출로 직원 월급을 충당했지만, 이로는 부족해 결국 사채를 빌리고 애인에게까지 돈을 빌려 급전을 융통했다. 미혼인 데다 빚을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아직 그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다. 그는 빚도 빚이지만 지인(知人)들과의 인간적 신뢰가 깨지지 않을까 더 두렵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고심하는 개인 신용불량자들이 갑작스럽게 폭증한 근본원인은 무차별한 신용카드 발급에 있다는 것이 중론. 내수를 진작해 수출부진으로 극심한 침체를 겪던 경제를 호전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소매금융에 치중한 카드사들이 신용도가 낮은 이들에게까지 카드 발급을 남발해 소득수준 이상의 신용한도로 무분별하게 과소비를 하도록 유인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금감원측도 “신용불량자 증가는 카드소비의 일반화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라면서도 “그 책임의 일부는 카드사에 있다”고 단언한다.
실제 카드사들은 발급 건수를 폭발적으로 부풀려왔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발급된 카드 수는 무려 8118만7000장.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3.6장에 이른다. 게다가 올해 경기회복이 가시화되면 신용카드 업종의 수익증가 속도가 한층 빨라져 발급 카드 수가 1억장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돼 ‘잠재적 파산자’로 불리는 신용불량자들이 더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신용불량의 덫에 걸리긴 10대들과 대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카드를 3장 갖고 있다는 S대 1년 D군(19)은 “카드회원 모집 ‘알바’를 하는 지인들을 통해 카드를 만든 후 겁없이 한도까지 써버려 고생중”이라며 “10대들 사이에도 카드빚을 결제일이 다른 카드의 현금대출로 틀어막는 ‘돌려막기’가 성행한다”고 털어놨다. 10대들의 경우 자신의 카드가 무용지물이 되면 부모의 카드를 몰래 쓰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사례는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다. 대부분 부모들이 빚을 대신 갚아주기 때문이다.
카드 하나가 연체되면 다른 카드까지 연쇄적으로 신용거래가 막히는 위험성을 지닌 속칭 ‘돌려막기’는 소득이 불안정한 대학생들에게도 치명적이다. D대 4년 L씨(26)도 ‘돌려막기’에 당했다. 그는 다른 친구 2명과 돌아가며 각자의 카드를 빌려 현금서비스를 받아 사용하다 결국 6개월 만에 ‘펑크’를 냈다.
“학생증만 보여주면 카드는 금방 만들어요. 그래도 처음 두어 달 동안은 잘 안 쓰죠. 그러다 친구들에게 한번 쏘잖아요? 그 후론 공돈 생긴 것으로 착각하고 마구 긁어대죠. 빚 때문에 휴학하고 입대하기도 하죠. 그런 애들 과마다 한둘쯤 있을걸요? 그래도 전 군대나 갔다 왔으니 망정이지….” 300만원쯤 빚졌다는 L씨는 취업난을 핑계로 휴학중이다. 그러나 그에겐 취직보다 빚 갚는 게 더 급선무다.
소득을 초과한 과도한 구매 및 현금서비스 이용-다른 카드 대출로 대금 메우기-신용불량 등록-사채와 ‘카드깡’ 대출…. ‘카드만능주의’에 빠진 성인들의 파산과정을 그대로 거치면서도 신용불량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게 10대들의 더 큰 문제다. 지난해 11월 말 현재 전국의 10대(만18∼19세) 카드회원 32만4000여명 중 신용불량자는 7456명. 이중 상당수는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임을 모른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1~9월 은행연합회, 한국신용정보㈜ 등 5개 신용정보기관 및 신용거래 경험자 390명(신용불량자 83명 포함)을 설문조사해 최근 내놓은 분석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소보원이 이 기간중 신용정보 관련 피해구제를 해준 98건 가운데 명의도용 계약 등 채무부존재 여부로 분쟁중인 상태임에도 일방적으로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경우만 55건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구책을 모색하는 이들도 생겼다. 서울 양천구 신정3동 ‘약속의 집.’ 현판도 없는 작은 ‘쉼터’지만, 수소문 끝에 용케 이곳을 찾아드는 ‘신용사회의 퇴출자들’은 하루 5∼6명. 지난 1월10일에도 2명의 신용불량자가 이곳에서 대표 석승억씨(35)로부터 채무변제 컨설팅을 받고 있었다. 2000년 2월 결성한 ‘과중채무자들의 모임’ (www.freechal.com/blacklist)과 같은 해 5월 발족한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www.credit815.org)의 회원 4000여명을 이끄는 석씨 역시 신용불량자. 한때 카드사 직원으로 일한 그는 1995년 개인사업을 하다 사채를 끌어 쓰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된 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재기를 돕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금융거래상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하지만, ‘신용불량=양심불량’이란 등식을 내세워 채무변제 능력을 잠재한 이들마저 ‘도매금’으로 신용불량자로 등재해 재기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관행이 지속되는 한 신용불량자의 최소화는 요원하다는 게 그의 주장.
“신용불량의 설움은 당해보기 전엔 모른다. 나도 세 번 자살을 시도했다. 주식투자나 사업실패 등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뒤 절도와 사기범죄를 모의하거나 장기를 매매하려 했다고 털어놓는 회원도 많다.” 석씨의 이 말이 아니더라도 신용불량자의 폭증은 끊임없이 사회문제로 치닫는다.
그러나 신중한 카드발급을 유도해야 할 금융감독당국은 미온적이다. 지난해 12월 금융감독위원회가 신용카드 남발의 폐해를 줄이려 카드사들에 대해 카드발급 신청인의 소득증빙 구비 의무를 부과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여신전문금융업 감독규정’ 개정안을 마련하긴 했지만, 규제개혁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금감위는 서둘러 ‘카드사들이 카드발급 신청인의 소득유무를 확인하고 관련기록을 보관해야 한다’고 다시 규정을 개정하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의 카드 과소비 행태도 문제라고 꼬집는다. 상명대 양세정 교수(41ㆍ소비자경제학)는 “신용카드 사용 속도에 비해 사용자가 소득에 맞춰 개인부채를 적절히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신용불량자 양산의 한 원인”이라며 “정상적인 카드 사용자라면 대출 한도액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해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을 해법조차 감감한 ‘신용불량 대한민국’은 이제 본격적인 개인파산 시대를 맞았다. 여전히 사람은 돈보다 아름다운가.
1월17일 밤 9시20분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프집. 기자와 마주한 P양(21)은 대화 내내 몹시 언짢아했다.
P양과는 1시간 전 모 채팅사이트를 통해 ‘만남’을 갖기로 약속한 사이. 취재 목적으로 기자가 ‘불건전한 만남’을 암시하는 방제(房題ㆍ대화방 제목)를 붙인 1대 1 대화방을 만든 뒤 찾아온 다섯 번째 ‘접속자’가 그였다. 5분 가량 ‘탐색’ 끝에 30만원에 흥정(?)이 이뤄졌지만, 대면 후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P양의 표정엔 불쾌감이 역력했다.
“까놓고, 목돈 만질 수 있는 게 ‘알바’(성매매) 말고 또 있어요?” 재작년 대학진학에 실패한 뒤 1년 넘게 ‘백수’ 생활을 했다는 P양은 지난해 세 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빚을 졌다고 했다. 옷 사 입고, 머리 손질하고, 현금서비스 받아 1년간 유흥비로 날린 돈이 500만원. 6개월간 편의점 아르바이트 끝에 200만원은 겨우 메웠지만, 이미 씀씀이가 학생 때와는 달리 커진 마당에 시급 몇 푼 받는 것으론 빚 청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란주점에서 일해볼 요량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되레 업소빚까지 떠안을까 두려워 포기했다고 한다.
“부모님께 도움을 청해 보았느냐”고 묻는 기자를 한심하다는 듯 잠시 바라본 P양은 “집에서 알면 끝장”이라며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니 연체빚만 다 갚으면 ‘알바’도 종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동안 몇 명의 남성과 ‘만남’을 가졌느냐”는 돌발성 질문까지 던지자 “카드빚 무서운 것 얘기해 줬으면 됐지 않느냐”며 급히 자리를 떴다.
P양과의 대화는 생맥주 500cc 한 잔으로 끝났지만, 그와 만나기까지 지난 며칠간 채팅을 거듭하는 동안 카드빚에 ‘결박’당해 ‘알바’를 시도하는 여성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돈 벌구 싶은 X’란 ID의 19세 여성(경기)은 “20만원만 주면 만나주겠다”고 했고, 심지어 ID를 ‘머니(money)가 필요해’라고 붙인 한 가출 여성(서울)은 “몇 번의 ‘알바’ 경험이 있다”며 “500만원만 선불로 주면 뭐든 다 하겠다. 동거까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나이도 19세. 기자와 접촉한 여성 신용불량자 중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다 사치벽 때문에 카드빚을 져 술집에서 1년간 일해 빚을 갚은 뒤 다시 점원 일을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경기침체 국면에서 급팽창한 개인(소비자)부채가 서민층의 ‘빚 대란’으로 이어져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이런 사례들은 비일비재하다.
남편(29)과 별거중으로 이혼을 종용당하고 있는 B씨(27ㆍ경기도 A시). 그는 ‘신용카드 연체대납’(고객의 카드 연체대금을 대신 갚아 카드 거래정지에서 풀어준 뒤 다시 현금서비스를 받게 해 고리를 뜯는 ‘현금깡’ 수법)을 하는 사채업자에게 급전을 빌렸다 더 큰 화를 불렀다. 2000년 말 아버지의 암 투병비와 어머니의 식당 개업비용을 대려 남편 몰래 자신 명의의 카드 3장으로 600만원을 신용대출했다가 연체한 B씨는 지난해 초 신용불량자가 됐다. 다급해진 그는 사채를 끌어다 이자를 포함한 카드빚 900만원을 일단 갚았지만, 월 10.8%의 사채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애써 장만한 아파트마저 건설업체의 부도 때문에 경매로 넘어갈 판이다.
전업주부여서 수입이 없는 B씨는 “빚 막기도 지쳤다. 6개월 내 빚을 다 갚아야 하고, 이혼하고 싶지도 않은데 속수무책”이라며 한 살, 세 살 난 두 아이를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 자포자기 상태다. 신용불량의 ‘낙인’이 가정 파탄 위기까지 부른 예다.
한국 신용사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경고하는 지표는 곳곳에 널려 있다. 신년 벽두(1월6일)에 날아든 ‘카드 신용불량자 100만명 돌파’ 소식도 그중 하나다. 보도에 따르면 신용카드 회원 4754만명(지난해 11월 말 현재) 중 전국은행연합회에 등록된 신용불량자가 104만명으로 전체 신용불량자 279만명의 37.2%에 달한다는 것.
그럴까. 엄밀히 따지면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279만명’ 중엔 개인사업자와 법인(법인사업자 포함)까지 섞여 있어 통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그러면 순수한 의미의 개인 신용불량자는 몇 명이나 될까. 그동안 금융업권별로 자체조사해 온 신용불량자 통계를 지난해 처음 공식 집계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개인 신용불량자는 외환위기가 도래한 1997년 142만9000명에서 98년 193만명, 99년 199만6000명, 2000년 208만4000명, 지난해 11월까지는 247만명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앞서의 ‘279만명’엔 못 미쳐도 한국의 ‘신용불량증’이 중증에 접어들었음을 방증하는 수치임엔 틀림없다.
과거와 달리 과소비형 신용불량자들이 두드러지게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금감원 신용정보팀 관계자는 “요즘 금감원에 접수되는 신용불량 관련민원 중 생활고로 인한 생계형 신용불량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밝힌다.
K씨(31) 역시 ‘무리’를 한 경우. 2년 전 테헤란밸리에서 일하다 사업자금을 빌려 벤처창업을 한 그는 펀딩에 실패했다. 심한 자금압박을 받은 C씨는 카드대출로 직원 월급을 충당했지만, 이로는 부족해 결국 사채를 빌리고 애인에게까지 돈을 빌려 급전을 융통했다. 미혼인 데다 빚을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아직 그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다. 그는 빚도 빚이지만 지인(知人)들과의 인간적 신뢰가 깨지지 않을까 더 두렵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고심하는 개인 신용불량자들이 갑작스럽게 폭증한 근본원인은 무차별한 신용카드 발급에 있다는 것이 중론. 내수를 진작해 수출부진으로 극심한 침체를 겪던 경제를 호전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소매금융에 치중한 카드사들이 신용도가 낮은 이들에게까지 카드 발급을 남발해 소득수준 이상의 신용한도로 무분별하게 과소비를 하도록 유인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금감원측도 “신용불량자 증가는 카드소비의 일반화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라면서도 “그 책임의 일부는 카드사에 있다”고 단언한다.
실제 카드사들은 발급 건수를 폭발적으로 부풀려왔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발급된 카드 수는 무려 8118만7000장.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3.6장에 이른다. 게다가 올해 경기회복이 가시화되면 신용카드 업종의 수익증가 속도가 한층 빨라져 발급 카드 수가 1억장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돼 ‘잠재적 파산자’로 불리는 신용불량자들이 더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신용불량의 덫에 걸리긴 10대들과 대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카드를 3장 갖고 있다는 S대 1년 D군(19)은 “카드회원 모집 ‘알바’를 하는 지인들을 통해 카드를 만든 후 겁없이 한도까지 써버려 고생중”이라며 “10대들 사이에도 카드빚을 결제일이 다른 카드의 현금대출로 틀어막는 ‘돌려막기’가 성행한다”고 털어놨다. 10대들의 경우 자신의 카드가 무용지물이 되면 부모의 카드를 몰래 쓰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사례는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다. 대부분 부모들이 빚을 대신 갚아주기 때문이다.
카드 하나가 연체되면 다른 카드까지 연쇄적으로 신용거래가 막히는 위험성을 지닌 속칭 ‘돌려막기’는 소득이 불안정한 대학생들에게도 치명적이다. D대 4년 L씨(26)도 ‘돌려막기’에 당했다. 그는 다른 친구 2명과 돌아가며 각자의 카드를 빌려 현금서비스를 받아 사용하다 결국 6개월 만에 ‘펑크’를 냈다.
“학생증만 보여주면 카드는 금방 만들어요. 그래도 처음 두어 달 동안은 잘 안 쓰죠. 그러다 친구들에게 한번 쏘잖아요? 그 후론 공돈 생긴 것으로 착각하고 마구 긁어대죠. 빚 때문에 휴학하고 입대하기도 하죠. 그런 애들 과마다 한둘쯤 있을걸요? 그래도 전 군대나 갔다 왔으니 망정이지….” 300만원쯤 빚졌다는 L씨는 취업난을 핑계로 휴학중이다. 그러나 그에겐 취직보다 빚 갚는 게 더 급선무다.
소득을 초과한 과도한 구매 및 현금서비스 이용-다른 카드 대출로 대금 메우기-신용불량 등록-사채와 ‘카드깡’ 대출…. ‘카드만능주의’에 빠진 성인들의 파산과정을 그대로 거치면서도 신용불량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게 10대들의 더 큰 문제다. 지난해 11월 말 현재 전국의 10대(만18∼19세) 카드회원 32만4000여명 중 신용불량자는 7456명. 이중 상당수는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임을 모른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1~9월 은행연합회, 한국신용정보㈜ 등 5개 신용정보기관 및 신용거래 경험자 390명(신용불량자 83명 포함)을 설문조사해 최근 내놓은 분석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소보원이 이 기간중 신용정보 관련 피해구제를 해준 98건 가운데 명의도용 계약 등 채무부존재 여부로 분쟁중인 상태임에도 일방적으로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경우만 55건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구책을 모색하는 이들도 생겼다. 서울 양천구 신정3동 ‘약속의 집.’ 현판도 없는 작은 ‘쉼터’지만, 수소문 끝에 용케 이곳을 찾아드는 ‘신용사회의 퇴출자들’은 하루 5∼6명. 지난 1월10일에도 2명의 신용불량자가 이곳에서 대표 석승억씨(35)로부터 채무변제 컨설팅을 받고 있었다. 2000년 2월 결성한 ‘과중채무자들의 모임’ (www.freechal.com/blacklist)과 같은 해 5월 발족한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www.credit815.org)의 회원 4000여명을 이끄는 석씨 역시 신용불량자. 한때 카드사 직원으로 일한 그는 1995년 개인사업을 하다 사채를 끌어 쓰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된 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재기를 돕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금융거래상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하지만, ‘신용불량=양심불량’이란 등식을 내세워 채무변제 능력을 잠재한 이들마저 ‘도매금’으로 신용불량자로 등재해 재기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관행이 지속되는 한 신용불량자의 최소화는 요원하다는 게 그의 주장.
“신용불량의 설움은 당해보기 전엔 모른다. 나도 세 번 자살을 시도했다. 주식투자나 사업실패 등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뒤 절도와 사기범죄를 모의하거나 장기를 매매하려 했다고 털어놓는 회원도 많다.” 석씨의 이 말이 아니더라도 신용불량자의 폭증은 끊임없이 사회문제로 치닫는다.
그러나 신중한 카드발급을 유도해야 할 금융감독당국은 미온적이다. 지난해 12월 금융감독위원회가 신용카드 남발의 폐해를 줄이려 카드사들에 대해 카드발급 신청인의 소득증빙 구비 의무를 부과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여신전문금융업 감독규정’ 개정안을 마련하긴 했지만, 규제개혁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금감위는 서둘러 ‘카드사들이 카드발급 신청인의 소득유무를 확인하고 관련기록을 보관해야 한다’고 다시 규정을 개정하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의 카드 과소비 행태도 문제라고 꼬집는다. 상명대 양세정 교수(41ㆍ소비자경제학)는 “신용카드 사용 속도에 비해 사용자가 소득에 맞춰 개인부채를 적절히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신용불량자 양산의 한 원인”이라며 “정상적인 카드 사용자라면 대출 한도액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해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을 해법조차 감감한 ‘신용불량 대한민국’은 이제 본격적인 개인파산 시대를 맞았다. 여전히 사람은 돈보다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