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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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을 빚는 千의 미소

남해군 불이산방 정금호씨… 웃는 부처 1천 점에 파묻혀 웃는 장승 만들기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5-01-05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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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학을 빚는 千의 미소
    초벌 토기에 무쇠 솥뚜껑을 얹어 만든 우편함을 지나 꽃대문을 여니 ‘헤’ 하니 웃는 바보 장승이 손님을 반긴다. 뭉뚝한 코와 과장된 눈의 못생긴 얼굴, ‘天下大將軍’ 대신 ‘장승인 나도 바보가 되고 싶다’고 쓰인 장승의 불뚝 배에서 해학이 흘러 내린다. 양옆 단풍나무를 끼고 돌계단을 올라 토방집 두어 채를 아래로 바라보니 짚으로 짠 지붕 위에는 놀랍게도 ‘요강꽃’이 만개해 있다. 수백 개의 요강을 짊어진 토방지붕은 “왜 웃지 않느냐”고 묻는 듯하다.

    경남 남해군 산동면 동천리 금산 자락에 위치한 ‘불이산방’(不二山房)은 주인인 정금호씨(54)를 그대로 닮았다. 늘 웃는 그의 표정처럼 산방 안에 웃지 않는 인물상은 하나도 없고, 물건 하나하나마다 해학을 품지 않은 것 또한 없다. 딴에는 진지하다는 표정을 지어도 대머리에 두건을 쓴 그의 얼굴에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폭소가 아닌 미소, 그리고 잔잔함, 그의 얼굴과 산방 분위기는 그 이름처럼 서로 ‘不二’하다. 황톳물로 염색한 저고리를 입은 그를 보고 있노라니 곳곳에 우뚝 선 장승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쉽게 짐작이 간다.

    ‘햐! 이 좋은 세상 덩더쿵, 덩더쿵’ ‘세속과 청산이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있는 곳에 꽃 피지 않는 이 없다’ 장승의 배에 새긴 문구들마다 이미 세속을 등진 그의 인생관이 녹아 있다.

    불이산방은 불교 3대 수양지로 알려진 금산 비탈에 계단식으로 지어진 토방집 다섯 채와 300여 평의 공간이 전부다. 하지만 불이산방을 남해군도의 ‘문화 1번지’로 만든 것은 따로 있다. 마당과 지붕, 토담집을 넉넉하게 채우는 5000여 점의 장승과 요강, 민속품 그리고 부처가 바로 그것. 웃고 있거나 웃길 수 없는 것은 들이지 않은 듯, 그윽하게 또는 샐쭉하게 때로는 깔깔대며 웃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단연 세계 각국에서 모인 1000점의 부처와 그 잔잔한 웃음이다. 사람은 어떤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를 두고 ‘산 부처’라고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부처님의 미소가 좋아 30년 동안 웃는 부처만 따라다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와 웃는 부처와의 만남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68년 동아대 건축공학과 3학년 시절 우연히 설악산에서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가 자신을 보고 웃는 철제 부처를 만난 것이 첫번째 인연이었다. 이후 그가 가는 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그곳에 살던 사람도 모르고 있던 불상들이 불쑥 튀어나와 정씨의 눈에만 보이기 시작한 것. 지난 80년 그가 사립학교 교직원 연수차 대만에 갔을 때는 어느 철물점의 부품 자루 밑에서 코끼리 상아를 깎아 만든 부처 24상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웃는 부처였다.

    산사태가 난 개울을 지나다 발견한 부처, 밭에 묻혀 있던 부처, 바위 틈에 갇힌 부처 등등. 중국 서안 지역에 있는 주막집에서는 돈을 계산하려다 카운터 밑에 감춰진 상아 부처를 모셔오기도 했다. 언제부턴가는 그가 부처를 찾지 않아도 부처가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모신 불상과 그의 산방을 둘러본 스님이 배낭 속에서 웃는 불상 한 점을 내놓으며 이 부처는 여기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다며 내놓고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웃지 않는 부처, 자신의 마음을 당기지 않는 부처는 아무리 값이 나가도 취하지 않았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인연이고 인연이 아닌 부처는 모시지 않는다는 게 그의 원칙이기 때문.

    해학을 빚는 千의 미소
    그의 웃는 부처 1천 불 중에는 토종 부처들도 많지만 대부분이 인도·네팔·중국 등 외국에서 보내온 것들이다. 지난 99년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25년의 교사 생활 동안 그의 이런 모습을 익히 아는 2만여 명의 제자와 동료, 후배들은 웃는 불상만 보면 그에게 보냈다. 심지어 독일에서 온 부처도 있다. 불이산방이 중국 지사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역시 인연은 따로 있는 것일까. 1천 불의 부처님을 모신 불이산방 토담방 한구석에는 유난히 흰빛을 띠는 불상이 하나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분이 도저히 일반 가정에 모셔놓기에는 부담이 된다며 가져온 불상이었다.

    불교계에서도 보기 드문 하얀 불상이라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웃을 듯 말 듯 희미한 불상의 웃음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이 불상이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가 며칠씩 앓아눕거나 몸이 아플 때는 3일 동안 진땀을 흘려 수건으로 닦아낸 적도 있다. 친구들과 동네 사람이 이야기하기 전에는 그도 이를 까맣게 몰랐다.

    사실 ‘불이산방’은 그가 태어난 집터이자 개인 박물관이지만 동천 마을 사람에겐 이곳이 마을 사랑방이라 불린다. 91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들어온 그는 마을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곳을 공개했다. 그래서 산방 이름도 둘이 아니고, 서로 다르지 않다 해서 불이산방이라 지었다.

    마을 사람은 화가 나거나 언짢은 일이 있으면 이곳을 찾는다. 그리곤 대머리에 입을 벌린 채 배를 내밀고 웃는 포대화상 불상을 보고는 시름을 떨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곳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온갖 시름이 거짓말처럼 없어진다는 것.

    불이산방에는 불상 외에도 5000여 점에 달하는 민속품들이 쌓여 있다. 웃는 부처 모으기의 부산물들이다. 물레, 반짇고리, 소쿠리, 동백나무 톱, 술병, 각종 농구, 사라지거나 보기 힘든 민속품들은 모두 모여 있다. 종도 많다. 폐교된 학교에 걸려 있던 종이나 폐선에 걸려 있던 것들이다. 다섯 명이 들어도 다 들지 못하는 범종도 있다. 방치하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묻지마 수집’병에 들게 만든 것이리라.

    “연대와 시기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안식과 웃음을 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에게 있는 모든 소장품들은 시대와 가치를 초월해 있다. 진품과 가짜의 구별이 없고, 양식과 작품성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과 사람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그만인 것.

    웃는 부처를 따라다니던 그는 몇 년 전부터 아예 웃는 얼굴을 직접 표현해 보기로 작정했다. 장승과 도자기 제작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웃는 부처를 모으다가 웃는 장승을 만들기 시작한 터인데, 그가 구운 도자기에도 웃는 부처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장승 재료들은 남해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들, 홍수에 쓸려 내려온 나무들이 재료가 되었다. 수명이 다한 고목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이 장승들로 웃는 장승 축제를 열어 사람의 배꼽을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취재를 하다 보니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 많은 것들을 무슨 돈으로 어떻게 모았느냐는 것이 하나고, 왜 모든 것이 1천 점이 아니면 안 되느냐는 것이 둘째였다. 지붕에 얹은 요강도 1천 점이 모이면 그것으로 요강 분수대를 만들겠다는 그다.

    “김을 매거나, 밭을 갈아주기도 하고, 머슴살이도 해주고 그러면서 모았지요. 안 되면 막걸리 받아주거나 돈 주고 샀죠…. 월급도 들어가고 퇴직금도 들어갔지만 제가 지금 웃고 있고, 사람이 행복해하지 않습니까. 그것이면 족합니다.”

    “천이라는 숫자는 그저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요강에는 조선 여인들의 기가 녹아 있어요. 분수를 만들어 분출하는 조선 여인들의 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50줄의 늦은 나이에 한국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법사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정말 ‘웃기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막걸리 한사발과 차, 그리고 웃음이 있으면 인생에 부족한 것이 없다는 그는, 척박한 문화 불모지인 남해군에 번듯한 ‘예술촌’을 건립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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