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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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마오 카리스마를 닮고 싶다”

내년 국가주석서 퇴임 2線으로… ‘길이 남을 지도자’ 위한 이미지 메이킹 열중

  • < 강현구/ 베이징 통신원 > hana@bj163.com

    입력2005-01-04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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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쩌민 “마오 카리스마를 닮고 싶다”
    지금 중국에는 마오쩌둥(毛澤東)열풍이 불고 있다. 혹자는 연일 매스컴을 점령한 마오열풍에서 문화혁명(文化革命, 1966~1976)을 연상한다. 그러나 지금 마오열풍은 분명 그 때와 다르다. 문혁의 마오열풍이 맹목적인 마오에 대한 충성 행렬이었다면, 지금의 마오열풍에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즉, 지금의 마오열풍은 단순히 중국 공산당 건당 80주년을 맞는 통과의례로 보기 어렵다. 실제 이번 공산당 80주년 기념의 물결 속엔 중국 공산당의 건설과정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전사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창시자인 천두슈(陳獨秀)는 물론이고, 당장 건국 4대 영웅 류사오치(劉少奇),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이름조차 마오의 그림자에 가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건당 기념 분위기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보면 그 본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건당 80주년에 즈음한 이 시기에 중국인민들이 마오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마오가 다른 건국 영웅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점은 당에 기반을 둔 지도자라는 점과, 또 강한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행정가 저우언라이는 물론이고, 마오의 유일한 정적이었던 류사오치도 갖추지 못한 장점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하필 중국은 마오의 이런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인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선 먼저 현재 중국의 정치 기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내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세대교체라는 또 다른 실험을 하게 된다. 그 핵심은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퇴임이다. 물론 장쩌민 역시 덩샤오핑(鄧小平)처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유지하겠지만, 이것이 대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장쩌민이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물러나는 당대 중국 역사에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장쩌민이 안심하고 물러날 수 있을 만큼 현재 중국 정치에서 안정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장쩌민 “마오 카리스마를 닮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 곧 스스로 물러날 장쩌민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일까. 혹자는 그것을 자신의 심복인 쩡칭홍(曾慶紅)에게 총리직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현실 정치의 문제이고, 장쩌민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중국 인민에게 길이 남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 당대 중국 역사상 장쩌민처럼 약체로 최고지도자가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장쩌민의 등장 자체가 덩샤오핑의 안배에 의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과도기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한 불안정한 권력이었다.

    실제 장쩌민의 집권 초기 위상은 덩샤오핑의 강력한 후원이 있음에도 불안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석인 장쩌민과 당시 부총리에 불과했던 주룽지를 라이벌 관계로 인식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외부에 비치는 장쩌민은 리펑(李鵬), 차오스(喬石) 등 보수파와 주룽지 등 개혁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모습이었다. 장쩌민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장쩌민의 선택은 무엇일까. 모든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던 장쩌민은 당내 영향력 확보에 주력했다. 아무리 약체라도 중국의 주석은 곧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다. 당에서의 영향력 강화는 그대로 국가에서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가 선택한 당에 대한 영향력 강화는 한참 돌아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사상공작 강화였다.



    장쩌민이 주창한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社會主義精神文明建設)을 시발로 ‘3강’(三講) ‘3개 대표’(三個代表)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책구호들은, 마오의 ‘사회주의 강국 건설’이나 덩의 ‘개혁·개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인민들에게 다가갔다. 특히 개혁·개방의 급격한 조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회문제들, 특히 극심한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해결하는데 장쩌민의 이러한 정책구호들은 하나의 대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장쩌민의 사상상, 도덕상의 상대적 우월성이 소외된 많은 인민들에게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곧 장쩌민의 권력강화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97년의 차오스 반란이었다. 당시 차오스는 보수파들의 지지를 얻어 장쩌민을 밀어내려는 야심찬 계획을 준비했고, 그 본격적인 대결의 장이 그 해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였다. 베이다이허 회의는 중국의 유명한 휴양지인 베이다이허에서 해마다 여름에 개최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보통 가을에 열리는 당대회의 주요 안건들을 점검한다. 당연히 베이다이허에서의 결정이 당대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차오스는 이 회의를 통해 장쩌민을 무력화시키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축출되고 말았다. 차오스의 축출을 계기로 장쩌민은 당내 영향력을 굳히는 데 성공한다. 이후의 과정은 장쩌민에게 탄탄대로였다. 자신감을 얻은 장쩌민은 그 후 당·정을 아우르며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국제적 지위 향상은 당연히 장쩌민의 이러한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장쩌민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약해 보이는 카리스마가 그것이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권력의 길을 인도한 덩샤오핑에게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대한 덩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마오열풍 본질에는 장쩌민의 이러한 고민이 숨겨져 있다. 장쩌민은 마오나 덩처럼 퇴직 후에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의 키워드는 강한 사회주의 중국의 건설이다.

    당 건설 80주년 기념전시회나 기념방송의 이미지 메이킹을 보면 이러한 의도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인다. 큰 마오의 사진과 작은 덩의 사진 그리고 왠지 마오와 비슷한 자세의 역시 큰 장쩌민 사진이 나란히 흘러나오는 장면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제 장쩌민은 개혁·개방이 아닌 강한 사회주의 중국 건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이제 과도기적 혼란이 아닌 강한 중국을 갈망하는 중국 인민의 요구에 절묘하게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덩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하고 있는 것의 정치적 의미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제 가난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손 내밀던 중국은 중국인들에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 중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중국이며 장쩌민은 이러한 인민들의 변화된 요구를 실현한 지도자로 인식되고 싶다. 이것이 마오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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