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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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채무’ 신축적으로 운영하자

규모 논쟁보다 앞으로 씀씀이가 더 중요… 사회복지·남북경협 등 가장 큰 부담

  •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입력2005-01-04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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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채무’ 신축적으로 운영하자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물론 온 나라를 들끓게 한 국가채무 논쟁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국가채무가 80조 원 수준이라던 정부의 공식 발표와 달리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가채무가 400조 원 수준이라 경고하고 나서면서 시작한 국가채무 논쟁은 총선 정국에서 연일 정치 이슈로 떠올랐다. 김대통령은 당시 야당의 공세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다며 이헌재 재경부 장관을 강하게 질책하기까지 했고 야당은 국가채무 논쟁으로 짭짤한 반사이익을 보았다는 평가도 제기되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국가채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6월 임시국회에서 재정건전화법 제정을 앞두고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여야가 재정건전화법의 제정에 합의하고도 최종적으로 이견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 법에 국가채무의 정의를 명시하는 데 따른 여야 간 견해차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재정건전화법에 국가채무의 정의를 ‘중앙정부의 채무와 지방정부의 채무’만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한나라당은 여기에 보증채무를 포함해 사실상 정부가 부담해야 할 잠재적 형태의 채무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야 간 대립의 배경에는 내년 대선에서 국가채무 논쟁이 다시 불거질 것을 염려해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아예 못을 박아놓아야 한다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국가채무 논쟁이 사그러든 것이 아니라 제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재정건전화법’ 제정 앞두고 여야 또 격돌 예상

    그러나 대다수의 재정 전문가들은 이러한 여야의 논란에 대해 정파적 이해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현실을 정확하게 보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IMF 기준을 따르자면 우리 나라의 국가채무는 120조 원(2000년 말 현재)이라며 금융구조조정 과정에 투입한 자산관리공사의 부실채권정리기금채권과 예금보험공사의 예금보험기금채권에 대한 정부의 보증은 IMF 기준에 따르는 국가채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보증채무는 금융구조조정의 성공 여부나 경기여건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 중 상당액수가 채무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시중은행에는 미래 상환 가능성까지를 엄격하게 고려해 대손충당금을 쌓으라고 연일 독촉하면서 정작 정부는 떼일 가능성이 높은 돈에 대해 “빚이 아니다”고 우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정부에서도 예보가 부실금융기관에 지원한 예금대지급분과 출연한 공적자금은 거의 회수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4월 말 현재 이 금액만도 26조 원에 이른다. 따라서 이 부분을 포기하고 부실은행에 출자한 정부 지분을 얼마나 비싼 값에 파느냐에 따라 액수는 달라지겠지만 결국 공적자금 회수비율에 따라 정부의 빚이 크게 늘어날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공기업의 채무와 통화안정증권까지 국가채무 범위에 포함해 ‘부풀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한때 한나라당은 ‘국가채무 규모가 1000조 원에 달한다’는 주장을 펼쳐 재정 전문가들에게서 과도한 주장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국가채무’ 신축적으로 운영하자
    국가채무라는 것은 명칭을 어떻게 붙이든 간에 결국 정부 부담으로,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라는 점에서 용어에 대한 정의보다 앞으로 줄 돈이 얼마나 될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는 것이 옳다. 통화량을 따질 때 M1, M2, MCT 등 다양한 지표를 사용하듯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성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IMF 교과서만을 펴들고 ‘이 정의에 해당하지 않으니까 괜찮다’는 정부의 태도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서강대 송의영 교수(경제학)는 이를 두고 “수륙양용차가 배인지 자동차인지를 가리는 논쟁을 그만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중앙정부 채무와 지방정부 채무만 합친 것을 ‘공식적인’ 국가채무로 본다면 2000년 말 현재 우리의 국가채무는 119조7000억 원이 된다. 이는 GDP의 약 23%에 해당하는 수준. OECD 국가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70%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정부 논리의 핵심이다. 또 OECD 국가 중 순채권국은 우리 나라를 비롯해 노르웨이·스웨덴 등 3개국밖에 안 된다는 점도 내세운다. IMF 이후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부으면서도 우리 경제가 성장 기조를 잃지 않았던 것은 건실한 재정에 힘입은 바가 큰 것도 사실이다.

    연구기관들이 내놓은 중장기 재정전망을 보더라도 국가부채/GDP의 비율은 2010~2020년까지 꾸준히 하락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붙어 있다. 바로 세입이 안정적으로 늘어나고 세출이 현재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무너지면 국가부채의 비중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또한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향후 10~20년에 세출 규모가 크게 늘어나리라는 점이다. 특히 사회복지예산과 남북경협관련 수요가 크게 늘어나리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당장 우리 나라 통합재정지출에서 사회복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독일의 45.3%(1991년), 캐나다의 39.8%(1994년)보다 12.4%(1999년)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다. 의료보건 지출도 비슷한 수준. 이 부분을 향후 20년 안에 선진국 수준으로 따라잡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수적이다. 또 2020년경부터 우리 인구의 노령화가 급속하게 진행할 전망이므로 사회복지 관련지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국민연금급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이 역시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 국민연금이 지금처럼 ‘몇 년간 불입하면 생애소득의 몇 %를 주는’ 확정급여형 구조 아래서는 잠재적 부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적자나 고갈 여부에 관계없이 정부가 지급해야 할 돈이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고영선 박사는 “사회복지분야 지출의 경우 일단 증가하면 좀처럼 줄이기 힘든 특성을 고려해 초기에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적인’ 국가채무 이외에 ‘현실적인’ 국가채무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도 전문가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촉진과 성공을 위해서라도 정부가 국가채무의 개념을 신축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금융연구원 박종규 박사는 스웨덴의 구조조정 사례를 들어 정부가 공적자금의 이자지급분이라도 국가채무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웨덴의 경우 이러한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재정적자의 폭은 크게 늘었지만 국민에게 자신이 낸 세금이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에 투입되었다는 자각을 갖게 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모든 국민이 정부의 편에 서서 강력한 구조조정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 박박사는 “‘납세자의 이익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 앞에서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은행권이나 일부 이익집단의 목소리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스웨덴 구조조정 성공의 열쇠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펴는 전문가들조차도 선거를 앞두고 정부나 여당이 재정적자 증가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조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보인다. 성균관대 안종범 교수(경제학)는 “2003년 이후 공적자금의 이자부담이 국민 몫으로 모조리 돌아오는 상황에서 정치적 결단 없이는 재정위기의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정치적 결단 없이는, 전문가들이 ‘재정 위기의 가능성’을 경고하더라도 정부는 ‘현재는 위기가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하는 사오정식 문답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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