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씨는 ‘냉면국수는 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선입견 때문에 숯가루를 썼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냉면집에서는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모두 취급한다. 흔히 사람은 국물에 말면 ‘물냉면’, 양념장에 비비면 ‘비빔냉면’으로 알고 있으며, 냉면국수라면 ‘검은 색에 가늘고 질긴 면’을 쉽게 떠올리지만 냉면이라고 다 같은 냉면이 아니다.
평양냉면은 담백함과 수수한 맛

다른 재료, 다른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인 만큼 맛도 다르다. 평양음식이 원래 짜지도 맵지도 않은 담백미가 특징인지라 평양냉면도 담백하고 수수한 것이 제대로 된 맛이고, 메밀과 감자녹말을 5 대 1로 섞어 면발을 뽑기 때문에 찰기가 적어 줄줄 처지는 느낌이다. 요즘엔 메밀에 밀가루나 전분을 더 섞어 찰기를 살리는 곳이 많지만 너무 쫄깃해지면 냉면발의 깊은 맛을 낼 수 없다고 미식가들은 말한다.
북쪽에 고향을 둔 이들은 겨울밤이 깊어갈 때 야식으로 먹던 냉면맛을 잊지 못한다. 서울에서 유명한 평양냉면 전문점 중 하나인 ‘우래옥’에서 만난 박진효씨(76)는 평안도가 고향으로, 어렸을 때 먹던 냉면맛을 못 잊어 50년째 이 집을 드나드는 단골 중의 단골이다.
“옛날엔 주로 겨울에 냉면을 먹었지. 시원한 동치미국물이 제 맛을 내기 시작하면 국수를 말아 뜨거운 온돌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이가 시릴 만큼 찬 냉면을 먹는 게 최고 야식이었어.” 꿩고기가 없으면 토끼고기로 육수를 내기도 했다고 박씨는 전한다. 그가 월남한 46년만 해도 서울에 냉면집이라곤 우래옥 한 곳밖에 없었다. 그 후 피난민들이 차린 냉면집들이 속속 생겼는데, 꼭 청사초롱처럼 한지를 둥글게 말아 처마에 달아놓는 것이 냉면집이라는 표시였다.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 중에도 냉면 애호가들이 많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는 칼국수, 삼청동 총리공관은 냉면으로 상징되던 때가 있었다. 총리공관 냉면은 문민정부 세 번째 총리였던 이영덕 총리에서 비롯했다. 평안도 출신인 이총리는 냉면을 좋아해 평소 냉면집을 자주 찾았는데, 총리가 된 후 냉면집 출입이 어려워지자 아예 총리공관에 냉면국수틀을 갖춰놓고 손님들에게 평양냉면을 대접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와 그의 누나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은 한집에 살면서 손님들에게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남매집에 가서 냉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명사 축에 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민족복지재단 정정애 부이사장은 “두 분은 손님들이 오기 1주일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꿩고기 육수를 내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서 맛깔스런 평양냉면을 대접했다”고 회고한다.
북한에서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대표하는 곳은 평양의 옥류관과 함흥의 신흥관이다.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집이라 선전하는 옥류관은 요리사만 300명에 하루 최대 1만 그릇의 냉면이 팔린다. 이곳에서 냉면맛을 본 사람은 “남한보다 면이 1.5배쯤 굵고 면과 육수의 색이 황토색이다. 육수는 진한 닭고기 냄새를 풍겨 마치 삼계탕 국물을 차게 한 느낌이다. 첫맛은 별 느낌이 없지만 숟가락을 놓을 때쯤이면 고소한 여운이 위 속을 파고든다”고 전한다.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노준양 교수(서울대 의대)도 얼마 전 평양을 방문해 옥류관 냉면을 맛보고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냉면을 100g, 200g, 300g 등으로 나누어 팔았는데 보통 200g짜리가 어른 1인분이 먹기에 적당한 양. 그런데 그는 앉은 자리에서 700g을 먹어치웠다. “서울에도 맛있는 냉면집이 많지만, 그곳 냉면맛은 정말 훌륭하더군요. 순메밀로 만든 국수가 술술 잘 넘어가고 밑이 보일 정도로 맑은 육수는 개운하고 시원했습니다.”

‘진짜’ ‘가짜’를 떠나 실향민의 고향을 그리는 향수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냉면 한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실향민이 아니어도 냉면은 이제 누구에게나 친근한 우리 음식이 되었다. 그저 시원하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이를 알고 진정한 맛을 찾으려 노력한다면 냉면 한 그릇도 임금님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될 수 있을 것. 음식칼럼니스트 고형욱씨는 “함흥냉면 전문점에서 물냉면을 먹거나, 면을 가위로 잘라 먹는 것은 냉면맛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