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슬레와 그의 아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캔버스에 유채, 75×105cm, 1868년, 독일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특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 1919)의 그림 속에 이런 ‘설정 샷’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점심을 먹거나, 댄스파티에서 춤추는 이는 거의 르누아르의 친구이거나 파리 몽마르트르의 이웃 처녀였다.
르누아르가 화가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인 1868년 그린 ‘시슬레와 그의 아내’ 역시 ‘설정 샷’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이다. 이 그림 모델은 동료 화가 앨프리드 시슬레(1839~1899)와 그의 애인 외제니다. 시슬레는 르누아르, 모네와 같이 샤를 글레르 화실의 문하생이었다. 시슬레는 이 그림을 그리기 1년 전인 1867년부터 외제니와 동거하고 있었고, 1868년 첫아이 피에르를 얻었다. 르누아르는 친구에게 그림으로나마 축하인사를 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림 속 젊은 부부는 유난히 행복한 분위기로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이다.
그림은 마치 꿈속처럼 환한, 부드러운 초여름 햇살과 바람 속에서 여성에게 자기 팔을 빌려주며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구레나룻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는 당당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의상 역시 말쑥하니 고급스럽다. 그의 팔을 잡고 있는 여성은 화려한 오렌지색 줄무늬 드레스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드레스와 같은 색깔의 머리핀을 꽂았다. 아마도 르누아르는 걱정거리라고는 없는 중산층 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설정해 이 작품을 그렸을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이 완성될 당시만 해도 시슬레는 동료인 모네, 르누아르보다 한결 나은 처지였다. 동료들과 달리 집안으로부터 조금이나마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었고, 이 해 살롱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이제 시슬레의 앞에는 탄탄대로만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모네, 시슬레, 르누아르, 같은 스승에게 배운 이 동년배 화가들은 훗날 나란히 인상파전을 개최하며 세상의 보수적인 시각에 맞섰으나 세속적인 성공은 모네와 르누아르에게만 찾아왔다.
3명 중 인상파의 강령, 즉 햇빛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의 인상을 포착해 그림으로 옮긴다에 가장 충실했던 시슬레에게 평단은 유난히 인색하게 굴었다. 혹평만 듣는 시슬레의 작품을 사주는 이도 없었다. 반면, 모네와 르누아르는 해가 갈수록 비싼 가격에 그림을 판매하며 경제적 안정과 명성을 얻었다. 시슬레는 옛 친구들을 점점 피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저녁마다 모였던 카페 게르부아에도 더는 가지 않았다. 시슬레가 너무 고집스럽게 인상파적 풍경에 집착했기 때문에 평단이 그를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생 프랑스에서 살기는 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었던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다. 아무튼 ‘모네의 아류’라는 식의 혹평은 유난히 고집 세고 자존심이 강했던 시슬레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 세상을 등진 채 그림에만 매달리던 시슬레는 59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길지 않은 생애에 남긴 1000여 점의 풍경화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세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