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이 아파트는 1976년 준공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 자리를 지켜왔다.
전 세계 저성장·저금리 투자 환경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에서 한국의 고액자산가(금융자산을 10억 원 이상 보유한 개인) 혹은 부자는 과연 어떻게 자산을 관리하고 있을까. 이를 확인하고자 최근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는 ‘2014 한국 고자산가 투자행태 조사’를 실시했다. 한국 부자들이 어떤 자산을 얼마나, 어떻게 관리하고 있으며 이는 해외와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보여주는 기초 데이터다.
먼저 기억할 것은 과거에 이들 한국 부자의 금융자산 연간 성장률이 2008년 이후 단 한 차례도 국내 전체 개인 금융자산 성장률보다 낮았던 적이 없다는 점이다. 유럽 재정위기가 극심했던 2011년 금융자산 성장률만 해도 10.4%로 국내 개인 금융자산 성장률 5.4%의 2배에 육박했다.
이러한 흐름은 2013년 들어서며 비로소 깨진다. 그해 한국 부자의 금융자산 연간 성장률은 1.0%로 2008년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고, 국내 개인 금융자산 성장률 6.3%를 하회했다. 흔히 ‘뉴노멀(New Normal)’이라 부르는 전 세계적 저성장·저금리 투자 환경이 부자와 일반 투자자 모두에게 많은 변화와 어려움을 야기했으며, 자산 투자 및 관리에 대한 근본적 인식 전환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2013년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총 16만7000명(그래프1 참조). 2012년에 비해 2.5% 증가한 수치다. 부자 수 증가율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일시 감소한 후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으나 2013년 들어 크게 둔화했다. 이 또한 과거에 비해 낮아진 투자 성과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약 369조 원, 1인당 평균 22억1000만 원으로 추정된다(그래프2 참조). 전체 국민의 상위 0.33%가 가계 총금융자산 2632조 원의 14%를 보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16만7000명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이 7만9000명으로 전국 부자 수의 47.3%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경기 3만2000명, 부산 1만3000명 순이다. 전년 대비 부자 수 증가율 면에서는 서울과 부산이 각각 1.0%로 전국 평균 2.5%에 비해 낮은 수준을 보인 반면, 울산은 9.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각 지역의 인구 1만 명당 부자 수는 서울이 78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고, 부산이 36명으로 대구(30명)와 경기(26명) 지역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였다.
서울과 수도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서울 내에서는 강남 3구가 약 3만 명으로 서울 부자 수의 37.5%를 차지하며 양천구, 영등포구, 용산구 순으로 뒤를 잇는다. 경기도 내에서는 성남시가 6000명 선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용인시, 고양시, 수원시 순이다.
다만 기억해둘 것은 서울 부자 수에서 강남 3구의 비중이 2009년 39.2%에서 2013년 37.5%로 다소 하락했다는 사실이다. 경기도에서는 성남시, 용인시, 고양시의 비중이 같은 기간 45.2%에서 44.0%로 하락했다. 지역적 쏠림 현상이 과거에 비해 조금이나마 약해졌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산업화를 통한 현대적 기업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토지가 자산 증식에서 핵심 구실을 담당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부자에게는 도시 개발 가속화와 함께 주택, 건물을 포괄하는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면서 자산 증식의 주된 경로로 자리매김했다. 부동산이 최고 투자 수단으로 각인된 배경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자산 형성 과정을 들여다 봤다. 현 자산을 축적한 주된 방법은 사업체 운영과 부동산 투자지만, 연령이 높을수록 부동산 투자의 영향이 컸던 반면 40대 이하 젊은 부자는 부동산 투자보다 사업체 운영을 통해 자산을 축적한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국내 부동산 개발이 한창이던 1970~80년대 주로 경제 활동을 한 세대의 경우 부동산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이 활발했지만, 90년대 이후 경제 활동 세대는 산업구조의 다양화와 경제 규모 확대에 따라 사업체 운영을 통한 부의 축적이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그 결과 한국 부자의 총자산은 평균적으로 주택, 건물, 상가 등 부동산자산이 54.1%, 금융자산이 39.6%, 예술품과 회원권 같은 기타 자산이 6.3%를 차지해 부동산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자산구조를 보인다. 거주 중인 부동산을 제외한 투자용 부동산의 비중도 32.0%로 세계 전체 부자(투자가능자산 순가치 미화 100만 달러 이상)의 부동산 투자 비중 18.7%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 부동산 투자에 대한 강한 선호를 보였다.
이와 함께 총자산 규모가 클수록 부동산자산 비중이 크고 금융자산 비중이 적은 형태를 보인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총자산 규모가 커지더라도 일정 금액까지만 금융자산 형태로 운용하고 나머지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투자하는 자산 관리 행태가 반복적으로 이어져왔다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 부동산 경기 침체는 이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지난 1년간 부동산자산이 감소했다고 응답한 부자가 증가했다고 응답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경우 지난 1년간 부동산자산이 감소한 부자가 증가한 부자보다 12%p 더 많았다. 경기와 인천은 26%p. 반면 지방에서는 부동산자산이 증가한 부자가 감소한 부자보다 30%p 더 많다. ‘서울과 수도권 하락, 지방 상승’이라는 부동산시장의 지역 차별화 현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결과다.
이러한 부동산 경기 침체는 부동산 투자에 대한 한국 부자의 강력한 선호를 점차 떨어뜨리고 있다. 향후 유망한 투자처에 대한 인식과 자산 관리 관심 분야에서는 여전히 국내 부동산이 1순위로 꼽히지만 그 비율은 전년 대비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부동산시장에 부정적 전망
또한 향후 부동산 투자 의향을 묻는 질문에는 투자를 늘리겠다고 응답한 비율보다 현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2012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향후 국내 부동산시장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가진 부자가 전년에 비해 증가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부자에게 부동산 투자의 매력이 감소했다는 사실은 당분간 부동산 투자에 대한 관망세가 지속될 것임을 시사하는 데이터다.
2013년은 한국 부자가 자산 관리의 어려움을 크게 체감한 한 해였다. 일반적으로 한국 부자는 자신의 투자 실력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지만, 세계 경제와 국내 경제의 변동성이 지속됨에 따라 투자에 대한 자신감이 최근 많이 약해진 것으로 나타난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 관리를 하는 데 전문가의 조언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