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의대 학장, 단국대 의료원장 등을 지낸 그는 1991년 제1회 호암상을 받은 저명 의학자.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자유롭게 걷고, 힘차게 악수를 나누며, 집필과 연구에 몰두하는 ‘장수 현역’이기도 하다. 경기 수원의 한 실버타운에서 만난 김 교수는 “어제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 마포에 있는 치과에 다녀왔다. 서울 양재부터 수원까지 오는 광역버스에 자리가 없어 내내 서서 온 게 좀 힘들긴 했지만, 아직 돌아다니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1991년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그는 이 체력을 바탕으로 여전히 의학 분야 연구와 집필에 몰두 중이다. 최근엔 500쪽 넘는 분량의 건강 정보서 ‘건강 100세를 위한 김영균 의학산문’(‘의학산문’)을 펴냈고, 뒤이어 바로 ‘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가’를 주제로 또 다른 저술을 준비 중이다.
각종 의학서적은 물론 영어 및 일어사전이 빼곡히 꽂힌 실버타운 내 서가와 책상이 그의 연구실. 김 교수는 “요즘은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이곳에 있다.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사방이 컴컴할 때 책상 위 작은 조명등 하나만 켜둔 채 사색하고, 책 읽고, 글을 쓰고 있으면 참 즐겁다”며 또 한 번 환히 웃었다.
장수 비결은 일상서 누리는 소박한 기쁨
이 소박한 기쁨은 김 교수의 건강 장수 비결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중학생 시절 폐결핵을 앓았고, 45세 때 당뇨가 발병해 줄곧 약을 먹고 있으며, 심장 질환으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삽입한 상태다. 몇 해 전 방광암 수술도 받았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지금 또래의 어느 누구보다도 활기 넘치게 사는 비결은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나는 당뇨인 걸 안 뒤에도 특별히 식단을 조절하거나 무리하게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단 음식을 적게 먹고, 담배를 끊고, 평소 많이 걸어 다니는 정도가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의 전부죠.”
그 대신 ‘참을 인(忍)’을 생활신조 삼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 애쓴다. “‘참을 인(忍)’은 심장에 칼날을 들이대도 꾹 참는다는 뜻으로, 마음과 몸을 함께 참는 것은 건강의 근본이자, 인간 생활의 근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교수는 인터뷰하기 전날도 벌컥 화를 낼 뻔한 일을 잘 참아 넘겼다고 했다. 치과 진료를 받고 피곤한 상태로 수원행 광역버스에 올랐다가 빈자리가 없는 걸 알게 됐을 때다.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버스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입석이 금지돼 있어요. 그래서 보통 자리가 없으면 버스기사가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다음 차를 타십시오’ 안내를 하죠. 그런데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해서 올라탔더니 승객 몇 명이 벌써 안쪽에 서 있는 거예요.”
처음엔 당황했고, 그다음엔 화가 났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계속 휴대전화가 울리자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한 손을 놓고 휴대전화를 꺼내는 건 엄두조차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버스기사에게 호통을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막 행동에 옮기려 할 때 마음속에서 ‘참을 인(忍)’ 자가 떠올랐다.
“지금 여기서 한소리 한다고 달라질 게 없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노인이 소리를 지르면 버스기사는 되레 화를 낼 테고,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만 민망해질 거 아니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참고 가자는 마음으로 조용히 수원까지 왔습니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얘기했더니 ‘잘했다’고 칭찬해줬어요.”
억지로 말고 자연스럽게 즐겨야

그가 밝힌 건강 비결은 이런 게 전부였다.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는 것,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취미는 농담’이라고 할 만큼 아내를 유쾌하게 대하고 함께 대화하며 자신도 많이 웃는 것 등이다. 김 교수는 ‘의학산문’에서도 줄곧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상자기사 참조).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질병을 갖고 있더라도 인지능력이 정상이고 식사, 취침, 목욕, 화장실 사용, 외출, 독서 등 일상생활을 스스로 불편함 없이 할 수 있으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만성 질환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식단을 조절하는 등의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것이 곧 건강 장수의 지름길이라는 설명으로 들렸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 교수는 ‘연구실’ 안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며 “여기 있는 화초들처럼 사람도 쇠퇴해. 영구적인 것은 환상이야”라고 말했다. 그 자연스럽고 담백한 마음이 ‘아흔 살 청춘’의 비결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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