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원시 모습을 보여주는 원룽의 ‘습지공원’.
몇 번쯤 홍콩을 방문한 사람이라도 도심만을 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홍콩이란 행정구역에서 홍콩섬과 주룽반도가 차지하는 면적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도대체 나머지는 어디로 간 것이고, 우리는 왜 홍콩의 일부만을 홍콩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번 여행은 이 같은 호기심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여행에 앞서, 관련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외국인들은 그저 홍콩의 압구정동, 강남, 종로, 명동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오기가 생겼고, 급기야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통해 홍콩에서 발행되는 도시 외곽 자료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침샤추이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 배낭을 풀자마자 홍콩 관광청이 운영하는 여행안내소로 직행했다. 앳된 관광청 여직원은 미리 요청한 몇 건의 브로셔와 프린터에서 갓 뽑아낸 듯한 수십 장의 A4용지를 건네줬다. 홍콩 변두리 정보를 요청한 외국인이 많지 않았는지 그는 “홍콩에 꽤 와보셨군요”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하기도 했다.
야우마테이의 배낭여행자 식당 미도카페에서 새우볶음밥과 커피를 마시며 자료를 검토한 끝에 드디어 목적지를 결정했다. 바로 북서쪽 끝자락에 붙어 있는 원룽(元朗)이라는 지역이었다. 홍콩섬의 시작이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구역.
홍콩은 지하철이 제법 잘 되어 있어 어지간한 관광지는 지하철 출구번호만 알면 찾을 수 있다. 안내도에는 홍콩에서 처음 접하는 ‘케이시아르 라이트 레일(KCR Light Rail)’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경전철’이다. 다행히 기존 지하철과의 연계가 편리했다. 일본 도쿄에서 타봤던 경전철을 홍콩에서도 타게 된 것이다. 경전철에 몸을 맡기고 15분쯤 됐을까, 습지공원(濕地公園)역이 눈에 들어왔다.
홍콩 역사책을 볼 때마다 등장하는 내용이 하나 있다. 바로 “영국이 들어오기 전까지 이 일대는 모기가 득실거리고 늪지가 이어지던 불모지였다. … 과거 홍콩에는 소수의 어부와 정치 망명자, 해적들이 은신처 삼아 머물렀을 뿐이다”라는 대목이다.
홍콩섬과 주룽반도에는 이런 습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원룽 일대에는 꽤 많은 편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물 새우잡이 외에는 경제성이 떨어지던 습지가 최근에는 전 세계적인 생태보호운동에 힘입어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홍콩 습지공원은 개발 위주의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환경친화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홍콩의 거의 유일한 천연자원이다.
습지공원 방문객센터에 전시된 ‘홍콩 습지대 단면도’. 교육용으로 인기가 높다.
습지공원·셍쳉와이마을 역사문화기행 ‘강추’
공원은 예상외로 쾌적했다. 1만㎡에 달하는 방문객센터는 어떤 개발론자라도 한 번쯤 환경과 생태를 고민해볼 수밖에 없을 만큼 체계적으로 습지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특히 습지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도는 압권이었다.
방문객센터를 나오면 본격적인 습지공원 도보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자는 수면 위에 세워진 산책로를 따라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 산책로는 호수를 가로질러 맹그로브 숲을 지나 습지공원을 한 바퀴 돌게 돼 있다. 특히 호수 한가운데마다 설치된 휴식용 셸터는 수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습지공원 마지막 코스에 등장하는 버드 하이즈(Bird Hides)는 오두막 모양의 2층 목조 주택이다. 습지공원으로 날아오는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숲과 호수를 조망하기에 적당하다.
약 2시간의 습지공원 관람을 마친 뒤 찾아간 곳은 원룽 역사문화기행(Yeun Long Heritage Trail)이라는 구간이다. 현대식으로 치장된 홍콩의 모습이 식상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마을이다.
사실 역사마을은 중국에도 여러 곳 있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인 특유의 불친절함과 영어 소통의 불편함이 뒤 따른다. 이에 비해 원룽 역사문화기행의 미덕은 홍콩의 안정적인 관광 인프라와 중국풍의 고전적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결합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을 풍경을 애써 꾸미지 않아 중세의 품격이 느껴지고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영어가 통한다.
하카족(客家族)의 전통마을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한 셍쳉와이(上璋圍) 성벽마을은 원룽 역사문화기행의 백미다. 한대에서 송나라를 거친 1000여 년간 중국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한 하카족은 자신들의 마을에 거대한 담장을 세워 그 자체를 하나의 작은 성처럼 보이도록 한 독특한 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씨족사회 위주로 형성된 하카족 마을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증거로도 곧잘 인용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혈연적 정체성이 지금까지 보존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중국 남부 특유의 세밀한 조각과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이 인상적인 등씨가문 종사(鄧氏宗祠), 19세기 부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관연서실(觀延書室)과 청서헌(淸暑軒) 건물이 유명하다.
|